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당장이라도 지한과 유란의 뒤를 추격하고 싶었지만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소현은 빠르게 도착한 목적지에 차를 대고서 안에 들어갔다.
“어, 강 대리 왔나……?”
문을 열자마자 소현은 빈 잔을 찾아 술을 가득 채웠다. 정제 없이 목으로 넘어간 독한 알코올이 가슴을 화끈거리게 했다. 단숨에 잔을 비워 움켜쥔 소현이 놀란 김 부장을 향해 젖은 입술을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니요.”
재킷을 벗은 소현이 블라우스 소매를 풀어 반쯤 접어 올렸다.
“운전하고 오는 내내 목이 말라서요.”
소파에 착석한 소현의 얼굴은 몹시 차가워 보였다. 팀장이 눈치를 보며 웃었다.
“종일 촬영장에 있느라 목이 많이 말랐나 봅니다.”
“그래, 강 대리가 꽤 애를 썼지. 어떤가?”
“부장님도 느끼셨을 겁니다.”
소현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영상 아주 잘 빠질 거 같아요.”
CG를 입히는 후가공이 남았지만 그건 소현의 걱정거리가 되지 못 했다. 김 부장은 흐뭇하게 잔을 들었다.
“자, 고생했으니 한 잔 받아.”
병이 기울어지자 잔으로 알코올이 채워졌다. 소현은 잔을 부딪치고선 입가에 대었다. 독한 알코올이 코끝을 매섭게 찔러왔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 했다. 제 안에 채워진 생각들이 훨씬 더 악독했기에.
“아, 오늘 장유란 배우 실제로 보니 어떠셨습니까?”
“초반에는 영 감을 못 잡는 것 같더니 괜찮았네.”
소현은 천천히 알코올을 넘기며 저를 약 올리듯 사라졌던 차를 떠올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잔을 감싸며 조였다.
그러고 보니 저를 건드린 인물엔 버릇없는 나쁜 녀석도 포함돼 있었다. 제아무리 배려심이 없는 녀석이라지만 감히 내가 있는 촬영장에 와서 다른 여자를 태우고 가다니.
어제 촬영 얘길 했을 때만 해도 다른 얘기처럼 고개만 까딱이던 얼굴이 생각나 소현은 우스웠다. 제가 장유란과 같이 있을 걸 뻔히 알면서, 두 여자가 부딪칠 걸 예상했으면서. 저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방관자 태도를 고수했던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가 이대로 모르길 바랐던 걸까. 정작 지한이 소현에게 감추려 했더라도 그건 그거대로 화가 나는 상황이었다. 몰래 밀회를 즐기는 것처럼 뒤쪽에 차를 대고 있었다는 점이 제 눈을 피하려던 수작처럼 느껴졌다.
원래 정조 관념이 가벼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지한이 요즘 얌전했다. 진작 저를 건드리고 남았을 위인인데 손만 잡고 잔다는 둥 헛소리를 하곤 했으니까.
한 공간에 생활하는 시간은 예전보다 늘어났는데 키스조차 시도하지 않는다. 잠잘 때 소현을 안고 자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순간 소현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VR 시장이 잘만 열리면 좋을 텐데, 강 대리 생각은 어떤가?”
설마 성욕을 다른 데 풀고 있는 건 아닐까.
“강 대리.”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MR까지 시도되고 있으니 대중들에게 친숙해질 날이 머지않아 올 겁니다.”
똑 부러지는 대답에 김 부장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그렸다. 소현은 보이지 않게 잔을 움켜쥐었다. 고백할 만큼 좋아하는 여자에게 아무런 짓도 안 하는 게 가당키나 한 건가.
“저, 잠시만.”
지한의 얼굴이 소현을 거칠게 흔들어 놓았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소현은 일어나 문을 열고 나섰다. 크게 심호흡했지만 안에 쌓인 열기는 가시질 않았다. 고백에 답하지 않은 이상, 소현이 지한의 여자관계에 참견할 명분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 두 사람이 뭘 하고 있을지 몰두된 머릿속이 타올랐다.
벽에 등을 기댄 소현이 눈을 감았다. 복도를 비춘 조명이 어지럽게 눈꺼풀 위를 스쳤다. 질기게 늘어지던 생각이 끊긴 건 찰나였다.
“이거 가만두면 안 되겠네.”
눈을 뜬 소현은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
“여기 분위기 괜찮다.”
유란은 웃으며 제게 주어진 시간을 만끽했다. 남들 시선이 닿지 않을 프라이빗룸을 선택한 것도 저를 향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지한이 제 말 한마디에 데리러온 데다가 어부지리로 소현이 주차한 곳과 겹쳤다. 제게 털을 세우지 말라고 했던 여자가 지금쯤 잔뜩 곤두서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꾸며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승자에게 주어진 상처럼 고급 요리가 접시가 비워지기 무섭게 다음으로 이어졌다.
“감사해요.”
제 앞에 신중하게 접시를 내려놓는 직원과 눈을 맞추며 유란이 웃었다. 직원은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지만 지금 둘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속마음을 파고들어 보고 싶었다. 제가 스캔들과 무관한 배우만 아니었더라면 충분히 능청스럽게 질문했을 거였다. 유란은 아쉬운 대로 말했다.
“매니저 오빠가 걱정하더라. 누구 만나냐고 아까 계속 묻고 그랬어.”
지한은 아까부터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물을 마셨다. 빈 잔으로 긴 물줄기가 담겼다. 인사한 직원이 나서자 지한이 입을 열었다.
“먹어.”
“살찔까 봐 천천히 먹으려고.”
“그러던가.”
보통은 이런 얘길 하면 제 몸을 훑기 마련인데, 지한은 한껏 단장하고 나타난 음식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떻게 조각해 먹을지 계산하는 것처럼 면밀하게 관찰한 다음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리고 행위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예리한 나이프를 감싸고 제어하는 긴 손가락이 아찔했다. 그 모습을 감상하던 유란이 정신을 차리고 음식을 잘게 조각내 먹었다. 연한 식감이 혀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유란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입에서 살살 녹아.”
“살살 녹게 잘하니까.”
탐스러운 말을 속삭이면서 표정은 건조했다. 유란은 물렁해진 심장을 내버려 둔 채 물었다.
“너 애인 안 만든다며?”
“…….”
지한은 턱짓으로 답을 대신했다.
“민준 오빠한테 소개 시켜달라고 말했을 때 그러더라. 잠깐 만나는 거지, 그 이상 기대하지 말라고.”
음식물이 넘어가면서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 점이 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보는 눈들이 많아서 남자 만나는 것도 조심스러웠고 내게 마음 줄 리도 없으니까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거든.”
“…….”
제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다시 음식을 먹는 행위는 사람을 집요해지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한의 앞이라면 제 목소리도, 배우라는 명성도 무시하면 그만일 별거 아닌 존재로 전락 당한다. 유란은 애써 웃으며 물었다.
“이젠 궁금해져서 그런데, 그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돼?”
그래서 놓기 어려웠다. 첫 만남에서 충동적으로 제가 한 키스를 가볍게 받아준 남자인데, 이후에도 저를 무관심하게 대하는 태도가 구미를 끌어당겼다.
“난 배우라서 치명적인 문제라 안 된다지만 너는 왜 그런지 궁금해서.”
저런 남자에게 사랑받으면 어떤 기분일까. 가져본 적 없기에 생겨나는 욕망이었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공략하려면 원인부터 깨달아야만 했다. 지한은 물컵을 쥐며 입가에 대었다. 잔여물이 쓸려나간 입이 쉽게 열렸다.
“그럴 생각이 안 들어.”
“그게 다야?”
“그럼 뭐가 더 있어야 하나?”
“예쁘고 재력 있는 여자, 다 만나보고 다녔을 거 아니야. 한 번쯤은 한 여자랑 오래 보고 싶다는 생각 안 들었어?”
“지금 너를 보며 느끼고 있지.”
그 말에 유란은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래서 오래 만날 생각이 안 들어.”
심장은 다시 올라오지 못하고 계속 아래에 머물렀다. 유란이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않자 지한이 마저 컵을 기울이며 물을 마셨다.
“몇 번 보면 나에 대해서 너무 파고들거든.”
“……궁금해서 그런 거야. 인간관계에서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 서로를 알아가려고 만나는 거잖아.”
“안 그런 사람도 있어.”
유란은 알 수 없다는 듯이 눈가를 구겼다. 어떻게 저 남자를 만나고도 파고들지 않을 수 있을까. 말도 안 되었다.
“난 내가 뭘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게 취향이야.”
지한이 정갈하게 나이프를 내려 두었다.
“근데 넌 눈을 너무 많이 깜빡여.”
그 말에 유란은 제 마음을 들켜 곤란하단 소녀처럼 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파악하고 있는 거라 반가웠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지금 연락처는 어떻게 돼? 그땐…….”
유란의 말을 가로막는 것처럼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무나도 큰 데시벨이라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핸드폰을 꺼내는 지한을 보며 유란이 볼멘소리를 냈다.
“식사 중에는 진동으로 바꿔 놓는 게 매너야. 특히 여자 만날 땐.”
“예의 버린 지 오래돼서.”
액정을 확인한 지한의 눈빛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로 대는 건 유란의 시선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어디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지한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가 칼날이 서린 것처럼 날카로웠다. 지한은 순순히 답했다.
“식사 중이야.”
「아. 나 데려갔던 호텔 레스토랑이니?」
“…….”
어디서 뭘 보고 있나. 지한은 간결하게 눈동자를 옮기며 CCTV가 있는지 확인했다.
「밥 먹고 방에서 자겠지. 아니야?」
소현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지한은 유연하게 받아쳤다.
“내 거취는 네가 정하는 거지. 오늘 가?”
「오라고 하면 올 것처럼 말하네.」
“언제 안 그런 적 있나.”
답하면서 지한은 무릎에 놓인 냅킨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았다.
「말은 잘 해. 그 말에 책임이나 질 수 있니?」
“어떤 책임을 져줄까. 관심이 생기는데 말해.”
「그래, 그럼 입만 살았다는 게 아닌 걸 증명해 봐.」
“뭘.”
「지금 집으로 와.」
그 말에 지한은 유란을 쳐다보았다. 저를 앞에 두고 통화하는 상대가 누군지 제법 궁금한 눈치다. 아니, 그 상대를 물어뜯을 것처럼 사나웠다. 유란의 얼굴을 보며 지한이 느리게 입을 움직였다.
“가면. 네가 있나?”
소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한을 자극하는 숨소리만 들려올 뿐, 곧이어 쾅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목적지를 말하는 목소리가 빠르게 이어지더니 도발성이 짙은 목소리가 고막을 건드렸다.
「나 지금 출발하는데, 너는?」
뜨겁게 쏟아진 숨소리가 지한의 혈관을 역행했다. 지한은 핸드폰을 귀에 떼고서 말했다.
“먼저 가. 뒤따를 테니.”
통화를 끝낸 지한은 곧장 냅킨을 치웠다. 아직 코스 요리가 남아 있었다. 유란은 눈이 커다래지더니 이윽고 분에 차올라 말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급한 일이 생겼어. 먹어.”
“이건, 약속이 틀리잖아.”
곧 떠날 것만 같아 유란이 지한을 붙잡았다.
“방금 전화 온 사람, 강소현이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랑 어떤 사이기에 이러는 거야?”
“내 집에 억지로 들여와 예뻐해 주고 있지.”
유란의 입술이 충격에 떨렸다. 지금까지 지한이 했던 말들이 전부 뭐였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기다리게 한 적 없어서 급해.”
여자에게 관심 없다는 듯이 굴었던 지한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