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안녕하세요, 현진 기획 강……아니. 강소현이에요.”
버릇처럼 업무에서나 사용하는 말을 했다. 소현은 애써 미소지으며 말했다.
“김민준 씨죠?”
“네……아, 애인. 애인이시라고요. 강소현 씨.”
민준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어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지한이 공들이던, 말로만 듣던 그 여자를 실제로 보니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걸 모르는 소현은 유려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려 말했다.
“오늘 생일이신 거 축하드려요. 저는 빈손으로 왔지만 대신해 지한이가 선물 사는 걸 도와줬어요. 제 성의도 담긴 거니까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지한이가, 선물…….”
민준은 또다시 말문을 잇지 못 했다. 그 반응이 의아해 소현은 눈을 깜빡이며 지한을 쳐다보았다.
“너는 할 말 없어?”
“무슨 말?”
“우리가 여기 왜 왔을까.”
놀러 온 줄 아느냐며 소현이 눈치를 줬다. 지한은 쥐어짜듯 입을 벌렸다.
“축하해.”
“어? 어……그래. 고마워.”
친구라고 하더니 이상하다. 생일 파티로 초대받았으면 응당 축하 인사와 대화는 기본이었다. 그런데 정작 민준은 지한이 건넨 말과 선물을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스러워했다. 그중에서 가장 예상하지 못한 건 소현의 등장인 것만 같았다. 저를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빤히 보는 눈빛이 호의적이지 않다고 해석한 소현이 웃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 봐요.”
민준은 서둘러 입가에서 손을 떼어 내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한이 애인을 처음 봐서요.”
“아……그래요?”
“네. 사실 여기 올 줄도 몰랐어요. 지한이가 사람 많은 곳을 안 좋아하거든요.”
순식간에 날이 선 눈빛이 민준에게 꽂혔다.
“알면서 왜 전화를 해.”
지한이 낮은 어조로 물었다. 오늘 이곳의 주인공은 여유가 아닌 실수를 감추기 위한 미소를 내비쳤다. 소현은 눈가를 찌푸리며 이 심상치 않은 기류에 합류하려고 했다.
“제가 와서 방해가 된 건 아닌가 싶어요.”
“방해라니요, 전혀…….”
“지한이 형.”
다른 무리와 함께 있던 남자가 냄새라도 맡은 것처럼 다가왔다. 모델 이장우였다. 단번에 스캔을 마친 소현과 달리 눈이 마주친 장우의 반응은 민준과 찍어낸 듯 똑같았다.
“이분이…….”
“그래. 그분이래. 강소현 씨.”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들은 저들만이 아는 언어를 주고받았다. 소현은 문득 지한의 팔에 감긴 제 손가락이 흉기라도 된 것인 양 느껴졌다. 그럴수록 손에 힘을 주며 부드러운 웃음을 잃지 않으려 했다.
“지한이가 제 얘길 했었나 봐요?”
“그게……만난다는 얘기만 언뜻 들었습니다. 자세히는 아니고요.”
“모르시겠지만 꽤 유명하세요.”
장우가 소현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그래도 조막만 한 얼굴인데 눈을 크게 뜨니 놀라움의 정도가 표정에서 읽혔다.
“성우 형도 오라고 할까?”
장우는 이 사실을 널리 전파하고 싶은 사람처럼 굴었다. 지한은 관심을 잘라내는 것처럼 먼저 몸을 틀었다.
“자리 줘.”
“아, 그래. 이쪽으로 오세요.”
“네. 고마워요.”
소현은 저를 향해 깍듯하게 대하는 민준의 친절을 미소로 받아주었다.
북적이는 인파들에 비해 자리는 몇 개 없었다. 초대된 인원을 최대한 많이 수용하기 위함이었고 대부분이 서서 저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현은 여러 명이 한데 모여 앉은 다른 테이블에 비해 넓고 쾌적한 소파에 착석했다. 몇 안 되는 귀한 테이블 중의 하나가 오롯이 지한의 차지였다. 민준의 배려가 느껴지는 상황인데 정작 지한은 이 모든 게 당연하다는 듯 혜택을 누렸다.
“술 뭐 마실래? 샴페인?”
민준의 물음에 지한은 말없이 소현을 보았다. 소현은 민준에게 말했다.
“샴페인이면 충분해요.”
“와인 마셔도 돼요. 여기서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직원에게 말해서 드세요.”
소현은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제가 고르면 가격이 꽤 나가는데요.”
“지한이가 데려온 손님인데 그 정도는 제가 감수해야죠.”
“내가 마시는 거 네가 계산할래?”
곁눈질하며 묻자 지한이 팔을 뻗어 소현의 어깨를 감쌌다.
“직원 불러와.”
“어, 그래. 잠시만.”
민준은 파티 주인공이라 정신이 없을 텐데도 수고스러운 일을 도맡아 했다. 직원이 도착하자 지한이 말했다.
“메뉴판 가져와요.”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직원은 금세 메뉴판을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두었다. 종류별로 나눠진 것을 보아하니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듯했다. 소현이 손대지 않고 중얼거렸다.
“네가 사는 거면 마시고.”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감싼 어깨가 한쪽으로 쏠리는 건 순간이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피해 귓가로 입술이 바짝 붙어왔다.
“마셔. 뭐가 먹고 싶은데.”
귓바퀴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지한의 숨결이 소현을 간지럽혔다. 소현은 고개를 틀어 입술로 지한의 얼굴을 더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은 아무래도 샴페인이 어울릴 거 같은데, 아르망디 마셔도 돼?”
지한이 비스듬히 소현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소현이 허락을 구했다. 남이 주는 건 싫어하는 까다로운 입맛인 양 속삭인다. 마치 제 손길이 묻어야 입에 대는 것처럼. 지한의 입가에 웃음이 끈적하게 스쳤다.
“그걸로 적셔 줄까?”
소현의 속눈썹이 어렴풋이 흔들렸다. 그냥 해본 소리인 줄 알았는데 지한은 바에 있는 아르망디를 전부 주문했다. 민준이 파티를 위해 준비한 것과는 별개로 벌어진 일이었다. 다 마시지 못할 무자비한 양을 보며 소현이 물었다.
“나 이거 마시고 죽으라고?”
“뿌리고 놀던가.”
순간 예전 룸 안에서 지한이 몸에 술을 부은 것이 떠올라 소현은 입안이 얼얼한 기분이었다. 그때도 느꼈지만 지금 다시 한번 지한의 과한 소비력을 경험했다. 집이고 차고 무작정 준다고 하기에 의심했건만 이로써 그 말도 전부 사실이나 다름없는 거로 판명 났다.
“나는 한 병이면 충분해. 대신해 나머진 오늘 주인공한테 선물로 줘도 되지?”
“너 좋을 대로 해.”
“들었죠? 민준 씨 이거 친구분들하고 나눠 마셔요. 한 병은 제가 계산할게요. 빈손으로 온 게 신경 쓰이네요.”
소현은 기쁜 날인 만큼 주인공인 민준에게 선물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한 민준이 뒤돌아서며 장우에게 속삭였다.
“저 여자 보통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장난 아니네.”
“형, 지한이 형 눈 안 떼는 거 봤어요?”
지한의 눈에는 이 여자가 내 여자란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민준은 소현의 어깨를 휘감고 있는 지한을 믿기 어렵다는 듯 쳐다보았다.
“웃는 것도 처음 봤어.”
저 번듯한 외형에 속아 넘어간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현은 그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그동안 목격한 바로 매달리는 건 지한 쪽이었다. 어떤 여자이기에 지한의 애를 태울까 싶었는데 오늘 비로소 그 답을 찾았다.
“장우 씨. 여기 앉아서 얘기나 해요.”
그녀는 지한을 두고서도 다른 곳에 두루 신경 썼다. 거기다 친화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장우는 그녀의 입담에 혼이 쏙 나갈 것만 같았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대화를 이끌어 내는 솜씨가 탁월했다.
“그거 J 브랜드에서 나온 셔츠 맞죠? 장우 씨가 입으니까 홍보 효과 제대로네. 단번에 알아챘어요.”
“아, 누나 눈썰미 되게 좋으시네요. 단추 자세히 안 보면 모르는데.”
소현이 샴페인 잔에서 입술을 떼어 냈다.
“누나요?”
장우가 얼른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편하게 얘기하다 보니까…….”
무례했나 싶어 장우가 난색을 표하자 소현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먼저 장우 씨라고 했잖아요? 누나라고 해주면 나야 고맙지. 장우라고 불러도 되지?”
“네. 그럼요. 말 편하게 하세요.”
“너도 말 놔. 이정도 얘기 했으면 격식 차리지 않을 때도 됐잖아.”
“그럴까?”
장우는 금세 소현에게 말을 낮추었다. 특유의 친화력이 소현과 꽤 잘 맞았다. 그때 소현의 어깨에 걸린 긴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뭐라는 거야.”
지한은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강소현 씨라고 불러.”
“아……네, 형. 그럴게요. 죄송합니다.”
눈빛에 쪼그라드는 생명처럼 장우는 발랄했던 모습을 감추었다. 소현은 지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한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에서 따라온 파티였다. 주변 인물들과 친해지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눈썹을 구긴 채 샴페인을 마시는 지한의 옆모습으로 주홍색 빛이 얼룩졌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소현의 고막을 어지럽혔다. 질척한 시선이 달려든다. 소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계속 사람들이 지한을 힐끔거리며 저들끼리 얘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은 흡사 우월한 존재감을 인지하는 과정 같았다. 정작 지한은 특유의 분위기로 그 시선들을 덮어버리고 신경 쓰지 않았다. 별들의 세계 안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자신감이었다.
빤히 바라보자 지한이 샴페인 잔을 소현의 뺨에 비스듬히 기울였다.
“지금이라도 나갈까.”
입술이 닿았던 표면이 소현에게 키스하는 것만 같았다. 소현은 달아오른 뺨을 감추듯이 웃었다.
“한 시간은 앉아 있는 게 예의야.”
“예의 차리지 마. 네가 예의 없을 때가 가장 흥분되니까.”
잔이 기울어지며 투명한 액체가 벌어진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소현은 그 위로 제 잔을 경쾌하게 부딪치며 샴페인을 비웠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뒤늦게 자리에 합석한 민준은 소현과 지한에게 오늘 와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또 했다. 소현은 웃으며 술을 마시려는 민준을 만류했다.
“오늘이 생일이라 많이 마실 텐데, 여기선 마시지 마요.”
“누……아니, 강소현 씨. 걱정하지 마세요. 민준이 형 술 좋아서 마시는 거예요.”
“주당이라는 소리를 듣긴 했어요.”
일 생각은 안 하고 싶은데 배우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에 있으니 의지와 상관없이 소현의 레이더가 발동했다.
“근데 어쩜 피부가 그렇게 좋아요?”
안 그래도 요즘 남자 화장품 광고에 대해 기획안을 작성하고 있는데, 민준을 보는 순간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현이 가까이 보려 얼굴을 들이대자 지한의 손이 어깨에서 내려와 허리에 감겼다. 느리게 선을 문지르는 손길이 경고하는 것처럼 영역 표시를 해댔다.
“배우라면 피부 관리는 뭐……기본이죠.”
그걸 본 민준이 옆으로 떨어지며 말했다. 소현은 겸손하기까지 하다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번에 E사 제품을 기획하고 있거든요. 남자 화장품인데 민준 씨라면 잘 어울릴 거 같아서요.”
“아, 그런 거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호의적인 반응이라 다행이에요.”
“광고 싫어할 배우 있나요. 지한이한테 말만 하세요. 그때 유란이도…….”
민준의 입술이 잠시 멈칫했다. 둘의 관계를 보건대 뭔가 말하면 안 될 얘기를 제가 꺼내 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