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54)화 (54/86)

54.

「이상한 소리 할 거면 끊는다.」

시트에 머리를 기댄 지한이 한숨을 쉬었다.

“진짜야. 진짜 섰어.”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이상한 부분에서 소유권을 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한은 꽤 예전부터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알아야지. 이제 네 거잖아.”

소현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회사에서 이런 통화를 하는 것이 낯설 거다.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 해.」

그 어수선한 숨소리마저 지한에겐 흥분으로 다가왔다. 핸드폰을 잡은 지한이 허벅지를 굳히며 물었다.

“애인이랬나, 우리?”

발음할 때 공기가 매끈하게 입천장을 훑고 지나갔다. 그 음률적인 애무에 아래가 함께 전율했다.

「그래. 그러니까 제발 좀 끊자. 나 도착했어, 안녕하세요.」

“……가서 꺼내오고 싶다.”

지한은 창문턱에 기대어 세운 손으로 미간을 깊게 눌렀다. 소현과 헤어진 지 고작 몇 분 지났다고, 벌써부터 보고 싶어졌다. 어제 저 때문에 체력이 바닥일 텐데 아침도 먹이지 못하고 보낸 게 마음에 걸린다.

「집에 가, 아니면 너 할일 하든가. 나도 일해야지.」

“해야 할 일이 생겼어.”

「잘 됐네. 뭔데?」

지한은 상체를 당기며 기어를 풀었다.

“너 먹일 거라도 만들어야겠어.”

「…….」

소현이 부서지는 것처럼 웃었다.

「그래. 그거라도 하고 있어.」

통화를 마친 지한은 창문을 열었다. 상쾌한 아침 공기가 안으로 밀려들었다. 엑셀을 밟자 밀려들어온 바람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열기를 차츰 희석해 나갔다. 건물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태양이 눈부신 빛을 쏘아대며 공허해진 몸으로 채워졌다.

룰을 깨는 건 쉽다. 그걸 지키려고 할 때 어려워지는 거다.

지금 지한은 힘든 순간을 이겨낸 승자처럼 쾌감에 젖었다. 축배로 빛의 광선이 지한의 어깨로 흠뻑 배어 들었다.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나질 않았다. 제 것이 되었다는 게 이렇게 머리가 새하얘질 정도로 기쁜 일인가.

지금껏 가져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제 손에서 놀아나던 것들 전부 시간이 지나면 퇴색돼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오직 소현만이 형태도 없으면서 오래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단어 하나로 이제야 서로가 서로에게 형체를 부여했다.

그 한마디를 지한이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소현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녀의 말 한마디가 지한의 안에서 큰 부분을 결정짓고 바꾸기도 한다는 걸.

지한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분 인수 진행해요.”

식사 자리를 나오는 것인지 낮은 어조가 오가더니 주변이 조용해졌다. 더스틴이 말했다.

「9조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12조 이상의 가치입니다. 내가 3조 떨궜고.”

‘닌톤’에서 매각하는 지분은 97.32%였다. 그동안 눈치 싸움을 하며 군침을 흘리는 하이에나들을 성난 이빨을 세워 물리쳐 왔던 지한이었다. 더스틴은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알고 있다.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어.」

중저음의 영어가 부드러웠다. 한국 진출은 더스틴의 소망하던 것이었고 그랬기에 제 아들인 지한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경영을 가르치는 것 이상의 실전 투입이었다. 하나의 기업을 흡수하는 일에 지한은 부담감을 느끼긴커녕 기대 이상으로 일을 처리해왔다. 시간을 끌면 닌톤사에서 몸집을 더 낮출 테지만 지한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그쪽에서도 더는 안 봐줄 겁니다. 너무 싸게 먹어도 보기 안 좋아요.”

「2시간 뒤에 비서에게 출국하라고 말해두마.」

“이거 가지면 지분 좀 떼 줘요.”

「주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 너와 내가 이뤄낸 합작이니까. 너는 언제 돌아올 거지?」

비즈니스와 걱정이 어우러진 대화였다. 지한이 약속된 날짜에 돌아가지 않아 한차례 허탕을 친 더스틴이었다.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바쁜 제 비서까지 보냈는데 제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좌석을 확인해보니 아예 탑승하지 않아 통화한 것이 얼마 전이었다. 그땐 인수 건을 끝까지 마무리 짓겠다고 하더니 오늘은 침묵뿐이었다. 더스틴은 대답을 직감했다.

「더 머물 생각이구나.」

“맞습니다. 어쩌면 몇 년이 될 수도 있고요.”

「몇 년이라니? 거기서 뭘 할 생각이지?」

지한은 주차를 마치고 시동을 껐다. 조용한 내부 안에서 담배를 꺼내 문 지한이 지포 라이터를 반으로 꺾었다. 불길이 고요히 타들어 갔다.

“연애요.”

「연애?」

“먹고 살면서 연애 좀 하게요.”

차가운 쇳소리를 내며 불길이 꺼졌다.

“비서 오면 나머지 얘기해서 이번 건 정리하는 거로 하죠.”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신기할 노릇이군. 어떤 여자인 거야?」

“아버진 엄마 어디에 반했는데?”

더스틴이 불현듯 웃음을 터트렸다.

「당당하고 두뇌가 명석했지. 그리고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학교 내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

“비슷하네.”

지한은 담배를 비스듬히 물며 차 문을 열었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나랑 몸도 잘 맞아요.”

「나도 네 엄마랑 그랬어.」

부자가 친구처럼 경쟁심을 불태웠다. 지한은 제대로 자극당한 사람처럼 말했다.

“누가 더 잘 맞는지 어떻게 증명하지.”

「널 똑 닮은 자식 낳아봐야 이길 수 있을 거다. 아이는 신이 내려주는 선물이야. 사랑으로 완성돼 태어나는 거지.」

저를 닮은 아이라, 건물로 이어지는 유리문 앞에 선 지한이 필터를 짓눌렀다.

“아직 그건 잘 모르겠는데.”

「차차 알게 될 거야. 언제 그녀와 식사를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먹고 싶으면 아빠가 움직여야 할 거야. 소현이가 많이 바쁘거든.”

「소현? 그 여자의 이름인가 보군. 나보다 더 바쁜 사람인 거냐?」

더스틴의 시간은 일분일초가 귀중했다. 잠자는 시간을 쪼개어 생활하는 것도 그 이유였다. 그가 눈을 뜨고 사인하고 결제하는 것들은 가치와 자산으로 환산되었다. 지한은 조소했다.

“내 여자가 아빠를 보러 거기까지 갈 순 없잖아?”

단순 명료한 이유 때문이었다. 더스틴은 기가 찬 웃음을 내비쳤다.

「아쉬운 사람이 움직이라는 소리로군.」

“보고 싶은 사람이 와야죠.”

「그래서 네가 거기 있는 거로구나.」

지한은 연기를 길게 뱉으며 담배를 비벼 껐다. 아직 입술에 소현이 남긴 언어와 자국이 남아서 그런가. 맛이 없었다. 긴 장대를 쓰레기통에 던진 지한이 말했다.

“식사하세요. 나도 식사 준비해야 되니까.”

「네가 요리를 한다고?」

“왜요. 하면 안 됩니까?”

더스틴은 얼이 나간 채로 말했다.

「원래 그런 건 질색하지 않나.」

저를 가장 잘 아는 아버지도 놀랄 발언이었다. 지한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뭐라도 직접 먹이고 싶어서요.”

「허 참.……또 연락하마.」

통화를 마친 지한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거울에 비친 입술은 립스틱이 묻어 있었다. 혀로 살짝 건드렸다가 지워질까 금세 그만두었다. 소현이 퇴근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이걸로 달래볼 생각이었다.

기분 좋은 허기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한은 넓은 집 안에서도 안락함을 느꼈다. 잠이 들 것처럼 몽롱한 기분으로 소파에 앉았다. 소현이 급하게 출근 준비를 하면서 펼쳐놓은 물건과 옷들이 듬성듬성 시야에 걸렸다.

따스한 햇살이 거실 바닥을 뒤덮고 물결쳤다. 창문을 가득 채운 한강으로 빛이 범람했다. 시선을 빼앗긴 것처럼 지한은 눈을 떼지 못했다.

잿빛 도시는 그녀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그렇게 야한 얼굴을 화장으로 가리고 전투적인 자세로 사냥을 나선다. 그런 매력이 지한을 이토록 달아오르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여자가 제 영역인 회사를 뒤에 두고 우리 사이를 정의했으니, 지한은 세상 어떤 것을 쥐어 주더라도 소현이 말한 언어를 맞바꿀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멋대로인 내 세상에 법을 세우는 여자. 관자놀이에 기댄 손가락이 안쪽으로 구부러졌다.

“…….”

매일 보던 풍경이 오늘따라 유독 아름다웠다.

*

“대리님.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나?”

“아침부터 계속 웃는 얼굴이셨잖아요.”

“그런가.”

함께 퇴근하는 동료가 한 말에 소현은 입술을 느슨하게 당겼다. 안면 근육이 노곤하게 풀릴 정도로 업무 중간마다 지한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몸은 고단한데 피로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하루였다.

“오늘 차 안 끌고 오셨죠?”

“응. 이제 가지러 가야지.”

“택시 타고 가세요? 방향 같으면 저 중간에 내려주시면…….”

“미안. 윤하 씨. 오늘 누구와 만나기로 해서.”

“아, 친구분 만나시나 봐요?”

애인이라는 단어를 혼자서 음미하듯 소현은 미소 지었다. 예전엔 사생활에 관심을 보이는 동료들에게 먹이를 주고 싶지 않아 감췄지만 지금은 정말 저 혼자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지한의 외형은 여자들에게 표적이 되기 쉬웠다.

“윤하 씨, 먼저 가.”

“네. 대리님 주말 잘 보내세요.”

감춰두고 나만 보고 싶은 게 이런 기분일까. 소현은 윤하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명색이 배우인 유란마저 관심을 보였던 남자라 그런지 소현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동안 제 애인이 다른 여자와 눈이라도 맞으면 그걸로 인연은 끝이었다. 아쉬울 것이 없기에 엇나간 마음을 다시 돌릴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어차피 남자는 많았고 또 만나면 되니까. 그런데 지한은 얘기가 다르다.

소현은 천천히 몸을 돌려 도롯가로 향했다. 설렘과 두근거림이 심장에 맴돌았다. 로비를 나설 때부터 소현의 신경은 오직 헤드라이트를 뿜어대는 차로 향해 있었다. 소현이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타자 어둠 속에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이제 와?”

소현은 대답 대신 지한의 얼굴을 감싸며 입술을 겹쳤다. 뭉개진 숨결이 서로의 얼굴로 번졌다. 입술 안쪽을 건드리던 혀를 빼자 지한이 반쯤 내리깐 시선을 움직였다.

“왜 마저 안 하고.”

몸을 살짝 뺀 소현이 웃었다.

“나머진 집에 가서 하게.”

지한을 보니 머릿속에 담긴 생각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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