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일어선 지한은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듯 고조된 상태였다. 유란은 치욕감 그 이상의 감정을 느꼈다.
제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저와 있을 때와는 상반 되게 달라진 지한이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다. 마치 저와의 시간을 억지로 맞춰주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듯해서. 답은 이미 전부터 나와 있었다.
“강소현이 부탁해서 나한테 그런 거지.”
“…….”
“보니까 알겠더라. 그때 나랑 있을 때 방문 열고 들어온 그 여자, 맞더라고.”
지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소현이 나한테 오늘 뭐라고 했는지 알아?”
다급해진 유란이 말하자 거기에 반응하듯 지한의 고개가 움직였다. 유란은 허탈하게 웃었다.
“너 내가 오늘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기나 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위압감이 서린 눈빛이 단숨에 유란을 제압했다. 몸이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굳은 입가로 날이 스치는 것처럼 회색빛 눈동자가 느슨하게 움직였다.
“여자라서 한 번 봐준 거야. 조심해.”
지한은 지체하지 않고 룸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유란의 표정이 풀리며 일그러졌다.
매너라고는 조금이라도 없는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민준이 당부했던 것을 듣고서도 졸랐던 건 저였다. 제게 넘어오지 않은 남자는 없을 거라고 자만했지만 지한은 예외적인 남자였다.
나를 데리러 왔으면서 전화 한 번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듯 사라졌다. 유란은 물기 어린 시선을 들었다. 빈 의자와 예의를 갖추듯 반듯하게 놓인 식기가 말해주고 있었다.
“……나쁜 새끼.”
자신은 지한의 사적인 영역에 낄 수 없다고.
*
무슨 정신으로 집에 온 건지 소현은 기억나지 않았다. 컨디션이 나쁘다는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른 가보라며 김 부장이 소현을 보내주었다. 현관에서 구두를 벗던 소현이 거울을 보고선 그 위로 손을 짚었다.
“보내줄 만 하네.”
살기 넘치는 눈동자가 유리를 비켜 나갔다. 거실로 걸어간 소현은 재킷을 벗고 단추부터 풀었다. 저를 답답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해제했지만 가슴은 여전히 꽉 막혀 있었다.
“하아…….”
이 감정을 뭐라고 형용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처음인 듯 낯설었고 지저분했다. 업무의 연장선이나 다름없는 자리도 팽개치고 나왔고, 현재로선 지한의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소현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창문을 보았다.
어두운 한강 위로 불빛이 일렁거리며 흔들렸다. 심란한 마음이 그 흐름을 따라 거칠게 물결쳤다.
쾅, 소현의 가슴을 깊게 파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 와?”
불을 켠 지한이 소현을 보고선 저를 여기까지 데려와 준 차 키를 테이블로 던져두었다.
“내가 늦었네.”
지금 저를 이렇게 만든 원흉과 만나자 꽉 조이던 가슴이 터질 것처럼 팽창했다. 소현은 골반을 짚고 있던 손을 내리며 단숨에 지한의 앞까지 걸어갔다. 멀뚱히 선 형체로 손을 뻗어 옷깃을 잡고 끌어내렸다. 허리가 반으로 접히고 소현의 입술이 목덜미로 엄습하듯 향했다. 살결 위로 코끝이 스치며 지나갔다.
“향수 냄새는 안 나네?”
소현은 한껏 들이마신 숨을 뱉으며 속삭였다.
“내가 자기 전에 전화했나 봐.”
“잠은 너랑 자야지.”
“내 앞이라서 말 예쁘게 하는 것 좀 봐. 그럴 필요 없는데.”
지한은 곁눈질하며 소현을 마주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고 싶은 말?”
지한을 잡아챈 손가락이 구겨졌다.
“너 누구랑 만나고 왔니?”
“장유란.”
너무나도 쉽게 나오는 이름이 소현은 우스웠다. 숨길 생각도 없나 보다. 원래 이런 녀석이었다.
“장유란하고 밥만 먹었어?”
“그럼 뭘 더 해야 돼?”
뭘 하든 당당하고, 남의 기분 따윈 생각하지 않는다. 소현은 진심으로 이 남자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내가 오늘 촬영장에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뒤에서 몰래 만났지. 매너가 영 별로라는 생각 안 들어?”
“…….”
지한의 눈썹이 구겨졌다.
“한 번 만난 것뿐이야.”
그 말에 소현은 머리가 아득해졌다. 간신히 글자를 씹어 뱉었다.
“나랑도 세 번만 만나기로 했었지.”
“…….”
“세 번을 서로 원하는 것만 챙기면서 즐기기로 했지.”
소현의 입술이 떨렸다.
“그게 꽤 재미있었나 봐? 나 아닌 다른 여자랑도 횟수 없애면서 만나고 다니는지 내가 또 몰랐네.”
처음 나한테 손을 뻗은 건 너였다. 하룻밤으로 끝내려고 했던 나를 찾아와 곤혹스럽게 만들고, 말도 안 되는 숫자 얘기하면서 제한을 둔 것도.
“내가 너무 멍청했네.”
떠나지 않겠다고 단내 나는 말로 나를 안심시키고. 너밖에 안 보이게 해준다고 고백하고……억지로 올라가는 입술 끝이 떨렸다.
“속을 뻔했잖아.”
전부 내가 아니라, 네가 그랬어. 움켜쥔 손가락이 새하얗게 질렸다.
“난 그럼 몇 번째 여자니?”
그런 식으로 사람 마음에 파고들었으면 책임져야지. 소현은 저를 피하지 않고 쳐다보는 잿빛의 눈동자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단 한 점의 부유물 없이 저를 담는 눈동자가 소현의 가슴을 울렸다. 그래서 소현은 울지 않으려 했다.
“이렇게 집까지 날 끌어들이고 고백하는 게……몇 번째야.”
“너랑만 해.”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너한테만 그래.”
“내게 들켰으면 솔직하게 얘기해. 그런 말로 넘어가려 하지 말고, 똑바로 말하……!”
지한이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부딪쳤다. 소현의 어깨가 움찔하며 떨렸다. 경련하는 입술을 미끄러지듯 문지르며 들어온 혀가 빠르게 한데 섞였다. 입안에 가득 차 있던 분노와 원망이 언어가 되지 못하고 강렬한 성정에 휩쓸렸다. 소현이 옷깃을 놓고 어깨를 잡았다. 살가죽이 뜯길 정도로 손톱을 세우자 지한이 손목을 잡아 왔다. 공기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감싸더니 엄지가 달래듯이 살결을 문질렀다.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은 부위였다. 소현의 눈꺼풀이 구겨졌다. 짙은 향이 훅하고 밀려왔다.
“으읏……!”
허리가 뒤로 꺾일 만큼 강렬한 압박감이 소현의 입안을 채웠다. 입천장을 훑고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긴박한 숨결이 혀를 녹여버릴 것처럼 타액과 함께 채워졌다. 소현의 눈가가 구겨졌다. 저를 핥고 예뻐해 주던 짐승이 본성을 드러내 저를 삼키는 것만 같았다. 손은 다정하면서 혀는 야성적인 성미대로 소현을 헤집어 놓았다.
숨 쉴 틈조차 주지 않는 무지막지함 앞에서 입술 끝에 점이 떨렸다.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가며 역동적으로 율동했다. 입가로 타액이 번들거리며 음탕한 소리를 냈다. 혀를 끝까지 밀어 넣고 힘껏 빨아 당기자 뛰는 심장까지 지한에게 넘어갈 것만 같았다. 질척하게 부대끼던 입술을 지한이 놓아주었다.
“왜 못된 소리만 할까.”
“하아, 하…….”
소현은 마수의 손길에서 벗어난 것처럼 숨을 터트렸다. 지한은 탁해진 눈동자로 야릇하게 부푼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너도 예쁘게 얘기해.”
엄지가 입술 선을 벗어난 타액을 섬세하게 쓸었다.
“듣는 내 가슴까지 건드리지 말고.”
바삐 숨을 뱉던 소현의 시선이 경직된 채 올라왔다. 그건 제가 한 발언들이 지한의 심장을 건드렸다는 소리였다.
“CF 계약하는 조건으로 한 번 만나준 거야.”
소현이 얼얼한 입안으로 숨을 채웠다.
“오늘 널 보고 꽤 열 받았는지 데리러 오라고 해서 간 거였어.”
“…….”
폐가 조금씩 정상적으로 호흡하기 시작했다. 소현은 눈꺼풀을 일그러뜨렸다.
“그럴 이유가 있어?”
“뭐가.”
“장유란이 내게 화날 이유가 있느냐고.”
아귀가 맞지 않는다. 제게 지한과의 관계를 과시하거나 증명하려 부른 거라면 또 모를까, 화가 나서 불렀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저와 처음 인사할 때 경직되던 유란의 얼굴이 의아했다. 소현은 지한과 키스하던 여자인 것을 촬영장에서 처음 안 거지만, 유란은 오래전부터 이어오던 경계심이 타오르듯 확고했었다.
“혹시 장유란에게 나와 만난다는 소리 했니?”
“안 했어.”
“그럼 왜 나한테 그래. 만나자마자 왜 나한테 가시를 세우는 거냐고.”
“말은 안 해도 보면 알 수 있지.”
지한은 소현의 턱 밑으로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시선이 서로 맞아떨어졌다.
“내가 너한테 눈을 못 떼니까.”
소현의 머릿속이 굳었다. 유란은 자신을 기억하냐고 물었고 소현은 기억하지 못 했다.
“너도 처음 만났을 때 나만 봤잖아. 아닌가?”
그곳에서 지한을 보느라 여자의 얼굴은 신경 쓸 수 없었으니까.
“…….”
그걸 유란이 가운데에서 느꼈다면. 오늘의 경계심이 이해가 간다. 그때부터 소현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라면 촬영장에서 만났을 때 보였던 표정과 대화들이 전부 납득이 갔다. 소현은 허탈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꼴사납게…….”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만약 유란이 지한과 깊은 관계였더라면 저를 노려보지 않고 제 위치를 소현에게 알려주려 당당하게 굴었을 거였다. 하지만 유란은 소현을 주시했고 동요했다. 카메라 앞에서 표정을 제대로 짓지 못할 만큼.
“나 뭐한 거니, 지금.”
그런 유란을 보면서 소현은 오히려 위기의식을 느꼈다. 저보다 어리고 아름다운 외모 앞에서 질투하는 것도 모자라 엉망인 상상을 했다. 지한과 필사적으로 엮으면서, 내게 한 것처럼 유란을 대했을 거라고. 어쩌면 저보다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그런 질 나쁜 상상을.
“꼴이 왜. 예쁜데.”
지한은 소현의 턱 밑을 간지럽히듯 문질렀다. 소현의 시야가 어렴풋이 막이 씌워지며 흔들렸다.
유란과 함께 있던 자리를 박차고 나와 내게 왔는데, 이런 너를 두고 무슨 상상을 했던 걸까.
다른 여자에게도 손을 대었을 거라고 너무나도 쉽게 착각했다. 그동안 내게 보여주었던 네 모습은 그게 아니었는데,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는 버릇 때문에 나 홀로 밑바닥까지 내려간 거다.
그건 두려움이 만들어낸 습관이었다. 받을 상처가 크면 회복되기 어려우니까. 그러니까 방지 턱처럼 나쁜 상상을 가장 먼저 선두로 세운다. 가슴에 먼저 흠집을 내면 실제로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고 한들 유려하게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네가 장유란하고……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번엔 그게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장유란 싫어하는 남자 찾기가 더 어렵거든.”
흠집을 내면 낼수록 뜨거운 열상을 입은 것처럼 가슴이 욱신거렸다.
“인기 좋은가 보지.”
“그래서 캐스팅 1순위였지. 남녀 구분 없이 모두 장유란을 좋아하니까.”
“…….”
지한이 웃자 소현의 가슴으로 불꽃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이 감각을 놓을 수 없어 유란을 꺾어서라도 지한을 거머쥐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내가 빼앗아올 생각이었고.”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웃음이 가신 지한의 입매가 정교하게 움직였다.
“넌 힘쓰지 않아도 돼.”
턱에 머물던 손이 올라가 소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비교할 필요도, 질투할 필요도 없어.”
붉어진 귀 뒤로 넘어온 손가락이 매듭을 짓는 것처럼 지그시 눌러왔다.
“네가 말하면 난 잡혀 줄 거야.”
청각을 멀게 하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