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58)화 (58/86)

58.

소현은 숨을 달싹거리며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 음이 이어지는 동안 지한에게 부드럽게 입술을 비볐다. 지한은 누구에게 전화를 거는지조차 모른 채 소현의 입술만 내려 보고 있었다.

“여보세요. 죄송한데 저 그 집 계약 안 할게요.”

지한의 시선이 빠르게 올라왔다. 핸드폰을 내린 소현이 웃었다.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나가.”

바라보는 눈동자가 진해졌다. 목울대를 울린 지한의 상체가 견딜 수 없다는 듯 앞으로 기울었다. 더 깊게 파고들려는 움직임을 감지하고선 소현이 몸을 뒤로 뺐다.

“이제 얼른 가. 문 열렸다.”

차량 인식을 끝낸 기계가 바리케이드를 활짝 연 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한은 분부대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맑은 구름처럼 지한의 기분도 쾌적했다. 제가 보는 앞에서 소현이 중개인에게 전화까지 한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로써 행복은 유지되었다.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않아 무작정 도로 위를 배회했다. 토요일은 어딜 가도 사람들로 인해 혼잡했다. 창문 밖을 가만히 지켜보던 소현이 물었다.

“밥 먹을래?”

“어디로 갈까.”

지한은 어디든 갈 수 있는 기분이었다.

“음……글쎄. 오늘은 어딜 가도 사람이 많아서 고민이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라 브레이크 타임이 없는 곳으로 목적지를 정해야만 했다. 그때 커다란 벨 소리가 소현의 귀를 강타했다. 보지 않아도 출처를 알아챈 소현이 말했다.

“나랑 있을 땐 진동으로 바꿔놔. 매번 시끄러워서 놀라잖아.”

“…….”

지한은 한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보더니 그대로 통화를 거절로 넘겨 버렸다. 의아함에 소현이 물었다.

“누군데?”

“있어.”

“나한테 말 못 해줄 사람인가 봐.”

그런 사람은 없었다. 지한은 숨길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친구.”

소현이 놀라 되물었다.

“네가 친구도 있어?”

“…….”

지한의 눈썹이 살짝 구겨지는 걸 본 소현이 픽 하고 웃었다. 장난인데 예민하게 반응하니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그나저나 지한의 친구라니, 지한은 어떤 성향의 사람들과 어울릴지 궁금해진다.

“전화해 봐.”

“왜?”

지한이 사납게 말했다. 꼭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처럼 이빨을 세우기에 소현이 다독이며 말했다.

“친구라면서 그런 식으로 전화 피하는 게 어디 있어.”

“난 그래도 돼.”

“다시 전화해보라니까.”

치근거리자 지한이 못 이기겠다는 듯이 전화를 걸었다. 소현은 청각을 곤두세웠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다행히도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었다.

“왜. 못 가. 어.”

단발적인 말이 통화의 전부였다. 30초도 채 되지 않아 끊어진 전화에 소현은 혀를 찼다.

“무슨 전화를 그렇게 해, 나랑 통화하는 거랑 딴판이네.”

“너와 비교하지 마.”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구긴 지한이 핸드폰을 대충 처박았다. 소현은 입맛을 다시며 눈동자를 굴렸다.

“왜 전화한 건데?”

“생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소현의 표정은 정반대로 변했다.

“생일인데, 왜 이러고 있어?”

“그럼 뭘 어떻게 있어야 하는데.”

진지한 물음에 소현은 기가 찼다. 대충 통화한 내용을 추론하자면 파티 비슷한 게 있는 모양인데 고민할 것도 없이 지한이 거절한 게 틀림없다. 소현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3시 40분.

“오늘 저녁에 보자는 거야?”

“어.”

“선물은 샀고?”

지한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뭘 사?”

“생일이라며. 네 생각 해서 전화한 건데 가서 선물은 줘야지.”

어이없다는 듯 지한이 조소를 흘렸다.

“널 두고 어딜 가.”

“나도 갈게.”

“…….”

지한의 얼굴이 교묘하게 변했다. 무관심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지한이 처박은 핸드폰을 찾아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디라고?”

*

제가 가겠다고 말했지만 긴장을 안 할 순 없었다. 처음으로 지한의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이기에 각별하게 신경 쓴 모습을 소현은 몇 번이고 다시 점검했다. 말끔하게 하나로 올린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이 귀밑으로 흘러내렸다.

“너무 힘을 줬나.”

과할 정도로 반짝이는 귀걸이와 목걸이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재력을 자랑하는 여자도 아니고, 목덜미를 만지던 소현은 뒤로 다가온 지한을 거울을 통해 보며 물었다.

“나 귀걸이 너무 큰…….”

순간 목뒤로 닿는 뭉근한 감촉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입술의 감촉이 살결을 더듬는 것처럼 움직였다.

“머리카락 내려.”

소현은 살짝 경직된 손가락을 움직여 공들여 만진 머리카락을 풀었다. 그제야 지한이 몸을 뒤로 빼며 소현을 보았다. 머리부터 천천히 검사하듯 내려가던 시선이 허벅지에서 노는 원피스 길이에서 멈추었다.

“바지 입어.”

고개를 돌린 소현이 완강하게 말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내가 이런 걸 입겠어?”

회사 이미지를 생각해 매번 쇼핑에서 사는 거라고는 정장뿐이었다. 진부함에 한 번씩 화려한 원피스나 과감한 의상을 구매해둔 것이 옷장으로 차곡차곡 쌓인 채 빛을 보지 못 했다. 파티나 친구들과 연말을 기념할 때 빼고는 입을 수 없는 불쌍한 옷들이다.

“너랑 가는데 이 정도는 입어줘야지.”

거기다 지한의 옆이라면 이런 식으로나마 힘을 줘야만 했다. 밋밋한 하얀색 셔츠에 평범한 바지 하나 걸쳤을 뿐인데 지한은 한껏 치장한 수컷처럼 화려함을 발산하고 있었다. 저 외형에 파묻히는 불상사는 피해야만 했다.

지한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내렸다. 몸의 굴곡이 전부 보일 만큼 타이트한 화이트 원피스는 짧은 데다가 파인 곳도 많았다. 한껏 모아진 가슴 굴곡을 본 지한은 사납게 시선을 들었다.

“벗기기 전에 네가 벗어.”

“더 파인 거 입기 전에 네가 포기해.”

“계절에 맞게 입어.”

“실내에 들어가면 더워. 그리고 어차피 가서 술 마실 거잖아.”

이대로는 데리고 나갈 생각이 없는 지한인데, 소현은 이미 가서 술까지 마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준비해두었던 코트를 꺼내 위로 입은 소현은 긴 머리카락을 만졌다.

“네가 말한 대로 머리는 내렸잖아. 의견 반영해줬으니 너도 내 의견 받아 줘야지.”

새하얀 목덜미는 절대 용납할 수 없던 지한이 차 키를 움켜쥐었다. 소현은 웃으며 지한의 팔에 손가락을 감았다. 가슴을 밀착하자 지한의 시선이 굳었다.

“이렇게 가리면 되는데 괜찮지?”

지한은 서늘하게 속삭였다.

“가서도 이렇게만 해.”

파티가 이뤄지는 장소는 강남 스퀘어 타워에 있는 와인 바였다. SNS에서도 분위기 좋기로 유명한 곳이라 소현도 익히 아는 곳이었다. 주말에 저녁 8시라는 황금 같은 시간대를 빌릴 정도면 파티의 주인공이 보통은 아닐 거라 예상했다.

역시나 입구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검문이 시작되었다. 세 명의 남자는 소현과 지한의 앞을 가로막고 정해진 절차대로 말했다.

“명단 확인하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지한은 성가시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소현이 대신해 말했다.

“정지한이요.”

“……아, 죄송합니다. 들어가시죠.”

명단 속 가장 윗부분을 훑은 가드가 길을 터 주었다. 내부는 시끄러운 음악으로 파티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DJ가 믹싱한 음악이 소현의 가슴으로 파동을 일으켰다.

“외투 주시겠습니까?”

“네.”

소현이 코트를 벗자 매서운 시선이 내려왔다.

“선물은 이쪽으로 주시겠어요?”

소현은 신경 쓰지 않고 답답한 옷을 건네주고 지한의 손을 쳐다보았다.

“뭐 해? 얼른 줘.”

이런 일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지한은 부자연스러웠다. 선물도 필요 없다는 걸 간신히 백화점에 데려가 하나 들려준 건 소현이었다. 친구라면서 취향도 모르는 지한 때문에 안목이 빛을 발휘했다. 20대 후반의 남자에겐 시계가 제격이었고 지한이 결제할 거라 가격 상관없이 골랐다. 고가의 선물을 마다할 사람은 소현이 알기로는 없었다.

“아까처럼 바짝 붙어.”

지한은 선물을 받을 친구의 반응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듯 소현에게 촉각을 세웠다.

“알았어, 친구는 어디 있어?”

소현은 흰 살결을 지한의 팔로 감으며 걸었다. 와인이 진열된 유리 벽을 지나자 안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은은한 주황색 불빛이 실루엣을 만들어내며 조화를 이루었다. 제 의상은 눈에 튀지도 않을 만큼 화려하고 노골적인 의상들이 대다수였다. 소현은 공간 한가운데 탑으로 쌓인 샴페인 잔을 보다가 흠칫했다.

지금 지나간 여자 배우 유연정 아닌가. 제아무리 어두워도 연예계와 친할 수밖에 없는 소현의 눈은 정확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모델에, 가수. 영화배우까지 자세히 보니 소현이 전부 아는 얼굴들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쯤 되니 소현은 오늘의 주인공이 누군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지한아.”

그게 배우 김민준일 줄은 몰랐지만. 소현은 흠칫하며 지한의 팔에 감긴 손가락을 오므렸다. 지한은 그걸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그래. 추워?”

“아니…….”

일전에 라운지 바에서 잠깐 마주쳤었는데, 그때도 지한 때문에 거기 있었던 걸까.

“어, 누구와 같이 왔나본…….”

민준이 소현을 보더니 말을 멈추었다. 지한을 잡고 있는 팔이 매치가 되지 않아서였다. 제가 알기론 저렇게 지한의 팔을 잡을 수 있는 여자는 없었다.

탐색하듯 민준의 시선이 얼굴로 올라갔다.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옆에 점이 외설적인 느낌을 풍겼다. 오뚝하게 솟은 콧대와 커다란 눈은 입술과 달리 맑게 흔들리고 있었다. 꽤나 반반하게 생긴, 아니 예쁘다고 말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지한은 낮게 경고하듯 말했다.

“내 애인.”

“애인?”

민준은 저도 모르게 그녀와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떴다. 애인이라고? 그렇다면 이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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