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56)화 (56/86)

56.

저를 위해 해준 요리인데 정석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정성이 중요한 거 아니던가. 지한이 제게 해준 첫 음식이었다. 그 생각을 하며 소현은 밥알을 젓가락으로 떼어내 입에 넣었다.

국을 맛보고 나니 앞에 정렬된 반찬들이 어떤 맛을 감추고 있을지 두려워졌다. 국은 그래도 물이라도 들어가서 밋밋하다지만, 저 바짝 졸여진 검붉은색은. 소현은 잡념과 달리 유려하게 젓가락을 옮겨 그걸 집어 입에 넣었다. 턱을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한이 물었다.

“어때.”

“괜찮아. 독창적이고 신박해.”

지한은 감상을 한 귀로 흘렸다.

“많이 먹어.”

“그럴 거야. 네가 해준 거니까.”

턱을 괸 지한이 소현의 입술 끝에 찍힌 점을 주시했다. 말할 때나 웃을 때도 좋긴 하지만 뭘 먹을 때 율동감이 특히나 좋았다. 안에 채워진 것 때문에 볼록 도드라지는 게 생동감이 넘쳤다. 제 것을 삼킬 때도 그랬다. 소현은 지한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다음 반찬을 집어 들었다.

“광고는 도 아니면 모거든. 중간을 할 바엔 아예 망쳐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거나 아니면 독보적으로 뛰어나 회자되거나. 중간은 금방 잊혀.”

지한이 녹일 것처럼 시선으로 그 부위를 더듬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지한은 길고 긴 포식을 했다. 식사를 마친 소현이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자 그제야 지한의 시선이 내려왔다. 반찬과 밥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잘 먹었어.”

소현은 물까지 전부 비운 뒤 접시들을 치웠다. 그리고는 곧장 냉장고로 향했다. 안에 차곡차곡 정렬돼 있는 맥주 캔을 꺼낸 소현은 쉼 없이 알코올을 마셨다.

“뭘 잘 꺼내 먹네.”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여기도 꺼내 먹어봐.”

소현은 제 엉덩이를 스치는 감각에 움찔했다. 이내 입가에서 캔을 떼어내며 몸을 돌렸다.

“그래. 차라리 이걸 먹으라고 해.”

감각을 더듬으며 말했다. 지한은 알 수 없다는 듯 눈가를 구겼다. 소현은 개운해진 입술을 움직였다.

“솔직히 말할게. 너 요리 안 했으면 좋겠어.”

“왜. 맛이 없었어?”

저런 질문을 하는 걸 보면 만들면서 간도 안 본 게 분명하다. 소현은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남자에게 맹렬히 말했다.

“도 아니면 모라고 했지. 굳이 따지자면 네 실력은 도야. 다른 의미로 안 잊힐 만한 맛이었지.”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지한의 표정이 굳었다. 소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쉬워하지 마. 나도 요리 못 하니까. 그래서 사 먹는 거지. 마트 가면 신선한 재료들로 양념장까지 포함해서 팔기도 하고, 아침에 반찬을 집으로 배달까지 해주거든.”

“…….”

소현은 꽤나 까다로운 미식가였다. 곤혹스러운 음식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제가 이 남자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한마디로 겨우 먹었단 소리네.”

안 좋아하면 절대 이런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래. 입가심 좀 해야겠어.”

소현은 손으로 형체를 꽉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샤워하고 나와.”

남은 맥주를 마저 털어 넣으며 소현이 식탁으로 구긴 캔을 올려 두었다.

입술 점이 힘차게 율동하던 것이 전부 꾸며진 거였다니. 지한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가 내려갔다. 침실로 들어가는 소현을 좇았다.

“…….”

이상한 데서 오기를 불태우게 하는 여자였다.

*

“오랜만입니다.”

정장을 입은 남자는 긴 비행시간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반듯한 태도였다. 상념에 빠져 있던 지한이 악수를 청하는 손을 보고선 잡아주며 무던하게 말했다.

“얼굴 좋네요.”

“감사합니다.”

바트는 더스틴이 총애하는 비서 중 한 명인 남자였다. 지한과는 어릴 때부터 얼굴을 봐오던 사이이기도 했다. 인천 공항은 출입국 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지한은 혼잡함을 빠르게 벗어나며 차에 올랐다. 바트가 차에 오르기 전 정장 재킷을 점검하자 창문이 미끈하게 내려갔다.

“옷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내가 남자를 벗기진 않으니까.”

“하하, 유머 감각은 여전하시군요.”

지한은 한 번도 농담을 한 적 없었다. 진심으로 한 소리를 가볍게 받아들이는 바트는 지한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영어로 하는 대화가 한국의 정경을 배경에 두고 펼쳐졌다.

“저녁엔 변호사가 도착할 겁니다. 일이 많아 같은 비행기를 타지 못 했어요. 우선은 닌톤 측과 대화해 보고…….”

“…….”

정갈한 목소리는 지한의 청각으로 흡수됐지만 뇌까진 도달하지 못 했다.

호텔에 도착한 지한은 라운지 바로 바트를 안내했다. 문을 앞에 두고 또 한 번 바트가 재킷을 매만졌다. 지한이 애용하는 공간은 오늘만큼은 밀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룸 안에는 이미 자문기관과 금융기관에서 나온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

“반갑습니다.”

바트가 차례대로 인사하던 손을 마지막으로 잡은 남자는 지분을 매각하기로 결심한 닌톤의 대표였다. 회사를 혈혈단신으로 대한민국의 핵심 기업으로 성장시킨 데다가 지분을 저와 아내, 그리고 지주사 하나로 분배해 지금까지 지켜냈다. 그 점을 바트는 높게 평가했다. 자문 기관에서 통역사를 준비해 회의를 진행했다.

증권가에선 소문이 떠돌았지만 아직 외부로는 기사 한 글자 나가지 않았다. 극비 사안이나 다름없어 공개 시기, 준비 기간, 그밖에 많은 사안들이 치밀하게 조율되었다. 모두가 신중한 가운데 돛단배처럼 공간을 유유히 떠도는 건 지한이었다.

자문 변호사가 힐끔 지한을 쳐다보았다. 소파에 앉은 이후부터 입 한 번 열지 않고 다리를 꼰 채 핸드폰만 두들기고 있었다. 지금 테이블에서 오가는 협상은 한 톨도 관심 없다는 듯이. 저와 그동안 메일을 주고받았던 남자와 동일 인물인지 괜한 호기심이 싹트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이 재미없어요?”

그때 지한이 입술을 움직여 물었다. 변호사는 움찔하며 습관처럼 웃었다.

“아닙니다. 소개를 받지 않아서 어떤 분인지 잠깐 보았습니다.”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지한이 말했다.

“마저 해요.”

신중한 눈빛이 지나가는 모바일 창에는 요리 학원이 주르륵 나열돼 있었다. TV 프로그램에 나온 요리 전문가와 무형 문화재에 등재된 한식 전문가가 운영하는 곳으로 후보가 좁혀졌다.

“…….”

지한은 두 후보를 두고 고민했다. 진작 열외가 된 그녀는 소현의 입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한평생 노인의 입맛을 관리한 사람이었다. 그녀를 옆에 두자니 사사건건 노인의 간섭이 들어올 건 안 봐도 뻔했다. 차후 대책으로 생각한 건 빠르게 능력을 습득할 수 있는 학원이었다.

다신 요리를 하지 말라고 했지만 소현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지한에게 꽤 큰 상처를 남겼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데 어제가 그랬다. 맛없는 음식을 억지로 먹어준 소현을 생각해서라도 포기가 안 되었다. 제 아래는 당연한 거고, 그 입에 좋은 것만 넣어주고 싶었다.

그때 액정 위로 발신자가 뜨며 벨이 크게 울려 퍼졌다. 집중하고 있던 사람들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지한은 태연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소파에서 일어난 지한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문을 나섰다.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더구나.」

대낮부터 기세 높은 노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지한은 적막이 느껴지는 복도를 둘러보며 말했다.

“무슨 소문.”

「네 아비가 국내 지분을 사들인다는 소리 말이다.」

어디서 얘기가 샜지. 지한은 문 안쪽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다가 색출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매각 소식은 소문으로나마 퍼지는 상태였고, 닌톤에서 반박 기사를 내지 않음으로써 기정사실이 되었을 거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아버지한테 전화해 봐.”

「내가 그놈이랑 통화를 할 일이 뭐가 있느냐?」

“그럼 나랑 왜 해. 그놈 자식인데.”

「너는, 내 손주가 아니냐! 어떻게 된 일인지 할애비한테만 말해. 정말 그 놈팡이가 한국까지 발을 들이는 게야?」

“할아버지 밥그릇 빼앗길 까봐?”

「내가 그런 걸 빼앗길 군번이냐. 그냥 꼴 보기 싫어서 그렇지.」

“그럼 눈을 감고 살아. 안 보면 되잖아.”

「역시, 들어오는 게 맞는가 보군.」

노인은 예상했다는 듯 묵직한 숨을 쉬었다.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올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시기가 들려온 소문으로 명확해진 것일 뿐. 지한은 이 앙숙 관계가 탐탁지 않았다. 꼭 샌드위치 사이에 낀 햄이 된 것만 같아서.

“할아버지.”

노인의 관심사를 돌릴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내가 한국에 좀 오래 머물게 됐어.”

그 말에 노인이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소현을 아직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박 비서를 빌려 쓴 일도 있고, 어제도 요리 명분으로 그녀를 또 데려갔으니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을 거다.

“밥이나 먹자. 오늘은 말고.”

그렇다면 제가 보는 앞에서 담판을 짓는 게 나았다.

「또 이렇게 꼬리를 빼긴. 언제인지 말해야 할애비가 스케줄을 조정하지.」

“내 스케줄이 먼저야. 연락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이 무정한 녀석이, 할애비한테……!」

“계속 한국에 있을 거라니까.”

지한은 노인을 능숙하게 다독였다. 안심할 만한 얘기를 꺼내 들자 노발대발하던 목소리도 잠잠해졌다.

「할애비 오래 기다리게 하면 못써.」

기다림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노인이 참아온 세월이 깊었다. 하지만 지한이 한국에 있겠다며 제 입으로 말한 이상 쓴물도 다시 삼키고 인내할 수 있었다.

통화를 끝낸 지한은 벽에 기대어 요리 학원을 신중하게 골랐다. 나온 김에 복도에서 결정짓고 등록까지 할 생각이었다.

[나 나갔다가 올게.]

그 위로 소현이 보낸 문자가 도착하기 전까진. 지한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아까 자고 있는 걸 확인하고 나왔는데, 언제 일어났는지 소현은 외출하겠다는 문자를 통보식으로 보냈다. 지한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새벽까지 진을 다 빼놔서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할 줄 알았건만, 소현의 목소리는 밝은 대낮과 어울리게 청명했다.

「여보세요.」

“어딜 나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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