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너는 어딜 나갔는데?」
지한은 닫힌 문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소개팅 시켜주고 있어.”
「네가 그런 것도 하니?」
“가끔은.”
인수 문제로 저들끼리 얘기하는 걸 소현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지한은 고민했다. 극비라지만 그걸 소현에게 숨겨야 할 이유를 떠올리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소현이 제 손으로 메일함을 열어보았던 것처럼 알고 싶단 의지만 보인다면 얼마든지 술술 불어줄 거였다. 하지만 소현은 그보다 바쁜 일이 있는지 제 얘길 했다.
「부동산에서 연락 왔어. 마침 좋은 집이 나왔다고 해서 지금 보러 나가려고.」
지한의 눈이 한순간에 번득였다.
“집?”
「응, 위치 들으니까 관심이 생겼어.」
“거기가 어디야.”
「……오려고?」
“가야지.”
하마터면 소현이 제 영역을 빠져나가는 걸 놓칠 뻔 했다. 지금은 배려로 포장해 붙잡아 놓았다지만 나갈 때만큼은 신사적으로 보내줄 순 없었다.
“어디야. 빨리 말해.”
낮은 목소리에 소현은 순순히 제가 탈출하려는 행선지를 알려주었다. 전화를 종료한 지한이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매서운 발길이 중대한 얘기가 오가는 내부를 가로질렀다. 준비해두었던 카드 키를 바트에게 건네었다.
“받아요. 묵을 숙소 키입니다.”
“알겠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이 자리보다 더 급한 일이라도 생긴 듯 지한은 초조한 빛을 얼굴 위로 드러냈다.
“끝나면 내게 연락해요.”
공간을 벗어난 지한의 다리가 복도를 거닐다가 뛰었다. 지하에 주차된 차까지 도달하는데 3분도 채 되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을 켜서 위치를 찍으니 도착 예정 시간이 15분이었다. 주말이라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을 걸 생각하니 절로 이가 갈렸다.
소현보다 일찍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차를 몰았다. 도착한 곳은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반듯한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소현이 말한 주소와 일치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주차를 마치고 로비까지 올라가는데 신원을 확인하는 까다로운 검문이 지한을 거슬리게 했다.
방문자라는 신분으로 로비에 도착한 지한은 소현과 만날 수 있었다. 최대한 표정을 풀며 다가가자 어떤 여자가 입을 벌렸다.
“어머, 아는 분이에요?”
소현의 옆에는 깐깐한 단발머리의 여자가 함께였다. 소현은 어색하게 웃더니 말했다.
“애인이에요.”
“나는 또 연예인인 줄 알았네. 너무 잘생기셨다.”
여자의 말에 지한은 눈썹을 들썩였다.
“능력도 좋아, 어떻게 이런 남자를 만났어요?”
아부를 낯 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잘하는 거로 보아 보통 상대가 아니었다.
“있어 봐요, 두 사람에게 딱 어울릴 만한 집이니까.”
“같이 사는 게 아니라 저 혼자 살 거예요.”
“그래요? 혼자면 충분히 넓게 쓸 수 있어요. 방 두 개에 화장실 하나. 큰 방엔 드레스 룸도 딸려 있고, 거실도 잘 빠졌으니 한 번 보세요.”
카멜레온처럼 그녀의 입은 자유자재로 색을 바꾸었다. 지한은 낮게 숨을 삼키며 소현을 내려다보았다.
“방 두 개는 너무 적지 않나.”
“혼자 사는데 뭐 어때. 하나는 서재, 하나는 침실로 쓰면 되지.”
“맞아요, 15층이에요. 경치도 꽤 좋아요.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도 있고 지하철도 걸어서 3분 거리에 있고요.”
소현에게 경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회사까지 차로 20분. 주변에 헬스장과 편의 시설, 걸어서 10분 거리에 대형 마트. 지리적인 위치는 일단 합격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소현은 그녀를 따라 1507호 앞에 섰다.
“지금 사시는 분이 여자분이신데 잠깐 어딜 나가서요. 기다려보세요…….”
그녀가 핸드폰을 뒤적이며 도어록 비밀번호를 차례대로 눌렀다. 그러는 사이 소현은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보고 나서 뭐 먹으러 가자. 괜찮지?”
“봐서.”
왜 저렇게 저기압이지? 소현은 열린 문을 보기 위해 눈꺼풀을 사뿐하게 내렸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내부는 기대 이상이었다. 현관이 비좁을 거란 예상과 달리 신발장은 큼지막하게 컸고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넉넉히 수납을 할 수 있는 선반을 보여주며 그녀가 웃었다.
“이거 봐요, 워낙 곳곳에 이런 공간도 많은 데다가 아까도 말했지만, 안방에서 욕실로 가는 길목에 작게나마 드레스 룸까지 있어요.”
소현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드레스 룸을 살폈다. 옷을 다 넣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화장대가 있어 외출 준비할 때 동선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진짜 좁네.”
그 말에 싱글벙글 웃던 중개인의 표정이 굳었다. 지한은 욕실을 둘러보더니 소현에게 말했다.
“공간이 욕조만 하잖아.”
“그 집이 워낙 넓으니까 비교하자면 그렇겠지.”
대수롭지 않게 답한 소현의 옆으로 바짝 붙은 중개인은 호호거리며 지한을 주시했다.
“아유, 여자 혼자 살기엔 이 정도 사이즈면 충분하죠.”
연인끼리 방을 보러 왔으니 호의적일 거라고 생각했건만. 어떤 의견을 내든 제가 다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중개인이 소현의 옆을 집중 마크했다.
“남향인 데다가 창문이 시원하게 나와서 햇볕도 잘 들고요.”
“밤엔 춥겠는데.”
“난방을, 하면 되지요. 커튼을 달아도 되고요.”
“그럼 큰 게 흠이지.”
“흠이라뇨, 창이 커서 환기도 얼마나 잘 되는데요.”
중개인이 악센트로 강조하며 지한을 째려보았다. 지한은 그를 보며 무심하게 답했다.
“그거 말고는 없습니까?”
자극받은 사람처럼 중개인이 답했다.
“그것뿐이겠어요, 풀 옵션에 방범 시스템도 잘 되어 있고요. 무인 택배 시스템에 엘리베이터에 카드 키가 없으면 외부인은 이용할 수 없어요. 주차장도 지하 4층까지 있어서 자리 걱정할 필요도 없고요.”
소현은 창문을 열어보았다. 중개인의 말대로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왔다. 지한이 미간을 좁히며 문을 닫았다.
“경치가 별로야.”
“어차피 해 뜨기 전에 나가고 밤늦게 들어와서 창문 볼 일도 없어.”
“없어서 안 보는 거겠지. 볼 게 없으니까.”
“그것도 그렇긴 하지…….”
소현이 말끝을 늘이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한은 의도적으로 소현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옷도 많으면서 어떻게 다 넣으려고.”
“저기 옷장 있잖아. 넣으면 다 들어가게 생겼는데?”
“그럼요, 여기 봐요. 사계절 옷 다 넣고도 남을 정도로 배열이 잘 짜여 있어요. 붙박이라 눈에 거슬리지도 않고요.”
지한은 곁눈질로 중개인이 자랑스럽게 연 옷장을 보았다.
“너무 작아.”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지한을 중개인이 방해물처럼 쳐다보며 물었다.
“아까부터 작다, 작다 하시는데 사시는 곳이 어디시기에 그러는지……?”
“한남동 힐스 타워예요.”
소현의 말에 중개인이 기함했다. 한강 전망이 바로 보이는 곳이었다. 대한민국 안에서 비싸기로 손에 꼽는 곳에 거주하니 이 공간이 눈에 찰 리가 없는 거다. 지한은 마음에 드는 구석은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을 훑으며 말했다.
“여긴 안 돼.”
“내가 살 집이야. 언제까지 거기 있을 수는 없잖아.”
“어, 어머……같이 살고 있어요?”
주방으로 간 소현은 싱크대 상태를 점검했다. 수압도 괜찮고 배수구 상태도 흡족했다. 중개인은 어색하게 웃음을 띠며 물었다.
“아니, 아가씬 그 좋은 집을 두고 왜……나 같으면 눌러살겠네.”
“제집이 아니라서요.”
“그 집 너 줄게.”
그 말에 중개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소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지한을 보았다.
“주면 되잖아.”
농담이 한 톨도 들어가지 않은 어조였다. 소현을 대신해 중개인이 얼른 말했다.
“아, 아가씨. 준대요.”
기가 찬 것처럼 소현이 웃음을 흘렸다. 지한을 무시하며 천장을 열어본 소현이 마지막으로 거실을 둘러보고선 중개인에게 물었다.
“빨리 계약 안 하면 빠져나가겠죠?”
“그렇죠. 오늘 막 나온 거라서……집 주인도 급히 처리하고 싶어 해서요.”
“연락드릴게요.”
소현은 현관을 나섰다. 뒤따라 나온 지한이 긴 복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현관문을 주시하며 낮게 숨을 흘렸다.
“이 집은 안 돼.”
“…….”
“애인이니까 이 정도 참견은 해도 되잖아.”
소현은 지한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내가 나가 사는 게 그렇게 싫어?”
지한은 제 마음을 들켰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소현이 잡은 손으로 온 신경이 몰두 됐다.
“알면 계약하지 마.”
손가락을 벌려 사이사이 엮으며 말했다. 그 압박감이 싫지 않은 듯 소현은 가볍게 허공으로 흔들었다. 지한은 당연하게 소현의 움직임에 휘둘려주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소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지한의 집에는 잠깐 신세 질 생각으로 들어갔던 거였고 제아무리 연인 사이라도 공간이 명확하게 분리되는 편이 좋았다.
동거라, 소현의 머릿속에서 한 번도 성립돼본 적 없는 일이다. 지금껏 그런 생각조차 들게 하는 남자도 없었고.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지한의 집은 넓어서 좋기보단 지한이 있어서 좋았다. 한 침대에 잠드는 것이 당연하게 이뤄졌고 소현이 노트북으로 업무를 볼 때 지한이 소파에 누워 있는 것도 어느샌가 당연해졌다.
그건 귀찮기보단 소현의 안에서 안정된 형태를 구축했다. 지한이 기다리는 집에 가는 것이 즐거웠고,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전화로 얘기하는 것이 일상처럼 자연스러웠다.
“내가 뭐 해 주면 계속 있을래.”
언제 제 안에 들어와 자리를 만든 건지 소현은 알 수가 없었다. 차에 오른 지한은 핸들을 움켜쥐며 이곳을 얼른 벗어나야 하는 사람처럼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굴지 않아도 소현은 한 마디면 되었다.
“나랑 같이 있다고 싶다고 말해봐.”
“같이 있고 싶어.”
곧바로 답이 흘러나왔다. 운전석으로 몸을 돌린 소현의 눈 밑이 올라섰다.
“떨어지기 싫다고 해봐.”
“떨어지기 싫어.”
“내가 좋다고 해.”
순식간에 브레이크를 잡은 지한이 몸을 기울였다. 소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가 혀로 훑어주며 지한이 속삭였다.
“좋아.”
나직한 목소리가 축축이 젖은 입술에 눌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