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74)화 (74/86)

74.

*

“뭐, 입덧?”

엎드려 있던 소현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지한이 크게 숨을 내쉬자 소현의 상체가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아, 웃겨.”

침대에 누운 지한은 제 위로 여왕처럼 군림한 소현을 쳐다보았다. 소현이 기획안을 들고 침대로 오면 지한은 일자로 누워 제 몸을 내주었다. 그럼 지금처럼 소현은 근육이 쪼개진 몸으로 엎드린 채 넓은 가슴팍을 받침대 삼아 기획안을 읽곤 했다.

“하긴, 갑자기 먹다가 헛구역질했으니 오해하실 만했네.”

체온이 느껴지는 책상 같다며 소현은 이 자세를 좋아했다. 지한 역시 한낱 받침대로 취급되는 것에 불만은 없었다. 무겁지도 않았고, 집중한 소현의 얼굴도 맘껏 감상할 수 있다. 거기다 손으로 허리와 등을 더듬고 만질 수 있으니 싫을 리가.

소현은 단단한 어깨 위로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괴었다.

“아이라니…….”

종이에 새겨진 글자를 읽어내려가는 눈동자가 나른하다.

“만약 내가 아이 가지면 너 어떡할래?”

“책임져야지.”

정지한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참 어울리지 않는다. 애는 무슨, 평생 연애만 하고 자유로운 영혼처럼 지내는게 지한에겐 옷처럼 잘 맞았다.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사회에서 위로 올라가려고 전투 중인 소현에게 아이는 걸림돌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일보다 좋은 것이 생겼다.

“네가 책임진다는 소리도 할 줄 알아?”

소현은 새삼 일보다 더 좋은 남자가 생겼다는 것이 신기해 종이를 옆으로 치우고 지한을 빤히 보았다. 그 눈을 마주 보던 지한이 끈적하게 말했다.

“책임지고 싶어지는 얼굴인데 왜.”

낮은 목소리에 소현의 가슴이 뭉개졌다.

우리가 아이를 가지면 분명히 이 얼굴과 닮은 부분도 있겠지. 그렇다면 눈동자는 어떤 색일까.

소현은 기획안을 읽는 것도 잊은 채 지한의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눈매가 차갑고 매서운 편이지만 내리감으면 포근하다. 속눈썹도 길고 풍성했다. 부드러운 감촉을 쓸어내리며 콧대로 내려왔다. 높다 못해 날카로운 뼈대였다.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손끝이 도톰한 입술에 닿았다.

지한은 눈꺼풀을 내려감았다. 느리게 벌어진 입술이 소현의 손가락 하나를 잡아채 점막으로 파묻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혀가 미끈하게 살결을 스쳤다. 애무하듯 움직임이 점차 진해졌다. 목울대로 힘을 줘 빨아당기자 손가락의 피가 멎는 기분이었다.

유들유들한 점막이 빨판처럼 달라붙었다. 아찔한 기분에 소현은 뜨거운 숨을 뱉었다.

“하아……그만 조여, 손가락 잘리겠어.”

“…….”

지한은 빠듯하게 조이던 입술을 풀며 부드럽게 턱을 벌렸다. 안에서 괴롭히던 빨간 혀가 외부로 노출되며 긴 손가락을 탐스럽게 핥았다. 그 장면이 무척 외설적이라 소현은 심장이 빨리 뛰었다.

열이 몰려 세워진 심지를 애무하는 것처럼. 손톱 끝으로 올라온 혀가 갈라진 틈을 찌르듯이 뭉갰다.

“아읏…….”

신음이 터지자 마찰하는 혀 위로 숨결이 고였다. 지한은 소현을 주시하던 시선을 내리깔며 손바닥으로 혀를 미끄러뜨렸다. 손목까지 내려온 입술이 밀착되며 살며시 깨물었다. 긁히는 느낌에 소현이 움찔하자 커다란 손이 종이를 잡아 뺐다. 뛰는 맥박 위로 거친 숨결이 참을성 없이 속삭였다.

“올라와.”

아이 얘기를 해서 그런가.

“나도 네 안에 넣고 조여줘.”

왜 이렇게 오늘따라 지한이 야하게 느껴지는지 소현은 알 수 없었다. 지한이 엉덩이를 덮은 슬립을 들추기도 전에 소현이 먼저 무릎을 세워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지한의 눈썹이 옅게 구겨졌다. 느리게 문지르자 부피를 키운 형태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뭉근하게 비볐다. 거기에 흐트러지는 표정이 일품이었다. 우리 안에 꼼짝없이 갇힌 짐승 같아 소현이 웃으며 속삭였다.

“하게 해달라고 빌어 봐.”

회색 눈동자가 질퍽한 빛을 냈다.

“하게 해줘.”

소현은 무릎을 더욱 밀착했다.

“나는 분명히 빌라고 했는데, 예의 없게 요구하는 걸 보니 해줄 마음이 사라지는데?”

눈썹을 구긴 지한이 소현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고 침대로 눕혔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힌 소현이 어깨를 잡았다.

“아윽, 너 힘으로 밀어…….”

“입술로 빨아줘.”

지한은 저자세로 허리를 낮추며 소현의 입술을 엄지로 벌렸다. 뜨거운 입술로 혼내달라는 듯이 집어삼키는 힘이 거셌다. 안을 더 넓히는 손가락 때문에 셋이서 키스하는 기분이었다. 점막이 헤집어지고 마찰하던 사이, 슬립 안으로 입고 있던 속옷이 흘러내려 갔다. 소현은 이성의 끈이 잘리기 전에 헐떡이며 말했다.

“콘돔은?”

“낄게.”

대충 답하기에 소현이 지한의 손을 잡았다.

“너, 확실하게 해.”

지한이 소현의 관자놀이를 핥더니 낮게 뇌까렸다.

“아래나 빨아.”

*

알코올 때문에 속도 안 좋고, 섹스도 기력이 달릴 만큼 했으니 뻗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한은 기절하다시피 잠든 소현을 두고 침실 문을 닫았다. 냉장고를 열자 본가에서 챙겨준 반찬 통이 여럿이었다. 그 밖에 소현이 집에 없을 때 사놓았던 채소가 몇 가지 남아 있었다. 드레스 룸에서 칼집을 꺼내든 지한은 주방 개수대 앞에 섰다.

화나거나 뭔가 생각이 막혔을 때 지금처럼 요리를 하면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요즘 지한 역시 회사에 출퇴근하는 처지라 주말이 아니면 이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CFO로 회사 내에서 재무를 맡은 지한은 개인 비서까지 두고 요즘 업무에 뛰어들었다. 더는 한량처럼 주어진 것을 누리기만 하며 살 수 없었다.

한국에 있으려면 뭐든 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전부 소현인데, 오늘 노인한테 들은 말 때문인지 지한은 머리가 묵직했다.

지금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했다. 천천히 소현의 안에 자신을 밀어 넣는 과정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뤄지고 있었고, 소현도 제게 익숙해진 상태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단어를 직접 들으니 예상치 못하게 욕심이라는 게 싹텄다. 노인의 말대로 소현이 만약 제게 질리거나 갑자기 말다툼이라도 나서 이별을 고한다면. 양파를 손질하던 지한은 맨질맨질한 표면을 내려다보았다.

“시발.”

생각만 했는데 기분이 삽시간에 더러워진다. 물론 소현과 싸운다면 바닥까지 길 각오는 되어 있다. 문제는 소현의 변심이었다. 원만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도 제 기준일 뿐이지, 소현의 속마음까지 까서 볼 수가 없었다.

불안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소현을 보면 볼수록, 몸을 섞으면 섞을수록 행복에 겨워 죽으면서도 이 시간이 끊어질까 두렵기도 했다. 처음이라서. 처음이라, 이 관계에 어떤 돌발적인 경우의 수가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결혼을 한다면 적어도 불안감은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을 거다.

그래서 노인이 했던 말을 흘려보았는데, 소현의 반응은 역시나 미적지근했다. 회사를 터 삼아 매일매일 사냥을 나서는 여자에게 육아와 결혼은 기피하고 싶은 사안일지도 모른다.

지한은 개수대를 짚은 손을 떼어내며 다시 칼을 잡았다. 날이 선 감각을 죽이듯 손에서 힘을 빼고 섬세하게 채소를 다듬었다.

그렇다면 내가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소현이 걱정하는 무엇이든, 제가 다 감수하면 되지 않을까. 지한은 소현이라면 뭐든 해줄 수 있었다. 해줘도 아깝지 않고.

“일어나.”

“으응…….”

피곤해 눈을 뜨지 못하고 찡그리는 얼굴이 예쁘다. 지한은 소현의 입술 점을 검지로 쓸었다.

“밥 먹어.”

이거에 빠져서 지금…….

허기가 느껴졌는지 소현이 그 말 한마디에 눈꺼풀을 게슴츠레 들어 올렸다. 건조한 공기에 퍽퍽해진 눈꺼풀이 다시 내려앉자 지한은 제 입술로 더듬으며 촉촉하게 만들어줬다. 한참의 입맞춤 끝에 소현은 주방으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병을 꺼내던 소현의 눈이 일그러졌다.

“뭐야, 아침에 할아버님 댁에서 가져온 음식 다 어디 갔어?”

“누구 줬어.”

“뭐? 그 귀한 걸 대체 누구한테 줘?”

소현이 예민하게 눈을 치켜떴다.

“먹어.”

달그락, 식탁 위에 놓인 접시로 소현의 시선이 고정됐다. 물병 뚜껑을 사납게 돌려 딴 소현이 식탁에 앉았다.

“이건 뭐니?”

“오므라이스.”

“이게 오므라이스라는 건 나도 눈이 있어서 알아.”

“너 좋아하는 곳에서 사 온 거야.”

“……정말?”

소현은 언제 화가 났냐는 식으로 지한이 내려놓은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포슬포슬한 노란 표면 반으로 가르자 안에서 양파와 당근, 피망이 뒤섞인 밥이 보였다. 비주얼은 평범한데. 한입 푹 떠먹은 소현은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한참의 턱짓 끝에 감격으로 녹아내리는 목소리가 흘렀다.

“……맛있어.”

맛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적당하게 익은 채소는 숨이 완전히 죽지 않아 식감이 뛰어났고, 풍미도 진했다. 밥알엔 미끄러운 윤기가 흐르다 못해 입안에 들어가서도 알알이 살아났다. 소현은 누구에게 음식을 준 건지 추궁하는 일도 까마득하게 잊은 채 또 한 입을 떠먹었다.

“여긴 도시락 메뉴가 많나 봐. 네가 사 올 때마다 종류가 다 다르고, 아. 혹시 네가 특별 오더라도 넣는 거야?”

지한은 식탁을 짚고 입술 점의 율동감을 뚫어지게 관찰했다.

“맛있어?”

“응. 솔직히 말하자면 할아버님 댁에 계신 아주머니보다 이게 더 내 입맛엔 맞아.”

간도 세지 않고, 마치 소현의 식성을 저격해 맞춤으로 요리한 것만 같았다. 이럴 때마다 소현의 끈기 있는 기질이 발휘되었다.

“네가 피곤하게 매번 가서 사 올 필요 없이 나한테 위치 알려주면 좋잖아. 왜 안 알려주는 건데?”

지한은 맞은편에 앉으며 양손을 깍지 꼈다. 평생 물 한 방울 묻혀보지 않은 고결한 손가락에는 색이 닳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거기 주방장이 좀 비싸.”

“하루에 손님 수 한정해서 받는 가게야?”

“어. 내킬 때만 문 열고 손님이 마음에 안 들면 쫓아낼 정도로 까다롭지.”

“그런 곳이면 내가 가도 안 판다는 소리겠네?”

풀어진 지한의 눈동자가 진지하게 소현을 주시했다.

“너한테는 팔 거야. 예쁜 거에 약하거든.”

프라이드가 강한 요리사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탐미주의자인 걸까? 아름다움이 전부인 사람들 말이다. 소현은 알 수 없다는 듯 눈가를 구겼다가 이내 풍요롭게 살아난 미각에 감탄했다.

“이런 음식을 만들 정도면 성격 괴팍한 것도, 가격을 얼마를 부르든 다 받아 줄 수 있을 거 같긴 해. 아무리 먹어도 안 질려.”

“그 마음 변하지 마.”

소현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질려 할 사람이 어디 있어? 오히려 더 먹고 싶은데.”

지한의 눈빛이 달라진 것도 그 말 한마디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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