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66)화 (66/86)

66. 외전 1

“대리님, 제 술도 받으세요.”

소현은 떠들썩한 내부 탓에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 내 정신 좀 봐. 이제 과장님이시구나.”

불판 위에서 고기가 자글자글 익어 갔고 분위기도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뜨거운 온도와 맞물려 술이 꽤 들어간 사람들의 얼굴이 울긋불긋했다. 소현은 제 옆으로 바짝 붙으며 소주병을 기울이는 사람을 보고 나서야 눈치껏 잔을 들었다.

“고마워요.”

광고 기획 1팀의 회식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소현의 승진을 기념하는 자리이자 오랜만에 회식이다 보니 원 없이 먹고 마시기 바빴다. 내일이 토요일이라는 심리적 안정감이 그들의 넥타이를 풀게 했을 거다. 제 옆자리에 앉은 소현을 본 팀장이 기분 좋게 한마디 했다.

“우리 강 대리가 유학파에다가, 센스도 워낙 뛰어나서 승진은 따 놓은 거였지. 이번에 재상 디스플레이 매출 나온 거 보면 알잖아? 기획 제조기야, 제조기.”

제조기란 낯 뜨거운 발언에 안면을 굳힌 소현은 애써 미소를 띠며 말했다.

“팀장님, 오늘따라 칭찬이 과하신데요.”

축하 인사는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왔던 소현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는 것이 점차 힘에 부쳤다. 입사할 때부터 주의 깊게 보았던 인재라는 둥, 떡잎부터 남달랐다는 둥 듣기에도 민망할 소리들이 쏟아졌다. 팀장의 말을 듣는 사원들의 표정 위로 부러움과 동경심이 함께 피어올랐다.

그들이 보는 소현은 명문대 출신에 피가 튀길 정도로 치열하다는 뉴욕의 광고계를 몸으로 경험하고 온 엘리트였다. 신입 때부터 독창적인 기획안으로 광고주들의 환심을 샀고, 이후 판매까지 상승세로 이어지는 최고의 루트를 짰다. 이번 재상 전자의 디스플레이도 무모한 시도라고 생각했건만 결과적으로 여성 구매자들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 지지를 얻은 판매율은 라이벌인 일산을 가볍게 꺾을 정도였다.

모 아니면 도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소현은 판을 다 뒤집고 역전에 성공했다. 회사의 위신을 세워 준 대가로 현진에선 빠른 승진을 소현에게 안겨 주었다. 하지만 정작 승리자는 저를 위해 준비된 축하 자리를 지겹게 바라보다 말했다.

“술이 좀 오르네요. 잠시만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일어선 소현은 화장실과 정반대인 가게 밖으로 나섰다. 금요일 밤의 열기가 쏟아지는 길거리가 갑갑한 내부보다 훨씬 더 나았다. 소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담벼락에 몸을 감추며 전화를 걸었다.

“미안. 끝날 기미가 안 보이네.”

승진은 어차피 예정된 일이었고, 그래서 감회로울 것 하나 없었다. 그보다 금쪽같은 금요일을 일도 아닌 회식으로 보내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 몇 신줄 알아?」

그 말에 소현은 손목시계를 들어 올렸다.

“11시 되기 오 분 전이네.”

지한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게 뻔한데 발이 묶여 곤혹스러웠다. 두 번 정도 자리를 파하려고 시도는 해보았으나 고삐 풀린 망아지들을 이끌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도 빨리 가고 싶어. 지금 몇 시간째니. 지겨워서…….”

다들 신이 난 건 이해하겠다만 그럴 거면 저들끼리 놀든가. 소현이 일어설 타이밍을 재면 귀신같이 알아채고선 오늘 끝까지 남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지겨운 건 알아. 그때마다 내게 전화를 하니까.」

“알아주니 다행이다.”

소현은 웃으며 뻐근한 고개를 젖혔다. 예전엔 이걸 힘들다고 못 느꼈는데, 지한과 연애하고 난 뒤부터 일의 연장선이 달갑지 않았다. 이럴 시간에 지한을 보면서 술 한잔 마시는 것이 제게는 훨씬 유익했다.

그때 담배를 태우려고 나온 사원이 소현을 아는 체 했다. 소현은 억지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들어가 봐야겠다. 갈 때 또 전화할게.”

「빨리 끝내.」

잠자코 목소리를 듣던 지한이 경고처럼 말했다.

“알았으니까 잘 준비 하고 있어.”

이만한 게 어딘가. 오늘이 승진 축하 기념이라는 것을 알아선지 지한은 어쩔 수 없는 소현의 상황을 압박하진 않았다.

그래도 지한의 목소리를 들으니 음울한 기분이 환기되었다. 다시 연기로 가득 찬 가게에 발을 들인 소현은 술로 마른 목을 축이며 자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12시가 넘어서야 하나둘씩 술에 취해 머리가 축축 처졌다. 말도 현저히 느려졌다. 소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을 움켜쥐었다.

“다들 취하신 것 같은데, 그만 가시죠.”

“어……몇 시지?”

“벌써 12시 넘었어요, 팀장님.”

악센트를 실어 말하자 반쯤 감기려 했던 팀장의 눈이 꿈틀거렸다.

“2차, 2차는 노래방으로 가자고!”

소현은 이를 갈며 말했다.

“2차 가기엔 다들 취했어요. 오늘은 이쯤하고 그만 가요.”

“기다려 봐, 어디 2차 갈 사람들 없나?”

“어, 저요.”

“저도 가겠습니다.”

취한 와중에도 팀장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원들이 의사를 밝혔다. 소현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끼우고선 말했다.

“저는 너무 피곤해서 그만 들어가 볼게요.”

“어, 음. 그래야지. 피곤하면 가야지.”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 잠깐. 여기 카드가…….”

소현은 늦장을 부리는 팀장의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카드를 꺼냄과 동시에 낚아채 계산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 가게를 빌리다시피 했기에 나온 금액도 어마 무시했다. 소현은 길게 뽑힌 영수증과 2차를 방지하기 위해 카드를 챙기고선 먼저 가게 문을 나섰다. 곧바로 지한에게 전화해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

“나 지금 가려고. 택시 탈거야.”

동시에 뒤에서 누군가가 소현을 덮쳐 왔다.

“강 대리!”

“아.”

어깨에 무게가 실리면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소현은 고개를 돌려 한껏 취한 팀장의 얼굴을 보았다.

“아아, 이젠 강 과장이라고 해야 하는데…….”

승진한 소현보다도 기뻐했던 팀장은 중얼중얼 어깨동무를 한 채로 애정을 과시했다. 잘 할 거라고, 지금처럼만 하라면서 알코올 냄새를 폴폴 풍겨 댔다.

“앞으로도 우리 잘 해보자고, 응?”

“네……알겠으니까. 잠깐만.”

어찌나 무거운지, 소현은 그를 의자에 앉혀 두고선 떨어진 제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통화가 끊긴 줄 알았는데 이어지고 있었다. 액정이 박살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소현이 귓가에 핸드폰을 대자 살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핸드폰을 떨어뜨렸어. 취한 사람들이 많아서, 정리 좀 하고 갈게.”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소현은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팀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자 금세 주변 일대가 시끄러워졌다. 통화를 바삐 종료한 소현은 축축 늘어진 사람들을 살폈다. 이곳에서 저와 신입 사원 두어 명만이 멀쩡해 보였다.

“2차! 2차!”

“무슨 2차예요, 다들 집에 들어가요. 차, 가져온 사람? 대리 기사 필요한 사람 몇 명이에요? 종윤 씨, 택시 좀 불러 줘요.”

소현은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을 챙겼다. 그나마 귀소 본능을 가진 자들은 알아서 제 갈 길을 갔다. 문제는 2차를 외치는 팀장이었다. 소현은 제일 먼저 대리 기사를 불러 그를 태워 보내 버렸다. 나머지 정리도 빠르게 이뤄졌다. 복작복작하던 풍경이 한가롭게 변하고 나서야 소현은 머리가 핑핑 돌았다.

“수고했어요.”

“아니, 과장님이 더 고생하셨죠. 저희도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다음 주에 봐요.”

같이 뒤처리를 함께했던 동료들까지 보낸 후에야 소현은 무더움에 재킷을 벗었다. 핸드폰을 꺼내 드는데 어느새 2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얼른 집에 가야겠다고 콜택시를 부르려던 찰나였다.

끼이이익, 매서운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가게 앞으로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귓가에 이어폰을 꽂던 소현의 눈가가 구겨졌다.

“너…….”

쾅, 차 문을 닫는 굉음이 허공을 갈랐다. 차에서 내린 지한은 가게로 곧장 들어가려다 소현을 발견하고선 방향을 틀었다. 다가오는 와중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눈빛은 착오 없이 이뤄졌다. 손에 들린 재킷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본 지한이 멈춰 서며 서늘하게 물었다.

“누구야.”

“뭘?”

“누가 건드렸냐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소현은 황망하게 물었다.

“이거……잠옷 아니니?”

검은 실크로 된 소재가 소현의 눈에 들어왔다. 지한은 인상을 구겼다.

“왜 전화는 안 받아.”

“너, 지금 너 잠옷 입고 나온 거냐고 묻잖아.”

지한의 입술 끝이 치솟았다.

“아예 벗고 올 걸 그랬나?”

미친놈. 외마디 말이 튀어 나갈 뻔했다.

“네가 무슨 몽유병 환자야?”

잠옷 상의와 하의에 구두를 신는 미친 사람은 정지한 하나뿐일 거다. 그것도 하나의 패션으로 소화하고 있어서 더 문제였다.

“너 때문에 침대에서 뛰쳐나왔지.”

소현은 마지막 통화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술에 취한 팀장 때문에 핸드폰을 떨어뜨리고……거기까지 생각한 소현은 차갑게 굳은 지한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잠깐, 술에 취한 팀원들이 많아서 정리하느라 정신없었어. 전화는…….”

아마 그래서 온 줄도 몰랐을 거다. 소현의 핸드폰은 늘 진동 모드였다. 다신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가방 속에 처박아 두었고. 그럼에도 지한은 눈에 서린 공격성을 지우지 않았다. 소현의 주변을 살피더니 다시 시선이 내리 꽂혔다.

“다 보냈나 봐.”

“진작 보냈지. 나도 이제 가려던 참이었어.”

“손쓴 건 아니겠지.”

“내가 뭘 숨긴다고 손을 써?”

눈에 띄는 차 때문인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이쪽을 쳐다보았다. 소현은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었다. 지한이 잠옷을 입고 당당히 거리를 활보하는 건 막고 싶었다.

“그만 가자. 나 추워.”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몸이 뜨거웠다. 낯이 뜨거운지도 모른다. 소현은 지한을 데리고 가기 위해 제가 먼저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소현이 타면 실과 바늘처럼 따라오는 지한을 알기 때문이었다. 지한은 아무도 없는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본 뒤 짓씹는 것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운전석에 오른 지한은 안전벨트를 끌어다가 소현의 몸에 채웠다. 마치 어디 도망 못 가게 결박하는 것만 같았다.

“술 좀 마셨나 봐.”

겹쳐진 몸이 물러나지 않고 소현의 입술 언저리에서 물었다. 소현은 참았던 숨을 풀며 말했다.

“주는 것만 받아 마셨어. 취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

지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현이 시트에 기대어진 머리를 떼어내며 입술을 부딪쳤다. 제 전화에 정신없이 달려온 건지 쉽게 벌어지는 입안은 뜨거웠다. 혀로 건드리는 걸 받아 주면서도 지한은 눈을 감지 않았다. 소현은 눈꺼풀을 살며시 구기며 입술을 떼어 냈다.

“매너 없게 눈도 안 감아?”

“실수.”

지한은 열기가 집약된 눈을 감으며 말했다.

“다시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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