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싱가포르는 한국과 달리 무더웠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마주한 건 낯선 정경을 덮은 비였다. 대절한 버스를 타고 호텔에 도착한 소현은 스케줄 표를 받는 순간 지한의 생각을 잠시 내려 둬야만 했다.
눈코 뗄 새 없이 몰아치는 일정이었다. 각국에서 파견된 직원들과 인사하고 세미나를 가졌다. 식사에, 또다시 시작된 프레젠테이션까지 마치고 나니 저녁 9시였다.
같은 방을 쓰게 된 미연은 샤워 후 금방이라도 눈이 감길 것처럼 몽롱한 얼굴이었다.
“과장님, 저 먼저 잘게요.”
“그래요, 오늘 수고했어요. 내일 아침 8시에 조식이니까……7시엔 일어나야겠지?”
“아, 끔찍해. 빨리 잘래요. 저 못 일어나면 깨워 주세요.”
“그럴게요. 먼저 자요.”
소현은 웃음을 머금고서 방 조명을 미조등으로 바꿔 두었다. 은은한 등불만 켜 두고서 카드 키를 챙겨 방을 나섰다.
로비에 도착한 소현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야경과 어우러지며 번졌다. 어둠이 깔린 하늘 아래로 색색의 우산이 꽃을 피웠다. 우산 하나 아래에서 꼭 붙어 걸어가는 연인을 보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메신저로 전화를 걸었다. 먼 곳에 있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연결 음이 애절하게 들려왔다. 소현은 통화가 연결되자 입을 벌렸다.
“지한아.”
「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감정이 울렁거리는지 모르겠다. 소현은 턱을 괴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잘 있어?”
전부 비 때문이다. 탁한 습도가 기분까지 가라앉게 하는 거다.
“나 지금 호텔 로비로 내려왔는데 여긴 계속 비가 오네. 거긴 어때? 아침에 나올 때 하늘이 우중충하긴 했는데.”
「여기도 비와.」
무슨 우연인지 모르겠다. 수화기 너머가 고요했다. 아마 지한도 거실에서 창문 밖을 보고 있을 거다. 소현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지한에게 얘기했다. 마치 수다쟁이가 된 것만 같았다. 지한의 앞에선 이런 얘기가 허물없이 나왔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지 소현의 입술이 멈추었다. 로비는 쾌적한 공기가 감돌고 더위를 지워 줄 시스템까지 완벽했다. 그럼에도 추위를 느낀 소현이 한 손으로 팔을 감싸며 작게 속삭였다.
“보고 싶어.”
「…….」
보고 싶다. 소현은 혼잣말처럼 그 말을 뱉어 냈다. 지한과 함께 할 땐 몰랐는데 이렇게 떨어져 있어 보니 실감 났다. 그동안 정말 많이 익숙해져 있었구나. 지한의 체온과 저를 안아주던 감각이 그리웠다.
잠이 안 오는 건 지한이 아니라 소현일지도 모른다. 몸은 피곤했지만 머리는 지한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선명하게 날을 세웠다. 수화기 너머로 낮은 숨이 흘렀다.
「보면 되지.」
소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영상 통화할까?”
어차피 그걸 하려고 조명이 밝은 로비까지 나온 거였다. 소현은 아직 화장을 지우지 않은 제 얼굴을 유리창 너머로 비춰 보고선 핸드폰을 떼어 냈다.
“다시 걸게. 준비하고 있어.”
“그럴 필요 없어.”
순간 소현의 핸드폰이 낯선 손길에 잡혀 위로 올라갔다. 소현의 시선도 따라 올라갔다.
“눈으로 직접 봐.”
위에서 내려오는 그림자가 우산처럼 소현의 얼굴을 덮었다. 색색의 빛을 내는 눈동자가 소현과 마주치고 시선으로 달라붙는다.
“너…….”
믿기 어려웠다. 소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소파를 짚은 팔을 구부린 지한이 소현의 입술을 느리게 머금었다. 아침과 같은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그래서였나. 그래서 아침에 이상하리만치 태연하게 보내 주었던 거다. 소현은 기가 찬 웃음을 흘렸다.
“너 언제 왔어?”
“낮 비행기를 타고 왔지.”
이것 때문에 연락이 안 되었던 걸까. 지한에게 도착하지 않은 문자를 보며 홀로 낙담했던 시간이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 내린다. 소현은 웃으며 고개가 뻐근한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지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음영 진 눈동자가 깊어졌다.
“방 잡았는데 올라가자.”
지한은 저보다 참기 어려운 눈빛이었다. 기꺼이 소현은 로비를 벗어나 지한과 동행했다. 낯선 이국땅에서 만난 지한은 여전했다. 컨퍼런스 탓에 정장 차림의 사람들로 가득 찬 비즈니스호텔과는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셔츠와 바지. 헐벗은 것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소현의 얼굴을 시선으로 더듬었다.
평범한 엘리베이터 안을 순식간에 긴장시키는 남자는 지한이 유일할 거다. 소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지한을 따라 35층에서 내렸다. 문을 열자마자 지한의 입술을 찾는 건 예정된 일이었다.
소현이 벌린 입술 사이로 혀가 다급하게 넘어왔다. 지한도 계속 참고 있었다는 듯이. 시작은 소현이 했지만 결국 매달리는 건 지한의 쪽이 되었다. 한껏 숙인 허리가 혀의 교접을 가까워지게 했다. 젖은 혀가 비벼지자 음탕한 소리가 났다.
소현은 지한에게 안기다시피 침대로 향했다. 푹신한 감각이 소현의 등을 점령했다. 소현은 허리를 나른하게 세워 셔츠를 벗는 지한을 쳐다보았다.
올라간 천이 머리카락을 헤집고서 나가떨어졌다. 조명에 반사된 근육이 혈기왕성하게 물결쳤다. 소현은 발끝을 세워 신고 있던 구두를 밀어냈다. 발목을 잡은 긴 손가락이 다리를 간지럽게 쓸어 올렸다.
“아……읏.”
매끈한 감촉 탓에 소현의 숨이 끊어졌다. 소현은 두 손을 뻗어 제게 몸을 겹쳐 오는 지한의 입술을 물었다.
아래층에 회사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실이 빠르게 소현을 흥분시켰다. 같은 건물, 다른 층에서 이뤄지는 밀회였다. 제가 지한과 이러는 것도 모른 체 단잠에 빠져 있을 룸메이트 미연도 떠올랐다. 텅 빈 침대를 발견하고 연락하면 어쩌지.
“하읏.”
아래를 문질러 오는 감각에 생각이 휘발됐다. 언제부터 이런 상태였는지 지한은 뻐근하게 고개를 세운 제 것을 소현에게 각인시키고 있었다. 소현은 지한의 목 뒤를 손으로 감쌌다.
“하……언제 돌아가는 거야?”
“너 갈 때.”
지한은 끈적하게 소현의 귓바퀴를 핥았다. 밀어 올리는 골반의 움직임이 맞물려 습도로 비벼졌다. 소현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젖은 입술이 귓불을 빨아 당기며 벌어졌다.
“하루라도 네 살 냄새 안 맡으면 죽을 거 같아.”
그 말이 녹아내리듯 소현의 감각을 점령했다. 브래지어 안으로 손가락이 침범하자 흠칫 몸이 떨렸다. 허리 뒤로 파고든 손이 버클을 풀었다. 소현은 문득 이 손길과 감각을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 목을 빨아 대는 지한의 귀로 소현이 작게 속삭였다.
“우리, 반지 할래?”
“무슨 반지?”
지한이 나직하게 물었다. 반지라니, 소현은 제가 말하고도 웃음이 날 뻔했다. 제게 반지는 증표이자 연인이라는 딱지에 불과했다. 노골적인 표식이 잡음을 일으켰고 갑갑해 불편하기만 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왜 연인들이 반지를 하는 건지.
“그거라도 나눠 끼고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 같아서…….”
서로 똑같은 것을 끼고 있으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위로가 될 것만 같았다. 링을 만지면서 지한을 더 생각할 수 있을 거다. 반지는 분신이었다. 배 위를 스친 긴 손가락이 맞물린 곳을 벌리며 들어갔다. 소현의 목덜미가 바르르 떨렸다. 그 떨림 위로 진한 입술이 새겨졌다.
“손가락에?”
“하……그래, 네 번째 손가락에, 끼는 거. 아.”
“네가 끼워 줘.”
길고 곧은 네 번째 손가락이 소현의 안에서 느껴졌다.
“그럼 할게.”
문지르자 소현의 허벅지가 굳어졌다. 소현은 몽롱해진 정신으로 말했다.
“알았어, 한국 돌아가면, 내가 사줄게……아……잠깐.”
소현은 지한의 얼굴을 잡아 세웠다.
“나, 샤워해야 돼. 오늘, 계속 돌아다녀서…….”
혼곤해진 눈동자가 소현과 마주치고선 아래로 미끄러진다.
“어차피 다 젖을 거잖아.”
소현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벌써 방안으로 질척한 소리가 빚어지고 있었다. 지한이 팔에 힘줄을 세울 때마다 소리의 농도는 점차 진해졌다.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한은 낯선 공기가 묻은 목덜미와 가슴을 핥았다. 제 냄새로 뒤덮고 채우기 위해서.
투툭, 툭. 야경을 담은 창문으로 빗줄기가 부딪쳐 흘러내렸다.
*
“……지한아.”
지한은 느리게 눈꺼풀을 들었다. 번쩍이는 전자시계가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눈길을 옮기자 언제 씻은 건지 소현은 새초롬한 얼굴로 옷까지 갖춰 입고 서 있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소현이 블라우스 단추를 마저 잠그며 말했다.
“나 가야 돼. 이따가 연락할게. 더 자고 있어.”
“아침은.”
“8시에 팀원들이랑 호텔에서 먹을 거야. 가서 빨리 준비해야 돼.”
잠긴 목소리가 방안으로 고즈넉하게 깔렸다. 급하게 단추를 채운 소현이 허리를 숙여 지한의 얼굴에 입술을 부딪쳤다.
“갈게.”
바쁜 와중에도 지한에게 인사를 빼놓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에 감기는 팔을 뿌리치는 건 조금 힘들었지만.
방을 나선 소현은 재빨리 25층으로 내려갔다. 머릿속으로는 미연이 저를 찾으면 뭐라고 할지 핑계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몰래 집을 나갔다가 들어오는 청소년처럼 신경을 곤두세운 소현이 카드 키를 스쳤다. 조용히 문을 열자 어제 켜 둔 미조등이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소현은 구두까지 벗고서 맨발로 카펫을 밟았다. 반 정도 이불을 거둬 내고 잠들어 있는 미연을 보니 온몸에 힘이 빠졌다.
다행이다. 아직 안 일어났구나.
소현은 캐리어에서 속옷과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어제 지한과 하면서 벗어 둔 속옷을 다시 입기 찝찝해 그대로 내려왔다. 치마를 푼 소현은 순간 뒷덜미가 싸늘해졌다.
“아……속옷 두고 왔네.”
지한의 방 어딘가에 버려져 있을 속옷을 떠올린 소현은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다시 가서 가져올 수도 없고. 급한 대로 옷을 갈아입고 드라이기를 꺼내든 소현은 긴 머리카락을 말리는 행위에 집중했다.
말끔한 모습으로 나오니 정확히 7시였다. 소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미연을 깨웠다.
“미연 씨, 일어나요.”
“으응…….”
불판 위에 구워지는 오징어처럼 미연이 몸을 뒤틀었다.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린 미연이 소현을 보며 놀랐다.
“역시……과장님은 아침잠도 없으신가 봐요…….”
“얼른 씻어.”
소현은 미소로 응해 주며 캐리어로 걸어갔다. 하품을 찍 내뱉은 미연은 어기적거리며 다리를 움직였다.
“아, 그런데 어제 몇 시에 들어오셨어요?”
그 말에 화장품 파우치를 꺼내던 소현의 팔이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