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76)화 (76/86)

76.

소현은 전신의 피가 멎는 것 같았다. 지한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 연달아 터졌기 때문이었다. 심장도 멈춘 것처럼 고요한 가운데 시계의 초침 소리가 한가롭게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긴 침묵 끝에 소현이 작게 읊조렸다.

“거짓말.”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알맹이 없는 빈 숨만 뱉어내던 소현의 입술이 느려졌다.

“……하지 마. 재미없어.”

“결혼이?”

지한은 폭풍처럼 거센 눈빛으로 소현을 휩쓸었다.

“아니면 요리가?”

둘 다였다. 지금껏 맛있다고 극찬하며 입에 들어갔던 요리가 전부 저 물 한 방울 안 묻혀본 손에서 탄생했다는 것도, 자유로운 영혼이 건넨 결혼이라는 단어도.

그중에서 소현의 머리를 가장 세게 강타한 건 음식이었다. 지금껏 지한은 소현의 식성과 입맛, 그리고 속 안까지 잠식하고 있던 거였다. 매일 침대에서 뒹구는 섹스와는 다른 의미다.

“이걸 네가 정말, 만들었다고?”

“그렇다면.”

“아니, 믿을 수가 없어. 네 음식 실력은 내가 아는…….”

“그게 벌써 몇 달 전이지.”

몇 달 만에 이런 실력이 가능하다고? 소현은 식탁 위에 올려진 지한의 손을 보았다. 전에 보이지 않았던 반지가 눈에 걸렸다.

소현의 것과 같은 날, 같은 일시에 끼운 반지가 눈에 띄게 닳아 있었다. 반지가 색을 잃는 건 흔치 않다. 관리에 소홀하거나, 아니면 수시로 손을 사용했거나.

“설마……나 때문에 배운 거니?”

지한은 놀란 기색이 만연한 얼굴을 시선으로 쓰다듬었다.

“놀라지 마. 내가 널 위해 이뤄낸 건 벌써 여럿이니까.”

소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혼미해졌다. 음식은 그렇다 치고, 결혼은. 일전에 할아버님이 착각했던 입덧 얘기를 할 때만 해도 그런 언급은 일절 없었다.

“너, 연애가 편한 거 아니었어?”

“그랬지.”

과거형이었다.

“네가 평생 죽을 때까지 내 여자로 있어 준다면.”

하지만 뒤따르는 말은 가벼운 연애와는 한참이나 벗어난 것이었다.

“그 방법으로 결혼이 적절해 보이는데 너는 어때.”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지한이 먼저 결혼을 원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을뿐더러, 제가 조금 전에 말한 행복을 볼모로 잡을지 몰랐다.

그에 비해 지한은 겸허했다. 자신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과 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싫지?”

나직한 물음에 소현은 빈 숨만 들이마셨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답을 줘야 할지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 버렸다. 방금 맛있게 먹었던 음식의 맛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잠시……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은…….”

그 잠깐도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나 소현이 앉은 곳까지 다가왔다. 위에서 내려온 그림자와 짙은 체향이 소현을 위로 끌어당겼다. 턱밑으로 들어온 손이 내려가지 못하게 차단한다. 지한은 제게 고정시킨 입술 위로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음식을 먹어 신경 쓰이는 입안으로 혀가 넘어와 핥았다. 노긋한 움직임으로 휩쓸고,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범하면서 빨아 당겼다.

소현의 눈꺼풀이 구겨졌다. 예전에는 흥분하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기 바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한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면서 늘 단정하고 청결한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그런 소현에게 지금처럼 식사 후 뜨거운 키스는 치부가 헐벗기는 기분을 안겨주었다. 뒤로 몸을 빼려고 하자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소현을 막았다.

어김없이 지한은 흥분하고 있었다. 지한에겐 소현이라면 더럽다고 느끼긴커녕 발까지 핥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샤워하지 않은 몸도, 일에 찌든 모습도 모두 입에 넣어 굴리고 싶다는 듯이 바라보던 시선이었다.

“으읍……하……아…….”

블라우스 셔츠 단추를 여는 손이 차분한 척 했지만 빨랐다. 맞붙어 있는 점막이 흥건해진 타액으로 미끄러지며 틈이 벌어졌다.

“대답은 지금 안 해도 돼.”

급하게 숨을 내쉬는 소현의 얼굴을 주시하는 시선이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난 앞으로 들이댈 거고.”

열린 셔츠 안으로 스며드는 감촉에 소현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뒤쪽으로 미끄러져 넘어간 손이 단번에 브래지어 버클을 풀었다. 툭, 맞붙어 있던 고리가 분리되고 입술 앞으로 뜨거운 숨결이 밀려왔다.

“너는 그걸 열심히 막아봐.”

문질러지듯 점막을 뭉개뜨렸다가 혀로 그 지점을 핥았다. 가슴을 움켜잡자 소현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 노출된 혀가 노골적인 움직임으로 소현의 입술선을 건드렸다가 깊게 잠기듯 들어갔다.

다시 시작된 키스는 지독하리만치 독했다. 거칠게 교접이 이어지는 가운데 블라우스와 치마 사이를 파고 들어간 손은 정확히 소현의 예민하고 습한 부분을 건드렸다. 뭉근하게 혀가 엮이며 손의 움직임도 똑같이 눅눅하게 변했다.

소현의 머릿속에서 씻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워질 만큼.

*

지한의 고백은 늘 소현이 예상하지 못한 순간과 방심하던 찰나에 이뤄졌다.

많이 얌전해졌다고,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해진 거라고 자만했지만 착각이었다. 지한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긴 해도 여전히 옷차림은 규율과 동떨어진 남자였다.

노타이와 슈트, 그리고 첼시부츠 조합에 대해 생각해보던 소현은 제 통찰력이 안일해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지한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했고, 그랬기에 지금 이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소현이 눈치채지 못한 거다.

반격할 줄 아는 녀석이라는 걸 그렇게 많이 당해보고선.

턱에 딱딱하게 힘을 준 소현은 회사에 출근해서도 온통 지한 생각뿐이었다. 그날 밤, 진탕 구르고 아침에 일어나 지한이 차려준 음식을 먹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 직접 보는 앞에서 요리를 해보라고 했더니 집에 남아 있는 재료로 금세 야채볶음밥을 만들어 대령했다.

재료를 손질하는 손놀림 하며, 그리고 맛까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거기다 개인 장비까지 있었다.

얼마나 쥐고 썼으면 손잡이 부분이 거뭇하던. 소현은 깊게 팬 미간을 쓸어올렸다.

“하아……이런 식으로 사람을 또 놀라게 하네.”

지한이 저 몰래 그런 노력을 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사실을 알게 되니 더욱 좋아진 것도 사실이고. 닫혀 있던 눈꺼풀이 차분하게 올라갔다.

평생이라는 게 존재하기나 할까.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헤어짐은 기간의 차이만 있을 뿐 어차피 찾아오는 것들 중 하나였다. 그 끝을 지한은 죽음으로 정해두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그 서약을 하는 것이 바로 결혼이다.

사실 소현도 처음부터 결혼을 기피하던 건 아니었다. 결혼 생각을 들게 하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현실적인 문제와 부딪치다 보니 자연스레 포기하게 된 것들 중 하나였다.

사랑보다 일이 먼저인 여자, 퇴근 뒤 잠깐의 만남을 견뎌주는 남자는 없었다. 그러니 하나같이 가장 큰 문젯거리인 일을 포기하기 원했다. 소현은 당연히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제가 일을 그만둬야지만 찾아올 평화라면 향긋한 에덴을 과감하게 등질 거였다. 그래서 소현은 연애만 해왔다.

가볍고 심각해지지 않을 연애.

지한과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결혼이라니.

평소 같았으면 헤어지거나, 남자 쪽에서 결혼할 마음이 생겼으니 잘라내야 맞는 일이다. 하지만 소현은 그럴 이유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 지한은 제 생활을 이해해주는 유일무이한 남자였다.

거기다가 요리까지 배워오다니. 그동안 저를 속였다는 배신감보다는 감탄이 나왔다. 요리까지 잘 하면 일등 신랑감 아닌가? 소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나 빨리?”

만난 지 아직 6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계절이 쌀쌀해질 무렵에 만나 이제 겨울을 지나고 있는데, 이렇게 빨리 결혼해도 되는 건가? 좀 더 지켜봐야 하는 건 아닐까.

아니, 이미 동거하며 지내고 있기에 지한의 습관이나 버릇은 모두 꿰고 있었다. 그럼 6개월 뒤에 하자고 할까? 아니지, 기간이 중요한 게 아닌데. 그때 소현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잠깐 나와.]

제 생각을 하는 줄 알고 또 기막힌 타이밍에 소현을 불러낸다. 시간을 보니 점심시간이 되기 5분 전이었다. 소현은 고민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5분만 일찍 식사하고 올게요.”

“아, 저희 스파게티 먹으러 갈 건데 과장님도 같이 가실래요?”

“잠깐 볼 일이 있어서. 가게 들어가서 연락해요.”

“네!”

힘차게 대답하는 미연을 두고 소현은 회사 밖으로 나섰다. 지정석도 아닌데 오늘도 어김없이 때깔 좋은 부가티 시론은 소현을 내려다 주었던 도롯가에 정차해 있었다. 저거로 딱지를 몇 장이나 뜯겼는데, 지한에겐 기별도 안 오는 모양이다.

코트를 여미며 다가가자 자동문처럼 창문이 열렸다. 소현이 낮은 차체로 허리를 숙이던 찰나였다.

“……이게 뭐야?”

눈앞에 들이닥친 향기에 후각이 흔들렸다.

“받아.”

아름다운 꽃이 한 아름 담긴 다발을 받자 그제야 창문 너머로 지한의 얼굴이 보였다. 열린 창문으로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이 새어 나왔다.

“들이댄다고 했잖아.”

목소리는 오아시스처럼 촉촉했다. 꽃을 얼마 만에 받아본 거더라. 소현은 찬바람에 으스스 여린 잎을 떠는 꽃다발을 가만히 보다가 밑으로 내렸다.

“미안하지만 난 이런 거에 감동 안 해.”

“그럼 뭐에 하는데.”

시시하다는 듯 소현이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꽃 말고 꽃처럼 네가 웃어봐.”

픽 하고 지한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소현에게는 손에 들린 꽃보다 화사하고 눈부셨다. 조각 같은 얼굴과 신비로운 눈동자를 볼 때면 간혹 궁금해지곤 했다.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어떨까. 소현은 허리를 기울이며 지한에게 다가갔다.

“키스해줘.”

지한은 고개를 숙여 소현의 입술을 감쳐 물었다. 히터 때문에 공기가 온통 삭막한데, 입술은 소현을 위한 선물처럼 부드럽게 젖어 있었다. 마치 꽃잎 사이에 감춰놓은 꿀처럼.

“처음부터 나를 달라고 하지.”

입술을 떼어낸 지한이 낮게 말했다. 소현은 제 립스틱 자국을 엄지로 문질러주며 말했다.

“너 말고 네 입술 달라고 한 거야.”

지한이 고개를 비틀며 엄지 옆면을 살며시 깨물었다.

“몸까지 줄 수 있는데.”

소현이 움찔하자 살살 그 위로 혀를 굴리며 뺀다.

“주차장으로 갈까.”

그 말 한마디에 소현의 머릿속은 금세 난잡한 상상들로 엉망이 된다.

“30분 안에 끝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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