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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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중은 비상이 걸렸다. 요리 강의 세미나 이후 뒤풀이에 가던 도중 문자 한 통을 받고 부리나케 요리 학원으로 가기 위해 핸들을 잡았다.
8시 강남대로는 최악이었다. 철중은 차가 막힌다는 문자를 남자에게 여섯 통이나 보내고 나서야 학원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세미나 때문에 휴강했던 것이 무색하게 한 사람만을 위한 요리 수업을 진행하려 철중이 안으로 들어갔다. 밀려오는 어둠에 다급했던 눈동자가 흐트러졌다.
“학원이라고 하셨는데……아직 안 오셨나?”
철중은 어두컴컴한 내부에 전원을 켜자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아! 놀래라!”
소파에 기대어 있는 남자를 보고서 철중은 주저앉을 뻔했다. 뒤늦게 너무 주접스럽진 않았을까 민망해졌다.
“아니, 오셨으면 불이라도 켜고 계시지…….”
소파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남자는 말이 없었다. 제 양손을 만지작거리는데, 그 손이 마치 칼끼리 서로 부딪치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오늘도 영혼의 단짝인 칼집은 소파 옆으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철중은 말을 무시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내성이 생긴 건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오늘 회사에선 별일 없으셨나요?”
오전에 진행하던 수업은 남자가 회사를 출근하게 되면서 저녁으로 미뤄졌다. 아침잠이 많은 철중에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난관이 철중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하, 갑자기 연락을 주셔서……제가 오늘은 다른 일정이 있어서 오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바로 저녁 시간으로 옮겨진 남자의 요리 수업이 불규칙했기 때문이었다. 8시 월수목으로 시간과 요일을 정해두었지만 오늘은 금요일 저녁 9시였다. 어떤 날엔 요리 도중 전화 한 통을 받고 요리를 중단하기도 했다.
철중이 추측하기엔 그건 남자의 동거인이었다. 요리하던 남자의 핸드폰을 평소처럼 주머니에서 빼주면서 보았던 발신자엔 ‘소현이’ 라고 저장돼 있었다. 단조로운 글자였지만 관계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그 전화 한 통에 남자가 하던 것도 다 팽개치고 1분도 안 돼 달려나갔으니까.
“오늘은 어떤 요리를 하고 싶습니까? 수강생분이 이젠 웬만한 건 다 해서, 이젠 슬슬 퓨전으로 방향을 트는 건 어떻…….”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철중의 동공이 뒤흔들렸다. 선생님, 선생님, 그 단어가 철중의 귀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남자의 입에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님이라니, 마치 자신을 존경하는 학생처럼 높임말을 사용하다니. 남자가 드디어 저를 스승으로 인정해준 것만 같아 철중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감동에 물든 입술이 힘차게 열렸다.
“네. 수강생님.”
“오늘 요리는 중요합니다.”
“저는 언제나 요리에 정성을 담습니다.”
“정성만으로 안 되고.”
철중은 차가운 남자의 얼굴에 잠시 말을 잃었다. 방탕하고 문란해 보였던 은회색 빛 눈동자가 오늘따라 차분하고 엄숙했다.
“다짐부터 받고 시작하죠. 할 수 있어요?”
마치 큰 결전을 앞둔 것처럼.
“그럼, 각서……를 쓸까요?”
분위기에 휩쓸린 철중이 말했다. 남자가 크게 숨을 내몰아 쉬며 일어났다.
“8가지 반찬에, 메인으로 삼을 요리는 두 가지. 한식 위주로.”
철중은 넓은 포복으로 제게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모두 12시 안에 끝내야 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못한다고 말하면 안 될 것만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남자가 선생님이라고 불러줬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바로 요리사다. 철중은 힘차게 답했다.
“그럼요, 지금 당장 상차림 리스트를 짜보겠습니다.”
“좋아요.”
“무슨 일 때문에 갑자기 이렇게 많은 음식이 필요한지 모르겠으나, 제가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의지를 불태우는 철중을 보며 남자가 나직이 말했다.
“목숨까지 걸어요.”
“……네?”
철중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제 목까지 걸어야 할 일인가? 지금까지 달려온 화려한 수상 경력과 근무 이력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남자는 칼집을 든 채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다 걸 테니까.”
*
소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술을 조금만 마시며 3차로 넘어가기 전에 빠져나왔다. 그래 봤자 벌써 새벽 1시 30분이었지만.
금요일 저녁에, 민준을 모델로 한 KOL 화장품 광고 촬영까지 무사히 끝난 후라 이 정도 시간에 발을 뺄 수 있다는 걸 감사히 여겨야 했다.
“기사님, 여기서 세워주세요.”
값을 지불하고 인사와 함께 택시에서 내린 소현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둘 다 출근을 해서 그런가. 지한도 쉬는 주말이 소현에게 유독 단비 같았다.
지한은 요즘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소현을 회사에 데려다주고 자신의 회사로 출근하는 루트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착실하게 가방까지 들고 말이다. 하지만 항상 노타이로 출근했다. 정장이 아닌 슬랙스를 입기도 했고, 저번에는 맞춤 슈트에 발목 위까지 오는 첼시 부츠를 신는 무자비함까지 보여주었다.
한 번은 그런 차림으로 가도 되느냐고 물은 적 있었는데 왜 안 되냐고 태연하게 말해 소현의 얼을 빼놓은 적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데 뭐가 문제냐고.
“그건 그거대로 보는 맛이 있지.”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정해진 규칙대로 얌전히 생활하는 지한에게 그것이 일탈일 지도 모른다.
“얼른 가서 예뻐해 줘야지.”
깜짝 등장으로 놀래주려고 술자리에서 빨리 나왔음에도 지한에게 말하지 않았다. 소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지한아.”
대형견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나와도 모자랄 판에, 아무런 대답이 없다.
“못 들었나.”
집이 넓으면 이래서 불편했다. 소현은 구두를 벗고 긴 복도를 걸어갔다. 거실에 있을 줄 알았는데 소파도 텅 비어 있었다. 소현이 핸드백을 바닥에 내려둔 채 머리카락을 끈으로 묶었다. 재킷을 벗으며 지한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보다 먼저 후각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몰려왔다.
출처는 주방이었다. 이끌리듯 걷던 소현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이게 다 뭐야?”
식탁 위로 한 상이 크게 차려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반찬과 매콤한 해물탕과 갈치 무조림, 손이 많이 간다는 구절판에 푸짐한 잡곡밥까지. 소현이 세세하게 스캔하는 동안 지한이 걸어왔다.
“너 오늘 광고 촬영했다며.”
“어? 어…….”
“끝났으니 기분 좋게 해주려고.”
그릇을 하나 더 내려놓자 채 썬 당근과 버무려진 버섯볶음이 반질반질한 윤기를 흘려댔다. 고개를 든 소현은 아일랜드 식탁 위로 수북이 쌓인 낯익은 포장 용기를 보았다.
“그 식당에서 사 온 거야?”
“어.”
소현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늦은 시간 위장에 밀어 넣는 술도 죄악이라 절대 안주는 입에 대지 않는 소현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차림이라면 죄를 지어야만 했다.
“언제 사 온 건데?”
“방금.”
가만 보니 지한도 이제 막 들어온 것처럼 옷이 아침에 보던 것이었다. 셔츠 소매를 접어 올린 팔뚝 위로 소현은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지한이 곁눈질하자 소현은 화사하게 웃으며 탄력 있는 엉덩이를 두들겼다.
“잘했어, 아유 예뻐. 지한이 덕분에 기분 엄청 좋다.”
지한은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에다가.”
기꺼이 소현은 지한의 입술에 버드 키스를 남겨주었다. 느릿하게 혀가 넘어오기에 얼른 허리를 뒤로 뺐다.
“밥 먹고, 먹고 마저 하자.”
저 축축한 혀가 넘어오면 소현의 이성까지 휘젓는 터라, 침대로 직행하게 될 거였다. 지한은 순순히 허리를 일으켰다.
“그러던가.”
오늘 촬영장에서 민준이 한 말대로 지한도 점점 온순해지는 모양이다. 소현을 만난 후부터 지한이 사람이 되어간다고 했었다.
식탁 의자를 빼내 준 지한이 눈짓했다.
“앉아.”
소현은 찬 기운이 묻어 있는 코트와 재킷을 벗고 의자에 앉았다. 아직 젓가락을 들지도 않았는데 눈으로 뭘 먼저 먹을지 순서를 정하고 있었다.
“밥이 한 그릇이네. 너는?”
“난 아까 먹었어.”
“나랑 같이 먹지…….”
젓가락을 든 소현은 제일 먼저 갈치 무조림을 공략했다. 빨갛고 윤기 나는 살점을 살짝 뜬 다음 입에 넣자 눈매가 스르륵 녹아내렸다.
“아…….”
예상했던 대로 너무 맛있었다. 살점이 짭조름하면서 감칠맛을 돋웠고 양념은 맵지도, 달지도 않은 채 딱 적당했다. 아래에 깔린 무는 알맞게 익었는지 젓가락질 한 번에 각 맞춰 으깨졌다. 입에 넣자 형태가 뭉개지며 배어 있던 황금 비율로 만들어진 양념이 혀로 녹아내렸다.
조개가 입을 쩍 벌리고 꽃게 집게가 해맑게 인사하는 해물탕은 한 숟가락에 근심이 싹 내려갈 정도로 얼큰했다. 바다에 사는 친구들이 영혼을 쏟아부었는지 시원한 육수에서 감동까지 몰려왔다.
반찬의 정갈함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정신없이 젓가락을 움직이던 소현은 밥을 3분에 1 남겨두고 감상을 내뱉었다.
“나는 그동안 스트레스를 운동으로만 풀었거든.”
섹스도 같은 맥락이었다. 땀을 한껏 흘리거나 쾌락의 절정을 찍고 오면 쌓인 노폐물과 고단함이 후련하게 씻겨 내려간 듯했다. 그런데 지금 또 다른 배출구를 찾은 것만 같다.
“이게 음식으로도 해소가 될 줄은 몰랐네. 먹는 순간 너무 행복하니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 하나도 안 나.”
“다행이네.”
“고마워, 이렇게 많이 사 올 정도면 들고 오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소현은 슬그머니 지한을 보았다.
“그 까다로운 요리사한테 네가 직접 부탁했을 거 아니야.”
“…….”
그 말에 지한이 눈썹을 까딱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부탁했으니 한 거지.”
“네가 남한테 그러는 거 힘든 거 아니까 하는 소리잖아. 나 때문에 이 많은 거 준비해달라고 했을 텐데 그분도 힘드셨을 테고. 하루에 테이블도 몇 개 안 받는다며.”
지한은 의자 등받이로 체중을 기대었다.
“너 먹는 거 보니까 괜찮은데.”
요리사를 걱정한 건데 저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한다. 소현에게는 익숙한 화법이라 웃어넘겼다. 한참을 소현의 입술만 쳐다보던 지한이 입을 열었다.
“강소현.”
“응?”
“너 지금 기분 좋다고 했지.”
“말했잖아, 오늘 받은 스트레스 다 날아가는 기분이라고. 엄청 좋아.”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마지막 밥을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던 찰나였다. 지한이 기댄 상체를 앞으로 당기며 낮은 어조로 속삭였다.
“이거 매일 해줄게.”
“뭐? 매일 사다 준…….”
잠시만. 소현의 손이 멈칫했다.
“네가 보는 앞에서.”
……방금 해준다고 했는데.
고개를 들자 은회색 빛 눈동자가 짐승의 것처럼 강렬하게 번들거렸다.
강자가 이빨을 숨길 땐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결혼하자.”
“…….”
거머쥘 나중을 위한 술책이거나, 아니면 정말 그녀의 발밑을 핥고 싶어지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