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68)화 (68/86)

68.

*

“할아버지.”

「왜.」

“워크숍 없앨 방법 없어?”

노인은 오전부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반문했다. 지한은 소파에 앉아 소현이 출근한 빈자리를 이겨내고 있었다. 가정부가 와서 한차례 청소를 했지만 침실과 소파는 건들지도 못하게 했다. 그건 지한이 지켜야 할 사명 같은 거였다. 음지에서 노는 두 사람의 체면이었다.

“주말 내내 생각해 봤는데 딱히.”

답이 나오질 않아 이렇게 노인에게 전화까지 건 거다. 지한은 온몸에 힘을 빼며 소파에 체중을 기대었다. 햇살이 들어와 풍경을 따스하게 덮었다.

이 집에서 소현과 지한이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곳은 이 거실이었다. 업무를 집까지 끌고 온 소현은 서재보단 이곳에 앉아서 하는 걸 즐겼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걸 고민하고 있는 게야?」

주말 동안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행위가 있었는지, 엉덩이로 누르면서 회상하는 중이었다. 지금처럼 앉아 있으면 소현은 지한의 다리 위에 올라타 쾌락의 끝을 보여주곤 했었다.

지한은 눈을 느리게 떴다. 천연 가죽이라서 그런지 땀이 눌어붙은 가죽으로 우글우글 주름이 잡혔다. 그것이 지한의 눈에는 아름다운 무늬 같았다.

“말이 되게끔 할아버지가 얘기해 봐.”

요즘 따라 소현이 회사에서 뭘 하는지 신경 쓰였다. 광고와 관련된 일을 한다지만 매번 술자리니, 미팅이니 얼굴과 입을 비추느라 바쁜 여자였다. 집에서만큼은 오롯이 지한의 차지였지만 제게도 예뻐 죽는 여자가 다른 곳에서는 미움을 받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증거로 소현에게 껄떡대는 남자들을 여럿 봐왔었다. 제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작 한 번 만났을 뿐인데 못 잊는 건지 소현을 또 데려오라는 식의 표정과 눈빛들이 지한을 긁어내렸다.

그런데 2박 3일을 제 손에 안 닿는 곳으로 간다고 하니, 지한이 용납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반면 노인은 워크숍이 얼마나 중대한 행사인지 나열했다.

「워크숍은 조직 관리 차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지. 직원들이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나, 회사가 올해엔 어떤 목표를 가지고 달려갈지 대화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성과 얘기도 하고 말이야. 암, 발전을 위해선 꼭 필요한 법이야.」

임원으로서 내려다보는 시선은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그 어떤 해답도 찾지 못하고 지한은 시선을 옮겼다. 11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소파에서 벗어난 지한은 제 서재로 갔다. 서랍장 안쪽에 가죽으로 된 천을 들추자 안에서 칼날이 번득였다. 그걸 소중하게 덮어 챙긴 지한이 말했다.

“수를 써야겠어.”

「무슨 수를 써? 갑자기 워크숍은 왜 얘기하는 게야?」

“있어. 그런 게.”

노인은 뭔가를 떠올렸는지 매섭게 말했다.

「내 어제 그 녀석한테 네가 킨슬리에 임원으로 들어간다는 소리 들었다. 대체 생각이 있는 게냐? 할애비 회사로 들어와서 일 배워도 모자랄 판에……!」

“끊어.”

「아직 얘기 안 끝났다.」

“또 뭐.”

「소현이는 또 언제 볼 수 있는 게야?」

노인이 친숙하게 말하는 이름에 한 번 제지를 걸까 하다가 지한은 그만두었다.

“줄을 서. 나도 기다리는 중이니까.”

늙으면 욕심이 끝도 없어진다는 건 노인을 보면서 실감하는 중이었다. 저번에 한 번 식사 자리를 만들었더니 이제는 본가까지 놀러 오길 바랐다. 소현도 노인을 불편해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마치 몇 번 만나 본 사람처럼. 노인은 아쉽다는 듯 볼멘소리를 냈다.

「뭘 얼마나 바쁘기에 줄까지 서야 한다는 건지…….」

“아침 8시까지 출근해서 저녁에 들어오는 시간은 불규칙하지. 그때까지 내가 눈이 빠져라 기다리는데, 할아버지가 새치기하면 쓰나.”

「그럼 나와는 주말에 보면 되지 않느냐?」

“평일 내내 기다린 내가 즐기는 시간인데 넘보지 마.”

「그러지 말고 소현이한테 얘기나 해보거라. 분명 좋다고 할 테니.」

“…….”

소현이 노인을 봐주는데, 그건 그거대로 지한의 성질을 긁었다. 저 아닌 다른 남자와 얘기하는 꼴을 봐주는 것이 점차 힘들어지고 있었다.

“워크숍을 없앨 방법은 할아버지 머릿속에 없는 것 같네. 이제 진짜 끊어.”

특히나 회사에 간 이후부터는 어디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지한은 옆구리에 끼운 칼집을 조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

짐을 챙겨야 하는데 차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긴 했지만 캐리어 안까지 들어가는 과정이 내키질 않아 소현은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아침이 돼서야 어쩔 수 없이 캐리어 안에 짐을 수납했다.

“다녀올게.”

“어.”

소현의 발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지한 때문이었다. 차라리 가지 말라고 뿌리를 박거나 불참 사유를 만들라 했더라면 소현의 마음은 불편했겠지만 머릿속은 개운했을 거다. 그런데 지한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한 것을 빼고는. 순순히 현관까지 배웅 나온 지한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어 빤히 쳐다보았다.

“나 정말 가?”

지한은 허리를 숙여 소현의 입술을 머금었다. 진득한 혀의 움직임이 점막만 건드리고선 빠져나왔다.

“이제 가.”

격한 입맞춤도 아니었다. 소현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캐리어 손잡이를 길게 뺐다. 움켜잡았는데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지한을 보았다.

“전화할게. 아니, 시간 날 때마다 할게. 식사는 아주머니 오실 테니까 문제없을 테고……그리고 잠은.”

“잠이 왜.”

내가 없으면 못 잘지도 모르는데. 소현은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외롭더라도 내 생각하면서 잘 자라고. 밤에 영상 통화할까?”

“그러던가.”

“안아줘.”

뚱한 목소리로 말하자 지한이 두 팔 벌려 소현을 끌어안았다. 지한에게 안겨 한껏 체향을 흡수한 소현이 속삭였다.

“왜 이렇게 가기 싫지.”

“그럴 만도.”

“너무 자신만만하네.”

“이제 가. 조심하고.”

“내가 조심할 일이 뭐가 있어.”

“남자 새끼들 조심하라고.”

소현의 눈썹이 살짝 올라섰다.

“성질 좀 죽여.”

“죽이고 있어.”

동그란 머리를 소중하게 쓸어내린 지한이 소현의 몸을 떼어 냈다.

“내 성질대로 했으면 터진 새끼들 여럿이야.”

무슨 말을 저렇게 무섭게 해. 뭐가 터진다는 건지 소현은 알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지한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한 소현은 캐리어를 끌고 현관문을 나섰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지한의 팔에 머리를 대고 가기 싫다는 소리를 한 번 더 했다. 아쉬운 이별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지한의 모습이 사라졌다. 소현은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보았다.

“정지한은 괜찮은데, 내가 왜 이러는 거야.”

택시를 타고 회사로 향하면서 소현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뭐 할 거야?]

지한에게 문자를 보내고 얼마 가지 않아 답장이 왔다.

[네 생각.]

픽하고 소현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거 말고 진짜 할 일.]

[바빠.]

문자가 곧바로 연달아 왔다.

[침실 청소하고 나가야 해.]

킨슬리와 관련된 일인가. 저번에 스치듯이 회장의 비서라는 남자와 만난 적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전 다시 온 건지 종종 지한이 그와 통화를 하는 걸 보았기에 소현은 문자를 그만두었다.

바쁜데 방해하면 안 되지. 그런데 이 기묘한 불안감과 아쉬움은 떼어낼 수 없었다. 소현은 창문 밖을 보며 머릿속을 비우려고 했다.

회사에서 선별된 임직원 50명이 공항으로 한데 모이자 금세 복작복작해졌다. 1년에 한 번 있는 워크숍은 특별할 게 없었다. 말이 좋아서 글로벌 기업 간의 지식 교류와 공유지, 타국에서 회사의 이미지를 살려야하는 임무를 가진 거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직원들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엔 주말 안 껴서 하는 게 어디예요.”

“금, 토, 일이 제일 끔찍하지. 다음 날 또 출근해야 하니까.”

“평일이라서 다행이긴 한데…….”

소현은 투덜거리는 목소리들을 들으니 떠나는 것이 실감 났다. 게이트 너머 유리창으로 펼쳐진 활주로가 광활했다.

“과장님도 가기 싫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어떻게 살아요.”

“아까부터 과장님 계속 핸드폰 보시던데 바쁘신가 봐요, 연락 올 곳 많아요?”

워크숍 일정을 미리 전달했기에 클라이언트와 업무적으로 통화하는 건 없었다. 다만 지한이 언제 전화 하나, 문자를 했나 확인하려고 종종 꺼내 보았던 게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나 보다. 소현은 멋쩍게 웃었다.

“그러네. 급한 일이 몇 개 있어서요.”

“하아……해외여행은 애인이랑 가야 하는 건데.”

“지윤 씨 애인이랑 사귄 지 좀 됐지?”

“네. 1년 넘었죠.”

지한이 바쁠 것 같아 곧 비행기에 탑승한다는 문자를 보내 두었다.

“과장님은 애인 없으세요? 반지 끼고 다니시는 걸 통 못 본 거 같아요.”

말끔한 손가락으로 직원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소현은 핸드폰을 든 손을 까딱이며 내렸다.

“없어요.”

일할 때만큼은 반지 같은 건 소현의 손에 끼워질 수 없었다. 애인은 무슨 일을 하냐, 언제 결혼할 거냐 만나는 사람마다 추궁이 끊이질 않는 걸 다른 직원을 통해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늘 그랬듯이 없다고 말했을 뿐인데, 문득 손가락이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소현은 곁눈질로 직원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았다. 저도 그렇지만 지한도 딱히 반지에 욕심내진 않는 눈치였다. 제게 선물로 목걸이나,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는 사줘도 반지는 열외였다.

문득 제 몸을 만지던 긴 손가락을 떠올랐다. 우직한 마디에 비해 열 개의 손은 우아하게 길었다. 네 번째 손가락에 깔끔한 은색 링이 끼워진 걸 상상한 소현은 눈동자를 굴렸다. 엄청 섹시할 거 같긴 하네.

“아, 탑승 시작한대요.”

소현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답장 온 게 없었다.

“……많이 바쁜가.”

아쉬워하며 비행기에 탑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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