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55)화 (55/86)

55.

이렇게나 아무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좋은데, 제가 느끼는 긴장감쯤은 감당해야 할 것만 같았다. 지한의 얼굴을 시선으로 쓸어내린 소현이 똑바로 의자에 앉아 안전벨트를 끌어당겼다.

“주소 내비에 찍어줄 테니까 여기 먼저 가자.”

일하는 도중에 나온 적은 없는데, 그날 얼마나 눈에 보이는 게 없었으면 차도 버려두고 택시를 타고 왔었다.

하기야 지한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퇴근 시간을 양보했었다. 뭘 믿고 이런 남자에게 제 귀중한 일을 넘겨주었는지. 가만 보면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낀 지 꽤 된 거 같기도 하다.

주차된 차 앞에서 잠깐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지한은 대리 기사를 불러 소현의 차를 대신 운전하라고 했고 소현은 그럴 시간에 각자 차를 끌고 집으로 가자는 거였다. 결국 소현의 의견에 굴복한 지한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너무 지한다운 생각이라 소현은 웃음이 났다.

“이제 만족하니?”

「어.」

가는 동안 통화를 하자는 거였다. 제 목소리로 옆자리 공백을 지우려는 발상이 소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잠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연애가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설레지.

소현은 운전대를 잡고 저녁 10시의 늦은 야경을 감상했다. 불꽃처럼 피어난 가로등과 제 뒤를 바짝 따라오는 차량은 한 쌍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백미러로 제 뒷자리를 다른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고 지켜내는 자태를 감상하는 것도 또 다른 묘미였다.

“가는 길에 심심하니까 서로 얘기나 할까?”

「말해.」

“궁금한 것들이 있어.”

소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동안 참아왔던 것들을 하나씩 물어보았다. 태어난 곳과 외국에선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그리고 나이까지. 소현은 은밀한 비밀을 엿듣는 것처럼 하나하나 답해주는 지한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대부분 소현이 예상했던 것들이었다. 재상 그룹과 연관된 건 어머니 때문이었고 아버지가 외국인이라는 점. 사업을 하시는데 인수 문제도 아버지가 부탁한 일이라는 것. 외동이라는 건 성격을 보고 예측했던 거였지만 의외인 건 역시나 나이였다.

“네가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몇 살로 생각했는데.」

“말했잖아, 처음엔 미성년자로 생각했었다고.”

최악을 생각하는 버릇 탓도 있지만 지한의 외모는 꽤 어리게 보였다. 저보다 어린 남자라는 건 변하지 않겠지만. 소현은 또 다시 위기감을 느꼈다. 지한에게 맞춰주려면 지금 단련된 체력을 더욱 가꿔야겠단 결심이 섰다.

지한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제일 먼저 소현이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는지 묻는 지한에게 소현은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다.

“우리 부모님은 현재 홍콩에 거주해. 어머니가 사업 수완이 좋으셔.”

「비슷하네.」

“그래? 증권 관련된 일인데 이건 부모님 일이니까 이쯤 해두고, 여동생이 하나 있어. 걔도 홍콩에서 대학 다녀서 가끔 한국에 들어오는 정도야. 나는 대학교를 미국에서 다녔어. 너도 알 거야, 우리 동문이잖아? 바쁘게 졸업하고 직장 생활하다가 아는 선배 소개받아서 한국으로 들어왔고.”

「왜 거기 계속 안 있었는데.」

“지긋지긋해서.”

소현은 유리창 앞으로 깔린 주황 불빛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잘 해도 거기선 난 이방인이었거든.”

괜찮았는데 가끔씩 저와 다른 머리색과 피부색, 눈동자, 소소한 것들이 소현을 격리시켰다. 그래서 외로웠다. 저 혼자만 두 눈을 가진 세계에 외눈박이인 것처럼.

“너도 그런 기분 느껴봤을 텐데.”

「난 없는데.」

“정말?”

「어.」

원래 성격이 무심한가. 거기서 발현되는 자신감도 지한의 매력 중 하나였다.

“넌 세상에 두려운 게 없어 보여. 부족한 것도 없어 보이고.”

소현은 입가에 호선을 그린 채 물었다.

“그런데 왜 나를 좋아하는 거야?”

「네가 나를 두렵고 부족하게 하니까.」

그 말이 소현의 가슴을 울렸다. 불빛으로 늘어진 도로 때문일까.

「어려서부터 생각 없이 산다는 소리 들었어. 내 뒤에서 지껄인 말들이었지만.」

“……네 얼굴에 대고 그런 소리를 하는 미친 사람은 없었다?”

「걸리지만 않으면 나도 손은 안 대.」

“무서워라…….”

「너도 내가 두려워?」

이상한 물음이었다. 소현은 웃었다.

“나만큼은 널 사랑해줘야지.”

그러자 지한이 숨소리를 들려주었다.

「차 세워 봐.」

나직한 말에 소현은 도망치듯 엑셀을 더 밟았다.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는 것까진 좋았는데 문을 열고 나갈 수가 없었다. 제 옆에 바짝 차를 주차시키고 운전석으로 다가온 그림자 때문이었다.

소현은 저도 모르게 잠근 장치를 풀지 않았다. 문이 달칵거리다가 이윽고 창문이 톡, 톡 두드려졌다. 소현은 가만히 곁눈질했다. 루프 패널을 짚고 한껏 숙인 몸은 한 마리의 대형견 같았다.

“열어.”

마른침을 삼킨 소현이 창문만 반쯤 내렸다. 회색빛 눈동자가 칼날처럼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거 말고.”

눈빛만큼은 맹수였다. 이대로 문을 열면 침대까지 끌려갈 것만 같은 직감이 섰다. 소현은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이러고 해.”

단어 하나에 발정 난 사람처럼 지한의 모습이 거칠었다. 아쉬운 대로 좁은 틈에 입술을 바짝 대고 음습한 속삭임을 밀어 넣는다.

“다시 얘기해줘.”

“넌 왜 자꾸 다시 말해달래? 반복하는 거 성격에 안 맞아.”

“또 듣고 싶게 말하잖아.”

이 정도로 효과가 뛰어날 줄 알았더라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럼 네가 또 들을 짓을 하면 되지. 쉽잖아?”

그리고, 민망하기도 했고. 자연스럽게 나온 얘길 계속해달라고 조르니 소현은 귀까지 뜨거워졌다. 차 안이 어둡지 않았더라면 제 변화를 지한이 눈치채는 건 일도 아니었다. 틈 사이로 움직이던 입술이 묘한 웃음을 그렸다.

“이제 문 열어. 올라가게.”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소현은 힐끗 지한을 보았다. 한 발자국 물러난 모습이 다시 충견처럼 듬직했다.

괜찮아졌나. 소현은 잠금장치를 풀고서 가방을 들고나갔다. 차 문을 잠그고 걸어가는 동안에도 지한은 뭔가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이상함에 소현이 물었다.

“너 뭐 있니?”

“있지.”

“뭔데? 말이라도 해줘. 그래야 나도 마음의 준비라는 걸 하지.”

“올라가서 봐.”

뭐가 있기에 저러지. 소현은 반신반의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집 안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넓었다. 제가 급하게 출근 준비했던 흔적 하나까지 치워지지 않고 방치되어 있었다. 치우려고 허리를 숙이자 지한이 곧장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걸 본 소현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아……설마.

“너 정말 요리했어?”

“어.”

주방에 도착한 소현은 부쩍 늘어난 가전 용품에 정신이 없었다. 냄비며 식기며 갑자기 껴 맞춘 듯 부자연스러웠다.

“그때 잘 먹었잖아.”

그중에서도 가장 어울리지 않는 건 인덕션 앞에 선 지한이었다. 주방과 저 넓은 어깨의 체구는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소현은 가방을 아일랜드 식탁에 내려두며 말했다.

“아주머니가 와서 도와줬니?”

“오시긴 했지.”

뭔가 이상한 말이다. 그래도 음식 근처에 서니 허기가 느껴졌다. 냉장고에 넣어둔 밑반찬도 금세 비워 아쉬웠는데 오늘 그 솜씨를 맛보나 싶었다. 소현은 다가가 지한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고생했네. 저녁 지금 먹을까?”

손길이 닿은 근육이 빳빳하게 튕겨 올랐다. 지한은 고개를 뒤로하며 소현을 훑었다.

“먼저 씻어.”

“그래, 얼른 하고 나올게.”

퇴근하면 먹는 것도 일이라 가볍게 샐러드를 섭취하는 게 소현의 평소 식생활이었다. 저녁에 탄수화물은 적이지만 지한과 만나려면 체력 보충은 필수였다. 제아무리 많이 먹어도 침대 위에서 칼로리를 다 태워줄 위인이었다. 소현은 아직도 얼얼한 감각을 느끼며 어서 빨리 지한에게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젊어서 그런지 괴물 같은 체력인데다가 한 번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크기도 남달랐고. 그건 여성들에게 환영받기보단 기피할 사이즈였다. 물론 소현은 환영하는 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한은 제 성감대를 알려주지 않아도 찾아내 건드리는 유일한 남자였다. 쾌감에 목이 쉴 정도로 소리를 내는 건 지한 앞에서만 가능했다. 쾌감으로 찌르다 못해 전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가만 보면 타고났다니까.”

소현은 샤워 부스에서 나와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말렸다. 덕분에 윤택한 성생활을 즐길 수 있겠단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감에 부풀었다. 갑자기 발동 걸려 흥분하는 버릇만 빼면 다 좋은데.

“나 나왔어…….”

“앉아.”

새로 사온 게 틀림없는 접시로 오목조목 담긴 반찬이 식탁에 놓여 있었다. 소현은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지한은 맞은편에 앉으며 소현을 보았다.

“먹어 봐.”

“잘 먹을게.”

이미 아는 맛이라서 그런지 기대감에 부풀었다. 소현은 제일 먼저 탁한 색상의 국을 숟가락으로 떠 입에 넣었다. 순간 소현의 눈꺼풀이 살짝 일그러졌다. 무사히 목으로 넘겼음에도 혀에 남은 미각이 얼얼했다. 개운하거나 얼큰한 게 아니다. 한 스푼 더 먹어본 소현은 이도저도 아닌 맛에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간이 심심한 거 같은데.”

그날 먹었던 음식과 같은 사람이 한 솜씨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맛이었다.

“……그때 아주머니가 왔다고?”

지한은 턱을 괴었다.

“와서 말만 해줬지.”

정말 지한이 직접 한 거다. 소현은 그 사실을 깨닫자 혀가 굳는 걸 느꼈다. 큰일 날 뻔했다. 지한의 앞에서 맛이 어떤지, 뭐가 부족한지 서슴없이 평가할 뻔했다. 소현은 재빨리 미소를 지었다.

“정말 맛있다. 간이 심심한 건 저염식으로 먹으라고 한 거지?”

“저염식? 그냥 한 거야.”

“아……그래.”

“부족해?”

“아니, 나 요즘 짜게 안 먹거든. 몸이 자꾸 붓는 거 같아서 피하고 있어. 국도 잘 끓였네, 재료 손질도 네가 했…….”

네가 했구나. 안에 든 무와 양파, 감자들이 다양한 형태로 조각놀이를 하고 있었다. 소현은 숟가락에 얻어걸린 괴상한 감자를 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식감을 살리려고 모양낸 것도 잘했어. 아무래도 음식은 씹는 것도 중요하니까.”

칼로 얼마나 연마했으면 표면이 이러지? 소현은 가늘게 뜬 눈을 접었다.

“근데 이거 국 이름이 뭐야?”

“맑은 순두부 국.”

소현의 눈가가 경직됐다.

“순두부가 어디 있어?”

“잘 찾아봐.”

그걸 찾아야 한다고? 소현이 국을 이리저리 살폈지만 순두부의 형태로 추정되는 건 없었다. 다만 국 안으로 희미하게 부유물이 떠다니고 있었다. 소현이 아무런 말도 못 하자 지한의 시선이 살며시 내려앉았다.

“계속 끓였더니 그런가.”

소현은 경직된 입가를 풀었다.

“……그래.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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