49.
몸을 뒤로 물리며 소현이 입구로 걸어갔다.
“갈아입고 나오세요. 머리도 충분히 식히고요.”
사냥감을 주시하는 것처럼 소현이 유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천막이 완전히 소현의 모습을 가리고 나서야 유란은 몸을 돌렸다. 제 심정처럼 새빨간 드레스가 시야를 데웠다.
촬영 내내 소현을 신경 쓰느라 감정에 오롯이 집중할 수 없었다. 바로 보이는 곳에 지한이 찾던 여자가 서 있으니 당연한 거였다.
키스로 충분히 우위를 선점했다고 여겼는데 소현은 유란을 지켜보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유란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 모습이 흡사 지한을 손에 거머쥔 사람이 부리는 여유처럼 비쳐 유란은 견디기 어려웠다.
이런 기분으로 도저히 촬영에 전념할 수 없었다. 유란의 속눈썹이 흔들리다가 빠르게 올라섰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적거렸다. 통화 버튼을 눌러 귓가에 대는 건 머리보다 몸이 앞선 행동이었다. 소현의 말대로 머리를 식히려면 필요한 사람이었다.
연결음이 끊어졌다. 유란은 예민하게 곤두선 감각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나 지금 디스플레이 CF 촬영 중이야.”
한참 뒤에야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소현과 똑같은 물음에 유란은 어이가 없어졌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무신경한 답이었지만 기죽지 않고 말했다.
“오늘 시간 어때? 나 촬영 끝나고 괜찮은 곳에서 야경 보면서 저녁 먹고 싶은데.”
「…….」
지한은 말이 없었다. 이곳에 소현과 제가 만난 걸 알고 있을까. 알고 있겠지. 대답이 없는 이유를 단번에 파악한 유란은 그 점을 이용했다.
“나와 약속했잖아.”
며칠 전 민준을 통해 들어 지한이 아직 한국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CF 계약하면 내가 원할 때 한 번 만나주기로. 그거 오늘로 하고 싶어.”
지한이 직접 부탁해 수락한 거라고 민준에게 자랑처럼 얘기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때 유란은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다. 싫다고 하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더라도 유란을 끌어다가 촬영장에 갖다 놓을 인물이었다. 그럴 바엔 수락하는 것이 그림상 더 좋았다.
상황이나 감정이나 유란은 지한의 앞에서 명백한 을이었기에 손을 내밀었을 때 뭐라도 챙겨야만 했다. 원할 때 만나 달라는 것이 계약을 수락하는 조건이었다.
한 번이라는 제한은 지한이 둔 마지노선이었다. 거기다 스킨십은 제외하란 경고가 뒤따랐지만 그런 것쯤은 유란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어차피 술이 조금 들어가고 분위기를 조성하면 넘어오는 게 남자였다. 지한이라고 다를 바 없을 거란 생각에 흔쾌히 유란은 그걸 받아들였다. 곧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기에 외국에서 밀회를 즐길 예정이었지만, 현재로선 나중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아니. 시간 말해.」
가깝게 입술을 붙였는지 숨소리가 뭉개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고막으로 소름이 일었다.
“저녁 8시.”
유란은 긴장감으로 곤두선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전까지 촬영 끝낼 것 같으니까 여기로 데리러 와.”
「…….」
“주소 보내줄게. 네 차 끌고 와줘.”
잠자코 듣고 있던 지한이 소감을 말했다.
「주문이 까다로운데.」
“촬영이 보통 힘든 게 아니라서 말이야. 대가는 후하게 받아야겠어.”
「…….」
뼈가 있는 말이라 의미를 알아들었을지도 모른다. 지한은 시큰하게 웃었다.
「밥 한번 먹어주는 것쯤이야.」
수락을 받았지만 유란은 여전히 기분이 엉망이었다. 그래도 촬영을 마친 뒤 이 감정을 해소할 생각을 하니 아까보단 견딜 만했다.
저 여자는 이 사실을 모르겠지. 유란은 한결 열기를 덜어낸 눈으로 빨간 드레스를 보았다.
의상을 갈아입고 그것과 어울리는 메이크업으로 수정을 거쳤다. 촬영장으로 다시 발걸음하자 광고주와 얘길 나누고 있던 소현의 시선이 유란에게 향했다. 점수를 매기는 것처럼 꼼꼼하게 유란을 훑고 내려가는 얼굴이 끝내 미소를 지었다.
“좋네요. 아까보다 더 나을 거 같아요.”
유란은 거기에 지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이 의상으로 촬영해보고 다시 아까 의상으로 갈아입고 나올게요. 다시 해봐요, 저도 욕심이 나거든요.”
붉은 드레스 자락이 가볍게 유란의 뒤를 따랐다. 강풍은 여전히 눈뜨기 어려울 정도로 몰아쳤지만 천이 아까보다 우아하게 물결치며 장관이 연출되었다. 흐름을 타는 것처럼 감독은 이쪽이 더 나은 것 같다며 의욕을 불태웠고 마음에 안 들어 하던 김 부장도 꽤 만족한 모양새였다. 시선을 내리깐 유란의 표정은 아까와 달리 고혹적인 매력을 뽐내었다.
소현은 실시간으로 김 부장과 감독, 그리고 유란까지 견주어보며 분위기를 파악했다.
“부장님. 어떠세요?”
“이제야 봐줄 만하군. 들어가서 무슨 얘길 했기에 저렇게 바뀌어?”
“한 게 있나요. 의상만 바꿨을 뿐이죠.”
대화에서 느꼈지만 유란은 소현을 질투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살짝 찔렀을 뿐인데 그 사실을 감추려는 듯 유란은 더욱 여유가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선천적으로 소현은 강한 상대를 만나면 불타오르는 습성을 지닌 여자였다. 그런데 거기에 물러서지 않고 제 장점인 화려한 가면을 쓰는 유란을 보니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느낀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실내 세트장 소파에서 디스플레이를 감상하는 모습까지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니 어느덧 저녁 8시 30분을 훌쩍 넘어가 있었다.
“수고 많았어요. 촬영 정리합시다!”
소현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불안감에 끝까지 붙어서 보았지만 생동감이 넘치는 촬영 현장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광고 하나는 기가 차게 잘 나올 거다.
“고생하셨습니다.”
스텝들과 인사를 나눈 소현은 슬슬 김 부장이 있는 술자리로 합류하려 핸드폰을 꺼냈다. 저를 대신해 팀장이 김 부장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을 거였다. 때마침 옷을 갈아입은 유란과 마주쳤다. 소현은 준비한 인사를 건넸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장유란 씨 덕분에 영상 제작된 이후엔 소비자들 반응까지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제가 더 감사한걸요.”
유란은 힘든 기색을 지워버릴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아까 천막 안에서 있었던 일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소현은 매니저에게 인사를 건네고선 걸었다. 함께 나가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누구 만나려고?”
“오빤 모르는 사람이야.”
“요즘 여배우들한테 기자 붙는단 얘기 있는데 조심해.”
사생활 관련된 얘기라 소현의 청각이 집중되었다.
“열애설 터지면 인간미 넘치고 좋지 않아?”
“인간미 찾다가 인기 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들을 생각해봐.”
“상대만 괜찮으면 오히려 이미지가 좋아진다니까.”
스튜디오를 나온 소현은 건물 바깥쪽으로 향했다. 구두 소리가 멀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근접하게 달라붙었다. 차가 뒤에 있나. 앞에 주차해두는데 혼잡함이 싫어 뒤쪽으로 차를 대었던 소현은 차 키를 꺼내며 저를 따라오는 유란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운전석으로 다가간 소현이 문고리를 잡던 찰나였다. 유란이 미소를 띠며 소현에게 인사했다.
“들어가세요. 전 선약이 있어서.”
“네.”
제 개인적인 선약을 왜 내게 얘기하지. 유란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소현의 눈동자가 굳었다.
제아무리 어둡더라도 매끈한 자태를 가릴 수 없었다. 주인과 닮았다고 소현이 생각한 외형은 어디서든 존재감 하나는 확실하게 인식시켰다. 유란은 의도적으로 굳은 소현을 보며 부탁하듯 말했다.
“지금 본 건 비밀로 해줘요. 소문나면 안 돼서요.”
웃으며 대기하고 있던 차로 걸어간 유란이 문을 활짝 열었다. 조수석에 올라타고 소현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빨간 라이트가 잔상처럼 남아 소현의 가슴을 지폈다.
저건 지한의 차였다.
허락처럼 쉽게 열렸던 문이 심장을 두들겼다. 소현은 정작 제가 잡은 문을 열지 못하고 서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운전석에 올랐다. 사방이 꽉 막힌 내부로 들어오자 사고가 암전됐다. 시동을 걸지도 않고 소현은 핸드폰부터 꺼내 들었다.
지한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어느 면을 봐도 유란과 만나기 위해 지한이 데리러 온 모양새였다. 그렇게 결론 짓자 액정을 덮은 손톱이 섰다.
저를 보며 눈꼬리를 세웠던 유란은 남자를 빼앗길까 걱정하는 여자가 보이는 경계심이었다. 하지만 촬영장 바깥으로 나오자 그녀는 여유만만한 승자가 되었다. 지한이 데리러 온 데다가 함께 사라졌으니까. 그 행동 하나로 소현을 가뿐하게 조연 자리로 밀어 냈다. 소현은 턱이 아릴 정도로 씹으며 시동을 걸었다.
“나랑 해보자는 건가.”
일터가 아닌 곳에선 얼마든지 상대해준다고 말했는데, 벗어나기가 무섭게 싸움을 걸어온 거나 다름없었다. 손목시계를 푼 소현이 조수석으로 던졌다. 핸들을 움켜잡았지만 화가 가라앉질 않았다. 창틀에 한쪽 팔을 세운 소현이 뜨거워진 머리를 짚었다.
“예쁘다, 예쁘다 해줬더니…….”
제게 정면으로 도전을 걸어올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