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설마, 자던 도중에 일어났을까? 그랬으면 빈 침대를 보고 전화했을 텐데. 소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왜?”
“와. 어제 저 한 번도 안 깨고 잔 거 있죠? 과장님 언제 오셨는지 소리도 못 들었어요.”
미연은 눈가를 비비며 욕실로 들어갔다. 십년감수한 소현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밤새 깨지 않고 잠든 건 다행이었다. 제 은밀한 외출을 까마득히 모르는 미연 덕분에 무사히 넘어갔다고 하지만 오늘은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난감했다.
소현은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같은 건물에 지한이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소현은 심장의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
손가락을 걸어 들어 올린 속옷이 눈앞까지 도달했다. 지한은 누가 흘리고 간 물건인지 쭈그려 앉아 관찰했다. 햇살에 부딪친 버건디 색 속옷이 부드럽게 몸을 늘어뜨린 채로 흔들렸다. 먹잇감을 집어 무는 것처럼 지한의 눈빛이 날카로운 빛을 냈다.
매정하게 허리를 감은 팔을 풀고 도망칠 땐 언제고, 또 이렇게 포만감을 안겨 주는 선물을 두고 갔다. 지한은 속옷도 안 입고 복도를 뻔뻔하게 걸었을 소현을 생각하니 혀끝이 저릿했다. 가만 보면 위험한 짓을 즐기는 여자다.
소중하게 속옷을 움켜쥔 지한은 구부렸던 무릎을 펴 옷장으로 향했다. 짐 정리를 하지 않은 옷들이 중구난방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곳에서 금고를 찾아 문을 연 지한은 속옷을 넣어 두고 비밀번호를 설정했다. 룸 클리닝을 하러 들어온 직원이 실수라도 건들면 곤란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7시 40분이었다. 지한은 8시에 조식을 먹는다던 소현의 말을 떠올렸다. 손에 잡히는 것을 상체에 끼워 넣은 지한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흩트리며 문을 나섰다. 조식은 필요 없다. 목표는 따로 있었다.
비즈니스호텔이라서 그런지 이른 아침부터 정장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뷔페를 포진했다. 지한은 그들과 섞일 수 없는 기름처럼 미끄러지는 보폭으로 테이블 사이를 지나갔다. 직원이 안내해 준 자리는 한적한 곳이었다. 지한은 터를 잡고 앉아 짜 맞춘 듯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회색빛 눈동자가 우아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에 파묻히듯 침전했다.
풍경이 진부하게 느껴질 무렵, 시선을 사로잡는 여자가 보였다. 남들과 똑같은 옷과 색상을 입더라도 독보적인 실루엣이다. 지한은 기대었던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깔끔하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제 존재를 모르고 웃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팀장님 어젯밤에 잘 주무셨어요?”
“말도 마. 오늘 세미나 준비하느라 새벽 3시에 잤어.”
“미연 씨는 기절했다던데요.”
“과장님…….”
미연이 얼굴을 붉히며 소현을 슬쩍 찔러 댔다. 그 모습이 귀여워 소현은 웃음을 띠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착석한 소현은 배를 문지르며 음식이 정렬된 곳으로 직행하는 팀장을 보았다.
오늘 든든히 먹어 둬야 10시부터 시작되는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소현은 팀원들을 대신해 6개의 커피를 주문하고 따라 일어나려고 했다. 순간 제 얼굴과 목으로 꽂혀 오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
저를 빤히 보는 건 지한이었다. 소현은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눈가를 좁혔지만 보이는 형체는 오히려 또렷해질 뿐이었다. 소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혼잡해졌다.
쟤가 왜 저기 있어? 의문은 무의미했다. 같은 호텔에 묵고 있으니 호텔 조식 뷔페에 지한이 등장했다고 해서 놀라울 것 없었다. 하지만 왜 소현과 같은 시간대에 앉아 있는 건지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걸어간 소현이 접시를 집어 들었다. 베이컨, 감자, 뭐라 적혀 있는지도 모를 음식들을 무작정 접시에 담았다. 어차피 팀원들은 지한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다. 저만 당황한 티를 안 낸다면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을 거다.
“과장님, 주스 드릴까요?”
소현은 제 옆에서 웃는 미연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아니……괜찮아. 내가 할게.”
얼굴을 아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미연은 오래전 지한이 제 회사를 처음 찾아왔을 때 소현의 옆에 함께 있던 인물이었다. 기억하고 있을 진 모르겠지만, 쉽게 잊힐 얼굴은 아닌지라 만약의 상황을 배제할 수 없었다. 소현은 경직된 손가락을 억지로 펴며 집게를 잡았다. 얼른 먹고 나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접시를 채울 때였다.
“실례.”
바로 옆에서 긴 손가락이 침범해 왔다. 고개를 든 소현의 눈동자가 뒤흔들렸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지한이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지한은 소현이 놓은 집게를 잡으며 말했다.
“풀만 먹지 마.”
소현은 제 접시를 바라보았다. 싱그런 샐러드만 한가득이었다. 소현은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물었다.
“너 꼭 이 시간에 밥을 먹어야겠어?”
지한은 뻔뻔하게 손목을 움직였다.
“그럼 언제 먹지?”
할 말이 없어진다. 소현 혼자만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 거지, 지한에겐 그럴 이유가 없었다. 지한은 다른 집게로 알맞게 조리된 고깃덩어리를 소현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고기를 먹어.”
“알았어, 내가 해.”
자연스러운 지한의 행동에 정신이 다시 혼미해졌다. 둘의 사이가 이상하게 비치진 않을까. 소현은 이곳저곳 분산된 팀원들의 눈치를 보는 대신 서둘러 자리로 돌아갔다. 의자에 앉아 지한의 동태를 살폈다.
와서 아는 척할 줄 알았건만, 지한은 여유롭게 음식을 담고서는 제 자리로 갔다. 지한을 바라보는 소현의 시야를 가리며 미연이 착석했다.
“어제 찾아봤는데 여기 조식 맛있대요. 특히 베이커리요.”
다행히도 미연의 등 뒤로 지한이 앉아 있었다.
“먼저 먹어요.”
“네.”
여유를 가장한 소현의 미소가 힘없이 풀렸다. 턱을 괸 채 저를 쳐다보는 시선 때문이었다. 소현을 주시하며 음식을 씹는 지한의 모습이 어제의 장면을 연상케 했다. 살결을 탐미했던 입술로 음식물이 들어갔고 느린 턱짓에 으깨졌다. 순간 소현의 허벅지 안쪽이 움찔거렸다. 저 입술이 남겨 놓은 자국들이 꽤 여러 개였다. 보이지 않는 부분에 남기라고 했더니 민감한 부위에 성질을 부려 놓은 것이다.
“그거 가지고 되겠어?”
자리에 앉은 팀장이 소현의 빈약한 접시를 보며 한마디 했다.
“먹고 또 먹으려고요.”
“나는 깔아 놓고 먹어야 안정이 되더라.”
소현은 제 옆자리에 앉은 팀장의 접시를 보았다. 두 개의 접시 한가득 음식이 담겨 있었다. 미연은 그걸 보며 식단 관리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했다. 팀장의 아내가 요즘 뱃살을 가지고 잔소리를 한다며 말한 게 며칠 되지 않았다. 팀장은 제 나름대로 이유를 꺼냈다.
“이거 다 술 때문이야.”
“그러지 말고 관리하세요, 아내분도 걱정돼서 하는 말일 텐데……요즘 분위기 냉랭하다고 하셨잖아요. 관리하면 신혼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까요.”
그때 팀장이 의자에 기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운동한다고 저렇게 되겠어? 안 되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도 현명한 거지.”
그 말에 소현의 시선이 빠르게 올라왔다.
“누구요?”
“저기, 저 남자.”
팀장이 보고 있는 건 지한이었다. 불안감이 소현의 심장을 거세게 두들겼다. 팀원들의 시선이 연달아 그곳으로 향했다.
“와, 저건……팀장님 다시 태어나셔야 되겠는데요.”
“어디요?”
미연의 고개가 돌아간 건 막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소현은 간이 콩알만 해졌다. 미연이 멍하니 입을 벌리더니 말했다.
“어, 저 남자…….”
“미연 씨 누군지 알고 있어?”
“무슨 배우인가 봐요?”
“아뇨. 그…….”
미연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소현을 쳐다보았다.
“과장님, 아는 동생분……아니에요?”
“뭐? 아는 사람?”
팀장이 엄청난 사실을 안 것처럼 반응했다.
“그런데 왜 저기 있어?”
삽시간에 테이블 위가 정적으로 휩싸였다. 소현은 제게 집중된 시선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목 뒤에 말이 박혀 나오질 않는다. 뭐라고 해야 하지. 워크숍까지 애인을 데려온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싶진 않았다. 소현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쟤가 왜 저기 있지……?”
목소리는 차분하지 못했다. 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회사에 찾아왔었잖아요. 무슨 우연이에요? 세상에, 어떡해.”
미연은 경직된 소현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지 제가 더 호들갑이었다. 붉게 달아오르는 홍조는 운명의 상대를 만난 여자 같았다. 소현이 우연처럼 말했으니 미연 역시 우연으로 두 번을 만난 거였다.
“강 과장 아는 사람이면 불러서 같이 먹지?”
소현의 입안이 삽시간에 퍼석해졌다. 팀장은 다이어트를 자극해 줄 대상으로 지한을 저격했는지 환심 이상의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소현이 입술 끝을 정교하게 찍어 내렸다.
“잠시만요. 얘기 해보고 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지한에게 다가갔다. 부드러운 턱짓을 이어나가던 지한은 제게 향한 관심과 시선들을 받아 주고 있었다. 여유로운 식사에 어울리는 태연함이었다. 소현은 테이블을 짚으며 지한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최대한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밥 다 먹었니?”
“아직.”
“룸서비스로 먹는 게 어때. 지금은 방으로 올라가고.”
지한 때문에 난처해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도 합석을 원하는 눈빛들이 발사돼 소현의 등으로 꽂히고 있었다. 지한은 잡고 있던 포크를 느슨하게 쥐었다.
“오늘 밤에 너 오면 가고.”
이런 때에 협상이라니. 소현은 숨죽여 말했다.
“상황 봐서 그렇게 할게.”
“몇 시에 쉬는데.”
“저녁 8시.”
계산하듯 지한은 말이 없었다. 바싹 속이 탔다.
“안녕하세요.”
그때 소현의 옆으로 형체가 다가왔다.
“과장님 아는 동생분이시죠?”
미연은 팀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서 온 건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온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지한에게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소현은 가까이 붙였던 허리를 세우지도 않은 채 그런 미연을 쳐다보았다. 빨갛게 물든 두 뺨이 소현의 눈에 껄끄럽게 박혀 왔다.
“저희 팀원들이 과장님하고 친분 있으시면 같이 합석하자고 하는데, 괜찮으세요? 특히 팀장님이 얘기 좀 나눠 보고 싶다고…….”
지한은 말없이 소현을 응시했다. 시선에서 소외된 미연이 멋쩍은 듯 말했다.
“불편하시면 거절하셔도 되지만 마침 혼자 계셔서요. 많이 부담스러울까요?”
미연은 금방이라도 접시를 대신 들고 옮길 만큼 적극적으로 지한에게 다가갔다.
“가서 앉기만 하세요. 네?”
이런 것에 흔들리지 않을 지한이라는 걸 안다. 지금도 제 입술만 주시하고 있었다. 소현은 크게 한숨을 뱉었다.
“미연 씨.”
“네?”
“내 애인이야.”
미연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놀라 균열이 간 표정을 보며 소현이 낮게 속삭였다.
“가서 앉아 있어.”
“아……그……네.”
입을 뻐끔거리던 미연이 몸을 뒤로 빼며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