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유란과 일도 정리했고, 후련해진 머릿속으로 신나는 음악 소리가 가볍게 드나들었다. 소현은 제 몫으로 놓인 샴페인을 지한과 함께 나눠 마셨다.
즐거운 분위기와 음악 소리에 긴장감 따윈 날아간 지 오래였다. 클라이언트와 함께 있을 땐 술을 마셔도 취할 수 없던 소현이었다. 알코올로 풀어진 분위기는 오히려 경계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책임질 상황도 아니었고 누가 볼 걱정도 없었다. 거기다 취해도 저를 챙겨 줄 지한까지 옆에 있었다.
편한 마음으로 술을 마신 소현은 두 병의 샴페인을 비웠을 때쯤 노곤하게 눈이 풀려 있었다. 지한의 어깨에 기대어 긴 잔을 홀짝이던 소현이 불현듯 웃음을 터트렸다.
“지한아.”
“왜.”
넓은 어깨 위로 턱을 올려놓은 소현이 숨을 내쉬었다.
“어떡해. 나 지금 기분 너무 좋아…….”
뜨거운 속삭임이 지한의 목덜미를 뒤덮었다. 지한은 제게 달라붙는 소현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뭘 했는데 좋아.”
“너랑 같이 이러고 있잖아.”
의외인 듯 눈썹이 들썩였다. 게슴츠레한 소현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야릇한 빛을 냈다. 지한의 손이 잘록하게 들어간 곡선을 미끈하게 훑으며 내려갔다.
“만지지 마. 아…….”
터지듯 비음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거센 음악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숨결과 움찔거린 몸으로 지한에게 전달되었다. 취했나. 소현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계속 헤실헤실 웃는가 하면 보는 눈들도 있는데 두 팔로 지한의 목을 끌어안더니 귓가로 바짝 붙었다.
“우리 술 더 마시자, 응?”
“…….”
언뜻 스친 촉촉한 점막에 소현을 감싼 손으로 힘이 들어갔다. 음악 소리에 몸과 정신을 내던진 사람처럼 소현의 눈동자가 하늘하늘 일렁였다. 지한의 목에 엉킨 두 팔도 나른하게 풀려 있다. 지한은 소현을 제 몸에 딱 붙인 뒤 샴페인을 단숨에 비웠다. 잔을 내려 두고선 소현의 뺨으로 가까이 입술을 붙였다.
“집에 가자.”
“아, 싫어……더 마실래. 한 병 더 줘. 으응?”
칭얼거리는 음성은 또 처음이었다. 똑부러지던 소현이 보채는 건 보기 어려운 광경이라 지한은 말을 잃었다. 은폐된 공간이 아님에도 소현은 단둘이 있을 때보다 더한 애정을 과시했다. 지한의 뺨에 입술을 꾹 찍더니 새겨진 자국이 재미있다는 듯 픽픽 웃었다.
“내 립스틱 자국……내 거.”
손으로 지한의 뺨을 쓰다듬었다가 또 꾹꾹 찔렀다.
“지한아, 여기 내 거 있다니까?”
그 손길에 립스틱이 지한의 얼굴에 물감처럼 번졌다. 지한이 소현을 보던 시선을 들자 때마침 입을 벌리고 앉아 있는 장우와 눈이 마주쳤다. 장우는 얼른 턱을 닫더니 어색하게 물었다.
“형, 소현이 누……아니, 강소현 씨 꽤 취한 거 같은데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가 가야지.”
“네?”
이런 소현의 모습을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자리를 옮길 순 없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장우는 굳은 얼굴로 웃었다.
“아……네, 저도 인사하러 가 봐야 하는데. 다른 애들 못 오게 할게요. 걱정 마세요.”
“걱정은 네가 해야지.”
빨리 안 가면 가만두지 않을 눈빛이었다. 장우가 얼른 엉덩이를 떼어내며 사라졌다.
지한은 본격적으로 소현을 제게 더 붙였다. 소현은 눈을 감은 채 지한의 얼굴에 제 흔적을 남기기 바빴다. 관자놀이와 이마를 스친 입술이 샴페인처럼 간지러운 숨결을 쏟아 낸다. 진동을 느끼던 지한은 눈동자를 움직여 소현을 보았다.
“입술에다가는 왜 안 해.”
소현이 입술로 다가가려고 했다. 벌어진 허벅지로 소현의 무릎이 닿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소현이 엉덩이를 들썩대며 허벅지 위로 양 다리를 올려 두었다. 누구 다리 사이로 들어온 지도 모른 채 소현이 지한의 뺨에 묻은 자국을 손으로 찔러 댔다.
“뭐 묻었어, 여기. 닦아야겠다.”
“네가 혀로 해줘.”
그러자 소현의 풀린 눈이 휘어졌다.
“술 주면 해줄게.”
지한은 긴 팔을 뻗어 오픈된 술을 잔에 따랐다. 그러는 사이에도 소현은 지한의 목덜미에 이마를 댄 채 쓰다듬기 바빴다. 대형견을 만지는 것처럼 턱을 문지르고 가슴을 더듬었다. 지한이 잔을 내밀자 소현이 입술을 살짝 벌렸다.
“아.”
먹여 달라는 듯 입술을 벌리고 지한을 올려다본다. 지한은 언뜻 모습을 드러낸 혀를 보며 그 안으로 잔이 아닌 다른 것을 집어넣고 싶었다.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걸 소현이 느꼈는지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뭐야?”
“뭔지 만져 봐.”
“음..”
소현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감각으로만 알아맞히려는 듯 맞닿은 허벅지를 문질러 대자 지한의 눈썹이 고요히 내려갔다. 소현이 지한을 빤히 보며 풀어진 입술로 웃었다.
“자꾸 찔러 대.”
“안 만져 줘서 그래.”
“너 선 거 같은데?”
“같은 게 아니라 섰어.”
“진짜?”
소현은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놀란 토끼처럼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을 지한은 잠자코 감상했다. 이런 모습을 볼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그때 소현이 허벅지에 놓인 다리를 움직이더니 지한을 마주보며 앉았다.
“있어 봐. 내가 가려 줄게.”
풀어진 허벅지가 엉덩이에 눌리자 지한의 눈동자가 경직됐다. 지한의 얼굴로 커튼처럼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반쯤 벌어진 붉은 입술을 본 지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더 넣고 싶어지는데.”
“여기서? 안 돼.”
소현은 달아오른 숨결을 토해 내며 허리를 세웠다. 지한의 손에 들린 잔을 빼앗아 마시는 걸 지켜보는 지한의 눈으로 열기가 몰렸다. 탄실한 엉덩이를 맛본 아래 사정은 더 심각해졌다. 개운하게 숨을 터트린 소현이 지한의 입술로 잔을 가져다 대었다.
“자, 너도 아.”
소현을 주시하며 지한이 턱을 벌렸다. 그 안으로 액체를 넘겨주는 소현은 신중하다 못해 진지했다. 조금씩 넘겨주던 잔을 비스듬히 세운 소현이 눈웃음을 지었다.
“어때, 맛있지?”
“그러네.”
감질 맛이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소현의 엉덩이가 들썩거릴 때마다 지한은 욕구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이토록 경계 없이 풀어진 소현은 색다른 유흥이자 강렬한 자극이었다.
제게 달라붙어 칭얼거리는 강소현이라니. 돈 주고도 못 볼 진귀한 광경이다. 그 모습을 눈에 새기듯이 바라보자 잔을 비운 소현이 다리를 내리려 했다. 지한의 손이 저지하자 소현의 입술이 매서워졌다.
“놔, 나 화장실 갈 거야.”
“나도 가.”
“여자 화장실에 넌 못 들어오거든.”
정작 소현은 제가 취한 걸 모르는 듯 했다. 바닥으로 내려온 구두가 잠시 휘청였지만 유연하게 자세를 바로 잡는다. 소현의 허리에 감긴 손을 풀지 않자 늘어진 눈꺼풀이 뾰족해졌다.
“따라 오지 마.”
앉아, 기다려. 명령하는 것처럼 소현이 냉철하게 얘기했다. 그리고 멀쩡한 걸음으로 테이블을 빠져나간다. 겉모습만 그럴 뿐, 취해 있다는 걸 아는 지한은 소파에서 일어나 소현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수풀처럼 우거진 인파들을 헤치면서 소현의 뒷모습에 눈을 떼지 않았다.
화장실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본 지한은 벽에 기대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지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난잡하게 입술 자국이 찍힌 주인은 제 얼굴이 어떤지 신경쓰지 않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낮은 조명이 전신을 덮자 아래로 응집된 열기가 갈증을 느끼듯 곤두섰다. 제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뭘 하고 있을지 지한은 혀가 바싹 말랐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술에 취한 소현은 전부 벗겨지고 속살을 드러낸 결정체처럼 순수한 자극으로 지한을 건드려 왔다.
제 얼굴 곳곳을 입술로 찍어 댔던 행위가 솔직한데 혀끝이 미치도록 부드러웠다. 손끝을 허벅지에 문지르며 지한은 땀이 배긴 흔적을 지웠다. 시야를 가려 놓았던 문이 열리고 소현이 걸어 나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지한이 기대어 있는데 어두운 조명 때문인지, 반쯤 풀린 눈꺼풀 탓인지 소현은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 했다. 손에 꼬옥 움켜쥔 냅킨이 지한의 눈에 색다르게 다가왔다.
“저기요.”
그때 소현의 앞으로 어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시야가 가려지자 지한의 눈썹이 구겨졌다.
“아까 장유란하고 얘기하는 거 봤습니다.”
지적인 이미지를 주는 슈트. 번듯한 시계와 검은 윤기로 번쩍이는 구두까지. 제 능력을 물질적인 과시로 표출하는 남자였다. 재킷을 벌린 남자가 무언가를 꺼내 소현에게 건네었다.
“이 나이 먹고 민준이한테 소개시켜 달라고 하긴 뭐 하고. 괜찮으면 같이 나가죠.”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바닥으로 튕겨진 종이 뭉치를 보고 알아차렸다. 명함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소현이 곧바로 구겨 버린 덕분이다.
“안 괜찮으니까 비켜요.”
소현의 구두가 옆으로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남자가 똑같이 움직이며 길목을 막아섰다.
“이런 여자는 또 처음 보네.”
순간 지한은 제 안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듯 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대화하면 생각이 바뀔 겁니다. 원래 이렇게까지 하진 않는데 제 이상형이라…….”
“저 애인 있어요.”
벽면에 기대어 있던 등이 느리게 떨어졌다.
“너무 깐깐하네. 친구 하면 되잖아요.”
“그것도, 싫은데요.”
“나 정도면 알아두면 좋을 사람인데 부족한가?”
으스대는 남자의 등을 보며 다가간 지한이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남자의 얼굴이 옆으로 밀려났다.
“악!”
벽으로 밀려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에 소현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깔끔하게 넘긴 남자의 머리카락으로 꽂힌 손가락이 칼날 같았다. 일렁이던 시야를 바로 잡은 소현이 눈동자를 움직였다. 한껏 우그러진 손마디를 따라 올라가자 날렵한 콧대가 보였다.
“내게 바로 와야지.”
표정은 건조했지만 눈동자는 소현을 깊숙이 가둬 넣는다. 소현은 넋을 놓은 채 말했다.
“……가려고, 했어.”
“그랬어?”
지한은 수긍하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정작 지한의 손에 붙들려 밀쳐진 남자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남자가 벽에 반죽처럼 눌린 얼굴로 말했다.
“윽, 뭐야? 너? 안 놔?”
지한의 눈동자가 옆으로 옮겨갔다.
“길 막으면 안 되지.”
“뭐 하는 거야……! 술에, 취했으면 곱게 꺼지지, 무슨 행패야?”
지금 이 상황이 술에 취한 난동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회색빛 눈동자는 선명하다 못해 살벌했다.
“가려서 내가 못 봤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