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53)화 (53/86)

53.

*

소현은 작게 어깨를 움츠렸다. 등 뒤로 몰려오는 차가움을 피해 온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몸을 밀착했다. 그러자 온화한 기운이 살결 위로 막처럼 씌워졌다.

“따뜻해…….”

작게 말하는 소현의 머리를 덮는 손길이 느껴졌다. 끌어당기는 끌림을 따라가며 소현은 편히 숨을 내쉬었다. 파묻히듯 몸을 구기자 두근거리는 심장의 파동이 부드럽게 감겼다.

이렇게 따뜻한 적이 있었나. 계절이 변하면서 종종 느끼던 한기가 지금은 더는 느껴지질 않았다. 가슴 사이로 파고들며 아득히 채우는 소리 덕분이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손길은 하나의 연주 같았다. 자장가 같기도 했고 누군가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더 자라는 속삭임에 안도하며 소현은 제 목 뒤를 어루만지는 손길을 받아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현은 파랗게 물든 풍경 속에서 깨었다. 언제나처럼 방안은 조용했다. 코앞에서 들썩거리며 숨을 쉬는 가슴이 소현의 눈동자를 따스하게 데웠다.

“물 줄까.”

나직한 목소리에 소현의 고개가 올라갔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지한의 눈동자가 파랬다.

“물 마실래?”

답해야 하는데 목이 잠겨 말이 나오질 않았다. 촉촉한 수분이 필요하긴 한데 지금 이 품이 너무 따뜻해 떨어지기 싫었다. 소현이 대답대신 두 팔로 지한의 목을 휘감았다. 등을 쓸어내린 커다란 손이 허벅지로 옮겨갔다.

“샤워해야 하는데.”

주무를 때마다 살점이 아픔을 미비하게 토해 냈다. 어제 어떻게 잠들었는지 소현은 기억나질 않았다. 얼마나 했는지도, 그저 쏟아 내듯 계속 매달리고 서로를 탐하고 또 탐했다.

“소현아.”

그 부름에 소현은 눈을 감으며 목에 두른 팔을 더 조였다.

“물부터 마시자.”

“…….”

이대로 있고 싶은데, 침대로 팔을 짚으며 일어난 지한을 따라 몸이 반쯤 일으켜졌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터라 허리가 축 늘어졌다. 지한이 소현의 다리를 끌어와 제 골반에 붙였다.

“…….”

“매달려 봐.”

어제 멋대로 잡아 벌리고 올려두고 난리였으면서. 덕분에 허리 아래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현재로선 그 간단한 주문도 무리였다. 지한은 개의치 않고 소현의 양쪽 허벅지를 제게 끼워 감싸 일어났다. 다리가 반쯤 허공에 떠 흔들렸다. 품에 안겨 주방에 도착한 소현이 반쯤 눈꺼풀을 올렸다.

“자. 열어.”

한손으로 소현을 받친 지한이 냉장고 문을 열어 꺼낸 물병을 소현에게 내밀었다. 눈앞에 대령하니 안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소현이 하는 수 없이 차가운 병을 잡아 뚜껑을 열었다. 한 모금 마시니 긁힌 것처럼 목이 따가웠다. 동시에 축축하게 물기를 머금은 숨이 터져 나왔다.

“아……살 것 같다.”

“나도 줘.”

입을 벌린 지한은 어제 체력을 다 쓴 사람답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얼굴색과 피부가 반질반질 빛이 났다. 자신은 걷기도 힘들 정도인데, 어쩐지 억울해져 소현은 병을 일부러 비껴 쏟아 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지한이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받아 내며 말했다.

“제대로 해.”

“꼭 이러니까 세수하는 것 같네. 내가 세수시켜 줄까?”

“상관없는데 너 추울까 봐 그러지.”

“내가 왜……아, 차가워.”

지한의 몸을 타고 흐른 물줄기가 금세 소현에게도 닿았다. 움찔하며 몸부림치자 엉덩이와 허리를 감싼 팔이 붙잡으며 딱딱해진다.

놀린다고 벌 받았나. 한 쌍의 영혼처럼 똑같이 당해버렸다. 잠이 홀딱 깬 소현은 얌전히 지한의 입안으로 병을 기울여주었다. 그걸 받아 마시는 지한은 아침부터 시원스러운 이목구비를 뽐내었다.

제 눈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 거지만. 콧대를 쓸어 보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물병 입구로 혀가 올라와 밀어냈다. 소현은 천천히 기울였던 손목을 바로 세웠다.

“너 나 안고 잘 있는다. 안 무거워?”

지한은 질문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긴, 어젯밤에도 이런 자세로 저를 가뿐하게 안고서 유린했던 남자인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 연장선으로 지금도 몸이 포개어져 있다. 아래도 마찬가지였다. 젊음을 과시하듯 혈기왕성한 기세가 아까부터 소현의 엉덩이를 음험하게 스치고 있었다. 소현은 손끝을 세워 헝클어진 지한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어젠…….”

말을 하니 어쩐지 목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다. 소현이 입술을 감쳐물었다가 문득 섬뜩하게 표정을 굳혔다.

“……7시 40분?”

잘못 본 게 아닌가 의심하며 눈가를 좁히자 전자시계가 41분으로 숫자를 바꿨다. 소현은 등골이 싸해졌다.

“잠, 깐만. 지금 40분이야?”

“그게 왜?”

“아, 나 늦었어.”

소현은 재빨리 지한의 어깨를 짚으며 발을 휘둘렀다. 내려놔 달란 의사 표현이었는데 지한은 굼떴다.

“늦으면 어때.”

“야, 빨리 나 내려놔! 빨리!”

어제의 여운을 되새기는 건 여유로운 사람들이나 하는 거였다. 몸부림치는 소현을 욕실에 내려놓자마자 문이 매정하게 쾅 닫혔다. 지한은 느릿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회사 출근 시간을 늘릴 방법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럼에도 지한은 벽에 한쪽 팔을 붙이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사이에 욕실 안쪽에서 소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얼른 씻어!』

생각의 고리는 거기서 끝이었다. 시켰으니 곧바로 실행해야 하는 사람처럼 지한은 다른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뻐근하게 부푼 아래를 오늘은 기꺼이 손으로 놀아주었다. 어젯밤, 제품에서 신음하던 소현을 떠올리면서. 상상했을 뿐인데 너무 쉽게 흥분감에 도달해 아쉬울 정도였다. 제 머릿속에 각인된 소현의 얼굴이 못 버틸 만큼 야한 것도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지한은 정신없이 걸어 다니는 소현을 보며 옷을 입었다. 맨얼굴에 젖은 머리카락만 대강 말린 모습이었다. 한껏 흐트러진 모습인데 입은 옷은 빳빳하게 각이 잡혀 주름 하나 없었다. 코트를 입은 소현이 청초한 얼굴로 말했다.

“나 데려다줘.”

“…….”

꼭 어른인 척하는 아이 같았다. 지한은 감상하던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다시 말해봐.”

“나 데려다 달라니까? 이럴 시간 없어. 빨리, 차 키 어디 있어?”

소현은 지한의 손목을 잡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 사이에도 손목시계를 보며 일분일초를 쪼개어 계산하는 치밀한 눈빛이 이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지한은 슬리퍼를 끌며 걸었다. 소현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빨리 좀 해. 왜 이렇게 느려 터졌어?”

“내가 이래야 네가 좀 느리게 걷지.”

“무슨 소리야?”

“몸 챙겨. 너 아프면 무슨 소용이야.”

진지한 걱정임에도 불구하고 소현의 눈이 뭔 헛소리냐는 둥 가느다래졌다.

“몸 아프니까 너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지. 괜찮으면 내가 직접 뛰었지……아, 됐어. 그냥 버스 타야겠다.”

그 말에 지한의 눈빛이 번득였다.

“타. 데려다줄게.”

소현이 못 미덥다는 듯 지한을 쳐다보았다.

“30분 안에 갈 수 있겠어?”

“누구 명령인데.”

그제야 지한의 손에서 한량처럼 놀고 있던 차 키가 본분을 찾았다. 잠자코 잠들어 있던 자동차에 시동이 걸렸다. 소현은 얼른 조수석에 오르면서 안전벨트를 맸다.

“빠르게 가는 건 좋은데 신호 지키고, 그리고 갑자기 브레이크 밟지 마. 큰일 난다.”

가방에서 파우치를 꺼낸 소현은 화장을 시작했다. 피곤해 늦게 일어났으면서 그 방탕한 흔적은 한 톨도 안 보이게 하겠단 결의가 손끝에서 느껴졌다.

신호에 걸려 멈출 때마다 지한은 소현의 얼굴을 조용히 감상했다. 잠깐 눈을 떼었을 뿐인데 점점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도도한 이미지엔 화장이 큰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벗겨놓으면 그렇게 야할 수가 없는데, 지금은 냉철한 가면을 쓴 것처럼 철저했다.

그편이 훨씬 더 나았다. 소현의 진짜 모습은 저만 알고 있으면 되었으니.

지한은 묵묵히 전투를 준비하는 소현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차를 몰았다. 마스카라를 마친 소현은 뷰러로 속눈썹을 신중하게 고정해 올렸다. 마지막으로 물티슈로 깨끗이 닦은 입술에 립스틱을 발랐다. 손끝으로 입술 선을 두들기던 소현이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며 지한을 보았다.

“나 어때?”

“섹시해.”

“그런 거 말고.”

“발밑을 핥아주고 싶은 기분이야.”

소현은 멈칫했다. 지한이 고개를 돌리며 소현을 향해 말했다.

“진심이야.”

밝은 곳에서 본 회색빛 눈동자가 윤기로 빛났다. 동시에 차가 멈추었다. 소현은 창문 밖을 확인했다. 회사와 500m쯤 떨어진 곳이었다. 소현이 안전벨트를 풀지 않고 말했다.

“회사 앞까지 가.”

지한은 느리게 기어를 바꿨다. 회사 앞엔 얼씬도 하지 말라고 당부할 만큼 소현은 제 사생활과 관련해 예민한 편이었다.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득실거리는데 눈에 띄는 차량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만큼 급한 상황인가. 지한이 회사 건물이 바로 보이는 도롯가에 멈춰 서자 그제야 소현이 벨트를 풀었다.

“이따가 문자할 테니까 나 데리러 와. 어제 놓고 온 차 가지러 가야 돼.”

“그래.”

마지막으로 제 모습을 점검한 소현이 차 문을 열었다. 핸들에 팔을 걸친 채 유리창 너머를 보았다. 안절부절못하던 여자는 온데간데없었다. 출근하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소현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한의 시선이 내려갔다.

높은 구두가 불편하진 않을까, 어젯밤 제가 마음대로 잡았던 허벅지가 마음에 걸려 다리를 주시하고 있자 소현이 갑자기 몸을 돌려 다가왔다.

뭘 두고 간 것이 있나. 지한은 조수석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달칵, 문을 연 소현이 깨끗한 시트로 한쪽 무릎을 올리며 상체를 깊게 숙였다. 지한의 입술로 립스틱이 진하게 남았다. 지한은 굳은 턱을 느슨하게 벌렸다. 잠시 섞인 혀가 무언가를 속삭이듯 움직였다.

“이제 내 애인이니까 여기와도 된다고.”

지한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소현이 허리를 뒤로 빼며 물었다.

“무슨 소리인지 알았니?”

“……대충은.”

그 말에 문고리를 잡은 소현의 인상이 구겨졌다.

“제대로 알아들어야지.”

문이 닫혔다. 손목시계를 보더니 바삐 걸어가는 뒷모습이 지한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한참 뒤에야 눈을 깜빡인 지한은 제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붉은색을 발라서 그런가.

“……뭐야.”

왜 이렇게 뜨거워. 지한은 입술이 벌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

언어가 녹아내린 부위를 빠짐없이 핥는 것처럼 혀로 더듬었다. 묘한 맛이 났다. 지한은 허기진 사람처럼 핸드폰을 꺼내 소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이어지다가 뚝 끊겼다.

「왜?」

“제대로 알아듣게 얘기해줘.”

이제는 귀로 들을 차례였다. 소현은 주저하듯 속삭였다.

「……꼭 회사 들어왔는데 이래야겠어?」

엘리베이터인지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았다. 지한은 갈증 섞인 숨을 뱉으며 되물었다.

“뭐라고 했는지 빨리.”

「……애인, 이라고 했다.」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지한의 귓가에서 거미줄처럼 엮였다. 지한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놓았다.

“꼴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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