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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을 수 없는 나쁜 짓 (73)화 (73/86)

73. 외전 2

이른 아침, 깨끗하게 말린 햇살이 거대한 유리 돔을 감쌌다. 온실 안을 빼곡히 채운 식물들이 녹음을 자랑하며 싱그러움을 뽐내었다.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이 보석처럼 빛나는 풍경 한가운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노인은 푹 익힌 갈비찜을 입에 넣지도 않고 젓가락에 끼운 채 흐뭇하게 웃었다.

“입에는 맞으냐?”

“네. 할아버님, 무척 맛있어요.”

소현의 한마디에 배가 부른 것처럼 노인은 풍족한 미소를 유지했다.

노인은 저녁보다 아침을 더 선호했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생기를 찾아가는 식물의 기운을 온몸으로 맞는 것을 즐겼다.

그에 비해 지한과 소현은 달이 뜨는 밤이 천성인 사람들이다. 그나마 소현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옆에 있는 지한은 눈빛부터 삐딱했다. 불순하게 이 시간에 불러낸 노인을 응시하면서 테이블 아래로는 소현의 허벅지를 더듬으며 이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는 중이었다.

“이건 제비집으로 만든 거다. 몸에 아주 좋은 거니 먹어 보거라.”

“그럴게요. 지한아, 몸에 좋다니까 너도 먹어.”

그만 좀 만지고 식사하라는 뜻이었다. 지한은 시큰둥하게 테이블 위로 펼쳐진 음식들을 보았다. 곧 별 볼 일 없다는 듯 지한은 소현에게 시선을 박았다.

“난 지금 잘 먹고 있어서.”

자신은 지금 손으로 식사하는 중이라 저딴 건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 부드러운 육질을 씹는 것처럼 연한 살결을 주무르고 치마 안으로 손을 넣어 살결의 떨림도 음미했다.

“할아버님은 정말 미식가가 확실해요.”

“그러냐?”

“네. 미식가는 후각과 시각, 그리고 미각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해요. 이렇게 공기가 좋은 온실 안에서 예쁜 접시에 정갈하게 담긴 음식, 그리고 아주머니의 손맛까지. 삼 요소가 너무 잘 어우러진걸요.”

더 감칠맛 나는 건 이런 지한의 행위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소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할아버님과 마주 보며 대화도 나눌 수 있고요. 돈 주고는 못 누릴 호사죠.”

언변과 버무려진 눈웃음에 노인의 애간장도 허물어졌다.

“소현이 넌 어쩜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하느냐. 딸자식이 부럽지 않다.”

그 덕분에 테이블 아래에서 음탕한 짓을 해도 노인은 까마득히 알지 못했다. 지한은 편히 살결을 주물거리며 우아하게 긴 목선을 보았다.

저곳으로 끈적하게 머리카락이 달라붙을 만큼 아침부터 침대에서 땀을 진탕 흘렸었다. 제 밑에서 신음하며 흔들리는 얼굴을 입술로 기어 다니며 빠짐없이 핥아주었다. 떨리는 눈가에 입 맞춰주니 제 목을 끌어안으며 더 해달라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고막을 적셨다.

생각하니 또 꼴리는 기분이라, 지한은 뜨겁게 소현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거기에 반응하지 않으며 소현이 제비집 수프를 떠먹었다.

“할아버님, 오늘 식사하고……욱.”

그 순간 소현이 작게 헛구역질을 했다. 서둘러 입을 가린 소현이 눈으로 웃어 보였지만 연이어 올라온 구역감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났다.

“잠시, 화장실 좀…….”

지한은 황량하게 버려진 제 손을 느릿하게 접었다. 이대로 일어나서 집에 돌아가면 딱일 거다. 지한이 무의미하게 펼쳐둔 냅킨을 치웠다.

“네 녀석…….”

눈썹을 까딱인 지한이 시선을 들었다. 노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뭘.”

“……기어코.”

지한은 덤덤한 표정으로 노인을 보았다. 노인의 안색이 카멜레온처럼 환해졌다가 어둑해졌다가 또 밝아졌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지켜보던 지한에게 노인이 물었다.

“언제부터냐.”

노인의 눈빛이 사뭇 심각해졌다.

“이 녀석이 대체……체력이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빨리, 언제인지 어서 말해 봐.”

언제부터라니. 소현과 처음 섹스한 기억을 더듬다가 포기하고 말했다.

“오늘 아침에도 하고 왔는데.”

“뭐야?”

손주가 적나라하게 꺼낸 성생활에 노인은 노발대발했다.

“어디 임신한 여자를 건드리느냐, 그러다가 잘못되면 어쩌려고!”

지한은 삐뚜름하게 눈썹을 구겼다.

“임신?”

“그래, 감히 할애비를 속이려고 하다니. 이런 문제는 재깍재깍 말을 해야……아니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혼란스럽던 노인은 이윽고 냉철하게 물었다.

“몇 주야, 얼마나 됐느냐?”

빈 의자 등받이로 팔을 걸친 지한이 낮게 읊조렸다.

“우리 집에 쌓인 콘돔 박스가 몇 갠데. 할아버지 잘못 짚었어.”

“뭐야……?”

노인은 도둑맞은 사람처럼 황망한 얼굴이 되었다. 텅 빈 동공을 보며 지한이 혀를 느리게 굴렸다.

“어제 술을 좀 마셨지.”

금요일 밤이라고 과음하고 돌아온 소현을 기다렸다는 듯이 먹어 치우고, 또 아침까지 괴롭혔다.

너 때문에 움직였더니 울렁거린다고 그때부터 속이 안 좋다고 했었다. 그래서 지한은 책임감을 가지고 노인과 약속했던 오늘 조찬을 없앨 예정이었다. 소현이 그 말에 기함하며 일주일 전부터 한 약속을 어떻게 취소하냐며 기를 쓰고 온 거였다.

“임신이 아니야……?”

실망감이 역력한 노인의 얼굴로 지한이 냉정한 말을 쑤셨다.

“난 그런 실수 안 해.”

“왜 안 하느냐?”

지한의 눈가가 매서워졌다.

“지금 나보고 애 가지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

시선이 진해지자 노인이 딴청을 부리듯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흠, 실수로 생기면 이참에 둘이 결혼도 하는 거지.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다들 늦게 한다지만 나는 옛날 사람이라 빨리하는 게 좋다. 네 삼촌이나 네 어미도 다 빨리했어.”

“…….”

“소현이 정도면 신붓감으로 손색없지. 어느 누가 너를 감당하느냐? 그리고 네 마음에 쏙 드는 여자 지구 한 바퀴 돌아도 만나기 어려울 게다.”

지한은 그 말을 되새김질했다. 지구 한 바퀴라, 확실히 지금처럼 제가 먼저 환장해 한 여자를 오래 만나는 것도 처음이었고 애인으로 제 곁에 묶어둔 것도 처음이었다. 손가락을 까딱이던 지한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졌다. 반지를 하는 것도 처음.

“네가 애인이라고 소개한 것도 소현이가 처음 아니더냐.”

가만 보면 소현과 하는 짓들은 다 앞에 처음이라는 글자가 붙는다.

“너희 결혼 생각 없느냐?”

노인이 진지하게 물었다. 처음 제가 찾아갔을 때 6개월만 만나본다고 했던 당돌한 여자였다. 그 이후에 헤어지든, 말든 결정하겠다고. 아직 그 기간이 찾아오지 않았기에 노인은 하루하루 걱정으로 메말라갔다.

“생각 안 해봤는데.”

혹시나 그 이후로 소현이 지한과 헤어질까 봐. 그래서 노인은 시간이 날 때면 소현과 만나 차 한잔이나 식사를 하곤 했다. 잘 먹이고 제 딸아이 마냥 예뻐하면서. 지한과 계속 만나달라는 염원이 담긴 행동이었다.

“그러다 웬 남자라도 끼어들면 어쩌려고 그러냐.”

“내가 그렇게 안 두지.”

은회색 눈동자엔 확신이 아닌 살기가 꿈틀거렸다. 노인은 평소 저 자신감을 크게 대성할 놈이라고 여겼지만 이번만큼은 얘기가 달랐다.

“사람 인생 아무도 모르는 게야, 이건 오래 살아본 할애비 말을 들어라. 내 여자다 싶은 사람은 얼른 옆에 붙여놔야 해.”

“지금도 충분히 그러고 있어.”

주름진 눈꺼풀이 가느다래졌다. 요즘 지한은 잠도 잘 자고, 안색도 전보다 좋아진 데다가 입맛도 한국식으로 변했다. 박 비서의 말에 의하면 요즘 회사에 착실하게 출근하며 틈틈이 요리 학원에 다닌다고 했었다.

전부 소현과 만나면서 일어난 변화들이었다. 잘만 하면 지한을 한국에 아예 눌러앉게 할 수 있는 카드가 소현이니, 이참에 아이라도 가져 결혼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럼 싸우기라도 하면, 응? 소현이가 헤어지자고 하면 깨끗하게 그만둘 게야?”

“할아버지.”

“왜?”

지한은 기분 더럽다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꺼내면 안 될 소리를 자꾸 하네.”

“그러니까 말이다. 잘 만나고 있으니 결혼도 해버리면 되질 않느냐?”

뻐근하게 목을 젖힌 지한은 햇살이 고인 유리 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결혼이란 지한의 머릿속에 없는 단어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제멋대로 살아온 터라 평생을 함께할 누군가를 떠올려본 적 없었다.

“소현이가 곧 서른둘이니, 딱 적령기지. 지금이 딱이다.”

“…….”

그런 제게 지금은 소현이 전부였다. 그리고 소현은 연애를 시작하는 데도 공을 들인 여자였다. 지한의 입술이 단박에 굳었다. 지금도 천천히 소현의 안에 저를 밀어 넣는 중인데 결혼이라니.

“괜히 초 치지 말고.”

지한은 턱을 끌어당기며 갈 채비를 했다.

“입단속 잘 해.”

마음이 조급해진 노인이 급하게 말했다.

“결혼하면 헤어지는 것도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그 말에 건조하던 지한의 얼굴로 섬광이 스쳤다.

“왜?”

“법적으로 엮이는 건데 연애할 때처럼 가벼운 줄 아느냐. 이혼 절차만 해도 얼마나 까다로운지, 거기다 기록도 남아서 신중해지지. 사귀다가 헤어지면 그만일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

한참을 모른다는 듯 노인이 혀를 쯧쯧 찼다. 무심하던 은회색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건 좀 꼴리는데.”

“그렇지?”

“저기, 죄송해요. 제가 속이 좀 불편했나 봐요.”

때마침 테이블로 소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과 지한은 입을 싹 다문 채 조금 전 일을 함구했다. 눈치가 빠른 소현은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더니, 남자들끼리 무슨 재미있는 얘기했나 봐요?”

“아니, 얘기는 무슨.”

“할아버지, 나 가.”

“그래그래, 그만 가보거라. 소현이도 속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응?”

“아……식사를 덜 했는데요.”

“내 그럴 줄 알고 이미 오늘 밥상에 올리는 거 전부 따로 포장해 두라고 했다. 가져가면 돼.”

“할아버님, 매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야. 주말인데 푹 쉬거라.”

소현은 눈가를 찌푸리며 제 어깨를 끌어당겨 걸어가는 지한을 보았다.

“나 술 마셨다는 소리 했니?”

“안 했어.”

“한 거 같은데?”

“맞아. 했어.”

소현이 지한의 허리를 감싸며 꽉 움켜쥐었다. 그래 봤자 근육뿐이라 꼬집는 맛도 안 났다. 지한이 보복하듯 소현의 귀를 깨물었다.

“할퀴지 마. 간지러워.”

귓바퀴를 아프지 않게 잘근거리자 뜨거운 숨결이 눌어붙었다. 소현은 문득 식사 내내 지한이 지분거렸던 부위가 화끈거렸다.

온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와 만난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게워냈더니 속 쓰리네.”

힘들게 쏟아냈는지 새하얀 입김이 뭉개지듯 고단함을 뱉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한은 소현의 턱을 잡아 혹사당했을 입술을 빨아 당겼다. 혀를 섞자 상쾌한 맛이 느껴졌다. 지한은 눈썹을 구기며 나직이 말했다.

“상큼한데.”

“당연히 가글 했지. 가방에 늘 가지고 다니는 거 몰라?”

소현은 이토록 철두철미했다. 속 안에 있는 걸 전부 게워내도 흔적을 남기지도, 티도 내지 않는다. 지한은 문득 갈증을 느꼈다. 한 가지 문제와 직면했기 때문이다.

“더럽게, 지금은 키스하지 마.”

이런 여자가 나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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