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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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톤이 해외 대기업인 킨슬리(Kinsley)에 지분을 매각했단 얘기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킨슬리는 IT업계에서 세계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회사였다. 공격적인 투자로 새로운 기술력을 흡수한 기업으로도 저명 나 있었다.
한국에 킨슬리가 진출하기 위해 포석을 깔고 있다느니, 한국 직원을 구하고 있다느니 뜬소문은 업계에서 종종 떠돌긴 했었다. 그 누구도 지분을 삼키면서 발을 들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 했다.
“…….”
소현을 제외하고선 말이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이뤄진 상륙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건지 알고 있던 소현은 떠들썩해진 주변에 동요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출근해 제 자리로 가서 앉았을 뿐인데 허벅지가 욱신거렸다.
지한이 남긴 키스 마크는 지워지는데 한참이었다. 피부를 세게 빨아 대는 거로도 모자라 이로 씹어 대니 몸 곳곳이 자국 투성이였다.
살성이 약해졌나. 인상을 찌푸린 소현은 체력을 보강해야겠단 생각이 절실했다.
날이 갈수록 지한이 제게 매달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정확히 파티 이후로 눈에 띄게 달라붙는다. 좋은 건 여전한데, 체력의 한계에 부딪친 기분이었다. 소현은 마시던 커피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대리님, 기사 보셨어요?”
“응.”
“킨슬리가 들어올 줄 누가 알았어요? 동종 업계 친구들 지금 난리 났어요.”
난리가 날 만도 했다. 저들끼리 해 먹던 영토에 거대 자본이 발을 들였으니 담합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소현은 컴퓨터 전원을 켜며 턱을 괸 채 귀를 만지작거렸다.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놀랍긴 하네.”
“그렇죠?”
지한이 킨슬리와 연관되어 있을 줄이야. 그때 서류 내용만 보았지, 기업명은 보지 못해 소현도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감상을 즐길 시간은 없었다.
“미연 씨, 재상 그룹 디스플레이 cf 오늘 마감이지?”
소현은 당장 눈앞에 있는 제 일이 중요했다. 제 몸과 상태가 더 신경 쓰인다. 점심시간을 틈타 담배를 태우러 나온 소현은 필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담배를 끊어야 하나.”
몸에도 안 좋은데, 골치 아픈 일에 부딪쳤을 때 담배가 위안이 되었던 터라 그동안 입에 달고 살았던 거였다. 그런데 요즘 지한을 만나면서 일밖에 모르던 머릿속에 환기구가 생겼다. 지한은 그곳을 자유롭게 넘나 들었다. 지한의 생각이나, 뭘 하고 있을지 문자나 전화할 때면 담배보다 더 확실한 효과를 가져왔다. 섹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요즘 최고로 좋았다. 지금 보다 더 나이를 먹으면 지한을 못 따라갈까 봐 걱정일 뿐.
소현은 반 정도 태우던 담배를 눌러 끄며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끊기자 소현의 입가로 웃음이 피어났다.
“밥 먹었어?”
「……이제 일어났어.」
소현이 벤치에 걸터앉았다. 도시는 삭막했지만 그래서 내리쬐는 햇볕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오늘 스케줄 브리핑 해봐.”
「없어. 너 기다리는 거 말고는.」
세상은 이렇게 떠들썩한데 지한은 한가로운가 보다.
“오늘 조금 빨리 끝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퇴근할 때 올래?”
「시간만 말해.」
지한과 대화하면 막힘이 없어서 좋다. 골치 아프게 저를 붙잡지도 않고 항상 빠르게 원하는 답을 내놓는다.
“거실 나가서 창문 밖에 한 번 봐봐. 오늘 날씨 너무 좋아.”
「있어 봐.」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는 소리를 들으며 소현은 눈을 감았다. 햇살이 양탄자처럼 깔린 곳을 밟고 지나가는 맨발이 소현의 머릿속에 자국을 남긴다. 쿵, 유리 표면이 작게 진동했다.
「그러게.」
거대한 창문 앞에 선 지한은 아마 유리벽에 머리를 대고 있을 거다.
「너처럼 좋네.」
한껏 햇살을 흡수해 느끼는 것처럼. 소현은 감았던 눈을 뜨며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말에 어디라도 갈래? 추워지기 전에…….”
“저기, 죄송한데 라이터 있으시면 빌려주실래요?”
소현은 말을 멈추고 제게 양해를 구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주머니 안에서 라이터를 꺼내 내미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남자가 감사하다며 얼른 불을 담배 끝에 붙였다.
「뭐야?」
순식간에 사나워진 목소리가 소현의 고막을 꿰뚫었다. 소현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어딘데.」
“어디면, 어쩌게?”
「어떻게 할 거 같은데.」
파티 이후로 지한은 남자라면 날카로워지곤 했다. 잘린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 심란하던 소현은 침묵했다. 어쩌면 성민이 지한의 머릿속에 악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다. 제게 라이터를 건네주는 남자에게 말했다.
“됐으니까 가지세요.”
“아니요. 저도 회사 들어가면 있습니다.”
“그냥 제가 드리고 싶어서요.”
“아……그럼, 감사합니다.”
남자는 의중을 알 수 없다는 듯 소현의 라이터를 챙기며 사라졌다. 소현은 제 깔끔한 처리에 흡족해 하며 속삭였다.
“내가 알아서 해결했으니까 이제 신경 꺼.”
「왜 네가 주고 싶은 건데.」
이상한데 꼬투리를 잡는다.
“그냥 한 소리야. 예의 없게 남자 손닿은 건 안 갖는다고 할 순 없잖아.”
「그 남자 어디 있어.」
“몰라, 회사 들어갔나. 안 보여.”
「어디 회사.」
“네가 알면 뭐 하게?”
지한은 말이 없었다. 아마 희미하게 짜증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현은 웃음이 새는 걸 꾹 억누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가 널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넘어가지 마.」
“정말이야.”
어느 누굴 만나도 이렇게 일을 잠시 벗어나 쉬는 기분을 안겨 준 적 없었다. 소현은 주머니 안에 넣어 둔 담배를 쓰레기통에 넣고선 걸어갔다.
지한에게 식사를 챙겨 먹으라고 당부했지만 정작 소현은 가볍게 빵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덕분에 이렇게 통화할 시간도 주어진 것이다. 소현은 세탁기를 돌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침에 나오면서 본 침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따가 만나. 문자할게.”
소현은 웃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회사로 들어가려고 하던 찰나 누군가가 소현을 아는 체 했다.
“강소현 씨.”
엘리베이터로 향하려던 소현의 발이 멈추었다. 안면이 있는 남자였다.
“잠깐 회장님께서 만나뵙자고 하십니다.”
호텔에서 본 적 있던 그는 자신을 정 회장의 비서실장이라며 소개하고 소현에게 잠깐의 시간을 요구했다. 소현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30분 정도 시간이 남긴 했다.
“멀리 가진 못하는데요.”
“충분합니다.”
소현은 비서의 뒤를 따라 걸었다. 정 회장이라, 호텔에서 만난 이후 언젠가 다시 또 마주칠 거란 예상은 하고 있었다.
제 회사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었지만.
소현은 지하 주차장으로 무게감 있게 주차된 차를 바라보았다. 앞 유리창으로 노인의 얼굴이 언뜻 비쳤다.
“타시죠.”
비서는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소현은 좌석에 안착하며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문이 닫히며 내부의 공기가 정지했다. 숨소리 하나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팔걸이를 사이에 두고 소현은 차분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짙게 선팅 된 창문 탓인지 노인의 얼굴이 한층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호텔에선 제가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 했습니다. 강소현입니다.”
“알고 있네.”
소현은 덤덤히 노인을 바라보았다. 제 인적 사항 조사는 기본으로 해보았을 거다. 노인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가 열리기 전에 소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6개월만 만나보겠습니다.”
노인은 제어가 걸린 것처럼 입을 주춤거렸다.
“뭐야?”
“제가 연애를 가장 길게 한 게 6개월이었거든요. 그때까지만 지한이 만나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무슨 소릴…….”
“저에 대해 알아보셨을 겁니다. 우선 지한이와 저, 서로 좋은 감정 가지고 교제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드시더라도 지금은 저희 사이 반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놀란 노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소현은 오래전부터 이런 얘기가 나올 걸 예상한 것처럼 막힘없이 얘기했다.
“현재 한남동에서 같이 살고 있습니다. 언제든 나올 수 있긴 한데 저 역시 지한이 때문에 거기 있게 된 겁니다. 회장님 눈에는 좋게 안 보이시겠지만, 여기서 저희 사이에 손대시면 지한이 성격 아실 테고요.”
“아니, 잠깐…….”
“6개월만 눈감아 주세요. 저도 제가 지한이를 얼마나 사랑하게 될지는 아직 가늠이 되질 않아 모르겠으니까요. 그때 가서 제가 만나게 해달라고 회장님께 빌든, 아니면 돈 봉투 쥐여 주시는 걸 받든. 결정하겠습니다.”
“허…….”
“오늘은 이 말 하려고 나온 겁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잠깐!”
소현이 문고리를 움켜잡으려고 하자 뒤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노인을 앞에 두고 저 할 말만 다 하는 게 어디 있나?”
소현은 손을 떼어내 몸을 돌렸다.
“말씀하세요.”
“일단,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부터 바로 잡아야겠네.”
소현의 눈꺼풀이 구겨졌다. 노인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