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64)화 (64/86)

64.

“내가 왜 둘 사이를 방해하는가? 궁금해서 혼자 알아본 건 맞네만, 지한이 녀석이 워낙 꽁꽁 감춰 두고 안 보여줘서 그렇지. 내가 둘 사이를 뭘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닐세.”

누명을 벗고 싶은 얼굴이 소현을 붙잡고 말했다. 소현은 이상함을 느꼈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실 텐데요.”

“자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지한이 성격 알지 않느냐고.”

노인은 뚱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놈 성격을 가장 잘 아는 게 날세. 눈치 보느라 이제야 자네 만나러 온 거 보면 모르는가? 오늘 일도 알면 난리를 치겠지만 서도.”

한 회사를 움직이는 수장이라고 하기엔 노인은 평범한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제 손주 걱정에 기회를 노리다가 은밀하게 접선한 것처럼. 소현은 아까와 달리 긴장감을 풀고서 노인을 마주했다.

“오늘 일은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얘기가 좀 통하는구만.”

노인이 흡족하게 웃었다.

“강소현이라고? 현진 기획에서 대리로 있고. 또 지한이랑은 어떻게 만났는가?”

소현은 저를 향한 노골적인 환심에 잠시 머뭇거렸다. 궁금하고 알고 싶다는 욕망에 충실한 노인의 눈동자는 별처럼 빛이 났다. 정말 연애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듣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현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그냥……우연히 마주쳤다가.”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다. 가라오케에서 방문을 잘못 열지만 않았더라면 시작되지 않았을 만남이었으니까.

“또 우연히 마주치고.”

단추와 돈을 안 놔두고 갔더라면 지한이 저를 찾아올 일도 없었다.

“……그래서 몇 번 더 만나 보았습니다.”

너도 좋았지 않느냐며 욕망을 자극하던 지한 때문에, 소현도 가볍게 생각했었다. 안 잊힐 만큼 지한과 잤던 그 하룻밤이 소현을 자극했으니까. 제 지위와 어울리지 않게 너무 원초적이라 노인에게 이런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였다. 노인은 흐뭇하게 눈웃음을 올린 채 물었다.

“내가 듣기론, 자네가 지한이가 떠날 녀석이라서 만났다던데 사실인가?”

소현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지한이가 그랬나요?”

“암. 내가 그 얘길 듣고 얼마나 괘씸했던지.”

틀린 것 하나 없는 소리다. 이별이 예정돼 있기에 가능했던 만남이었다.

“지한이 녀석이 여자를 여러 번 만나는 걸 내 처음 보기도 했고, 회사라면 귀찮아 죽는 녀석이 미팅 자리까지 나가는 거 보면서 보통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네.”

“…….”

“뭘 얼마나 지한이에 대해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녀석 미국에 안 돌아갔으면 하는 사람 중 하나네. 그래서 좋은 처자 만나서 한국에 머무는 가 했더니, 지한이 그 녀석이 꼭 자기가 떠나야지 되는 것인 양 말하는 게야. 내 눈엔 등 떠밀려서 억지로 가는 것처럼 보였네.”

소현은 문득 가슴이 욱신거리며 통증을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그랬군요.”

지한이 가기 싫어했다는 걸 걸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강소현, 자네를 잠깐이나마 못 되게 생각했었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지한이 횟수를 사용하지 않고 버티던 것이 떠오르는지.

“내 새끼 속 썩어 들어가고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자네는 떠날 사람이라 만났다는 게 미웠네만.”

이럴 줄 알았더라면, 가지 말라고 더 빨리 잡을 걸 그랬나. 욕심내도 되었던 상황이었다. 소현은 턱을 꾹 누르며 입술 근육을 끌어 올렸다.

“제 불찰이 크네요.”

“됐네, 결국 지한이가 안 가지 않았나. 내 고마워서 이렇게라도 얼굴 볼 겸, 얘기 전할 겸 왔네.”

“…….”

반대를 하려고 온 게 아니었다. 거기에 안도하는 제 자신이 소현은 익숙했다. 지한과 헤어질 거라는 생각은 아예 접어 둔 채 만났기 때문이었다.

“오늘 기사 난 것도 보았겠지.”

“네.”

“지한이가 어떤 녀석인지도 대충 알았을 테고.”

“대략 짐작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정찬호 회장님께서 지한이의 외할아버지가 되시는 것 정도는요.”

노인은 팔걸이 위로 손을 올려 두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킨슬리를 운영하시는 것 정도입니다.”

고민하듯 손가락을 두드리는 것이 소현의 눈에 걸렸다. 한참을 침묵하던 노인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지한이랑 같이 산다고.”

“네.”

“잠은 잘 자는가.”

“네.”

이번엔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현은 제 말에 실수가 있었나 되짚어 보았다.

“오늘도 늦게 일어난 모양이에요.”

한마디 덧붙였지만 노인의 경직된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소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노인의 입에서 긴 숨이 쏟아져 나왔다.

“지한이가 워낙 제 얘길 안 해서, 모르는 것 같구만.”

그건 안도가 아니라 불안함이었다. 소현은 신중하게 말했다.

“저도 딱히 캐묻진 않았습니다.”

“캐물어도 얘기 안 해줄 걸세.”

“그런가요. 저에겐 딱히 숨기는 건 없어 보이던데요.”

“원래 그런 녀석이야. 그래서 내 한국에 올 때면 사람을 붙여 둔 지도 꽤 되었네.”

소현은 이유 모를 긴장감을 느꼈다. 지한에게 뭔가가 숨겨져 있는 듯 보였다. 노인은 차분히 말문을 열었다. 소현이 알지 못하는 지한의 이면을.

“내게 둘째 딸이 있었네.”

있었다는 건 지금은 없다는 거다. 노인은 긴 얘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시트에 몸을 깊게 눕혔다.

“지한이 애미지.”

노인에겐 딸이 하나 있었다. 저를 닮아 당차고 어여쁜 아이였다. 유학을 보내 놓았을 때에도 어찌나 보고 싶던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눈에 어른거렸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웬 남자와 눈이 맞더니 결혼을 하겠다고 말했다.

노인은 노발대발했다. 당장 공부고 뭐고 필요 없으니 한국으로 불러들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연애를 하는 건 상관없었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상대인 남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외국 녀석이었다. 제가 애지중지 키워 온 딸을 그런 녀석에게 내어 줄 순 없었다. 재상의 혈통을 더럽히는 일이었다.

한국으로 끌려온 딸은 그때부터 단식투쟁을 이어나갔다. 곧 괜찮아질 거다,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고 믿었던 노인에게 딸은 비탈길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물건이 아니라고 자해를 했고, 손발을 묶어 놓으면 숨만 내쉬는 식물처럼 굴었다. 링거로 삶을 연명해 나가는 것도 무리였다. 잠도 제대로 못 들었고 처방된 수면제를 몰래 빼돌려 과도하게 먹고 자살 시도까지 했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돼 위장을 다 게워 냈을 때, 먹은 것이 없어 약만 덩어리째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서 노인의 억장이 무너졌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위험할 뻔 했다는 의사의 말도,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인 딸의 얼굴을 더는 볼 수가 없었다. 무슨 조치라도 취해야만 했다.

―넌 이제 내 딸이 아니다.

이렇게 망가진 모습을 곁에 둘 수 없어 노인은 말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대신 네 발로 나가면 두 번 다신 이 집안과, 재상에 발 못 붙일 줄 알거라.

호적을 파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내 자식이 더는 아니라는 말에도 딸은 곧 죽을 것만 같은 걸음걸이로 출국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 이후부터 노인은 눈을 닫았다. 닫은 척했을 뿐, 손가락을 잘라 낸다고 해서 그 빈자리가 생각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사람을 보내 딸의 소식을 매번 사진으로 받아오던 노인은 쓴물을 삼켜야만 했다.

도촬 된 사진 속 딸은 제가 허락하지 않았던 남자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더는 머리카락이 푸석푸석하게 빠지지 않았고, 피부는 매끄럽게 윤기가 흘렀다. 싱그러운 시절의 미소도 되찾았다. 생활은 가난하고 궁핍했다. 컨테이너 박스만도 못한 공간에서 남자와 비좁게 살았다. 그럼에도 마음은 풍요로운 듯 딸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딸이 그토록 낯설게 보인 건 처음이었다. 노인은 그제야 제 품을 떠났구나 실감했다. 그럼에도 딸의 소식은 끊지 못하고 계속 받아 보았다.

계속 밑바닥 인생이었다. 남자가 구상했던 사업을 함께 하고자 하는 투자자가 나타난 것을 빼고선. 그들이 함께 내보인 작품은 ‘킨슬리 닷 컴(kinsley.com)’이라는 보잘것없는 작은 옥션이었다. 판매자가 제품을 올리고, 구매자가 사는 시스템이었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글을 올리는 것이 업체가 아닌 개인이라는 점이었다.

‘킨슬리 닷 컴’엔 이름 없는 가수가 제 창작곡을 올리기도 했고, 어중이떠중이 개발자들이 아이디어를 올리기도 했다. 관심 있는 소비자는 그걸 돈으로 주고 샀다. 다만 그 사이트를 만든 남자와 딸은 손가락만 빨았다. 수수료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딸이 또 비탈진 길로 떠내려가리라 예상했을 뿐.

그런데 물살을 역행하듯 그런저런 사이트가 흥하기 시작했다. 무명 가수가 올린 창작곡이 거대 에이전시 눈에 띄면서 스타덤에 올랐기 때문이다. 홀로 창작하던 사람들이 성공할 수단으로 사이트를 이용했고, 이용자 수가 많아지니 덩달아 광고가 붙었다. 그때부터 흑자의 연속이었다.

뉴스에서 사이트를 재조명했고, 수수료를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객의 신뢰를 얻은 사이트는 몸집을 부풀리는 것도 빨랐다. 이미 이런 상황을 내다봤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제 딸아이의 영특한 머리는 그때부터 발휘되었다.

‘킨슬리 닷 컴’은 급속도로 성장 궤도에 올랐다. 투자자들과 손을 잡았고 덩치는 비대해졌다. 개인 위주의 스트리머 플랫폼, 그리고 기업의 물품을 판매하는 사이트와 창작자가 자유롭게 영상을 올리는 스트리밍까지.

어느 잡지 인터뷰에서 딸은 그렇게 말했다. 감춰진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그것을 해낼 수 있도록 제가 도와주고 싶단 인터뷰가 노인의 가슴을 깊숙이 후벼 팠다.

저는 하지 못한 것을 딸은 해내고 있었다. 자신은 절대로 허락하지 못했던 것을 딸은 반대쪽 세상에서 펼쳐 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다. 미국인과 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신기하게도 검은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병원에선 눈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희귀한 확률일 뿐이라고. 자라면서 점점 색이 어둡게 변할 거라는 의사의 말과 달리 그 아이는 자랄수록 더 투명하고 빛이 감도는 눈을 하게 되었다.

노인은 사진으로나마 그 아이를 보며 살았다. 저와 연관 없는 딸이 낳은 아이이기에, 똑같이 관계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놓을 수 없던지. 굳건하던 노인이 미국 땅으로 달려 나간 것은,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거대한 트럭이 8대의 차량을 들이받으며 질주했고 딸이 탄 차는 4번째로 충돌당했다. 트럭과 바로 부딪친 차량에 탄 사람들은 즉사했고 그 뒤 쪽도 생사를 오갔다. 그 사람들 중에 노인의 딸도 포함돼 있었다.

딸은 갈비뼈에 척추까지 온몸의 뼈가 부서진 거나 다름없었다. 일이 바쁜 와중에 제 아이의 학교를 찾아가다가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긴 시간 끝에 수술실에 나온 의사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함께 간 아내는 기어코 쓰러졌다. 노인 홀로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 딸의 옆에는 남자가 꼭 살려내겠다는 다짐을 눈물로 하고 있었다.

노인은 딸에게로 다가가는 걸음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오래 떨어져 있었기에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몰래 도찰된 사진 속에서 보았던 눈부신 미소와 행복한 얼굴을 대신해 상처와 붕대가 곳곳에 감겨 있었다. 그래서 웃는 얼굴도 겹쳐 볼 수 없었다. 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피가 눌어붙고 호흡기가 없으면 숨 쉴 수 없었다.

막연한 시간이 지나고, 세 번째 수술을 앞둔 딸의 의식이 기적처럼 돌아왔다. 노인은 급히 병원을 찾아갔다. 억겁이었던 걸음이 이번엔 사력을 다해 딸과 가까워졌다. 딸은 호흡기 사이로 간신히 말과 숨이 섞인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런 딸이 노인을 보고선 처음으로 웃었다.

―아, 버지…….

가느다란 목소리는 갈라지고 쇠했다. 바람 앞에 곧 꺼질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노인은 얼른 다가가 딸의 손을 잡고 가까이 귀를 붙였다. 아버지, 저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딸은 가까스로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됐으니까…….

쥐어짜듯 꺼낸 목소리가 미래를 얘기하고 있었다.

―내 아들……부탁해요.

거기에 딸은 없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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