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끊을 수 없는 나쁜 짓 (77)화 (77/86)

77.

퇴폐적인 어조로 점철된 말에 화답하듯 허벅지가 한껏 오므라들었다. 몸으로 친밀해진 사이가 이래서 무서웠다. 옷으로 중무장하고 있는데도 지한이 집요하게 애무하는 부위들이 벌써부터 쓸린 것처럼 달아오른다. 지한에게 휩쓸리지 않으려 소현이 말했다.

“안 돼, 회사 앞에서 그러다가 사람들한테 걸려서 풍기문란죄로 잘리면 어쩌려고?”

“그럼 안 되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지한이 다시 물었다.

“빨기만?”

“됐어, 안 해.”

“내가 해줄게.”

“해주고서 또 너도 하고 싶다고 할 거잖아.”

지한의 눈썹이 삐딱하게 구겨졌다.

“넌 나를 너무 잘 알아.”

발뺌하지 않는 저 당당함에 이골이 났다. 소현은 웃음을 터트리며 차 문을 열었다.

“선물 고마워. 꽃은 들고 가고 싶지만 관심 쏠릴 테니까 네가 집에 가져다 놔줘.”

조수석에 꽃다발을 남겨두고 밖으로 나간 소현이 문을 닫기 직전, 말했다.

“침대에 이 꽃 중 하나 물고 누워 있어. 그럼 딱 좋겠다.”

소현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지한은 여러 화종이 골고루 뒤섞인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주문할 때 여자들이 좋아하는 건 뭐든 넣으라고 했기에 풍성하다 못해 향기에 질식할 지경이다. 역시나 소현은 이런 거에 동요하지 않는다. 지한은 크게 숨을 내몰아 쉬며 기어를 바꿨다.

“어떤 걸 물지.”

퇴근할 때까지 고민해봐야 할 문제였다.

소현의 마음에 들기 위해선 못할 것도 없었다. 꽃으로 범벅을 하고 누워 있는 것도 고려하던 지한은 머릿속으로 조금 전 소현의 얼굴과 표정을 다시 되새김질했다.

결혼 얘기에 놀란 듯싶더니만 의외로 그날 이후 소현은 평소처럼 지내고 있었다. 바로 헤어지자는 소리가 안 나온 걸 봐서는 일단 음식이 제 몫을 톡톡히 해낸 모양이다. 열심히 쌓아 온 요리 실력은 지한이 숨긴 비장의 카드였다. 소현을 제 손에 더 길들여 놓은 다음 말할 거였지만 그 시기가 노인의 한마디에 앞당겨졌다.

어차피 평생 만날 거, 결혼이라도 빨리하자는 생각이었다. 이 결정에 후회와 고민은 없었다. 다만 소현이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문제다. 만약 싫다고 한다면 다음 계획을 준비하면 된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값진 나날들일 거다. 더 신경 써서 저를 받아들일 순간을 공들여 또 만들면 된다. 차례차례 계획을 짜던 지한은 입안이 말랐다.

원래 여자 마음을 얻기 이렇게 힘들었나.

지한은 속이 타는 기분이라 담배를 찾는 대신 잠깐 맛보았던 소현의 입술을 떠올렸다. 남은 타액을 찾아내려고 혀를 굴리며 지한은 깔끔하게 번민을 잘라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강소현이다.

그 단순한 이유로 초조한 감정과 불순한 생각들은 힘을 잃고 묵살된다.

사랑이라서.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한은 창틀에 팔을 세워 관자놀이를 기대었다.

“……침대에 꽃을 다 깔아놔야 되나.”

이보다 완벽한 답이 또 어디 있을까.

*

“팀장님.”

“어, 강 과장. 벌써 미팅 갈 시간인가?”

“아뇨. 30분 뒤에 출발하면 되는데, 우리 회사 육아 휴직 시스템이 어떻게 되나요?”

그 말에 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애 가졌어?”

얼마나 놀랐으면 입에 붙은 강 과장이라는 호칭도 빼먹고 너라고 말했다. 소현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물었다.

“육아 휴직 기간이 6개월이라는 건 아는데 다시 복귀했을 때 연달아서 다시 6개월을 쓸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요.”

“아니, 야.”

“그 밖의 다른 복지 시스템도…….”

“강소현 너 애 가졌냐고. 임신했어? 몇 개월인데? 배가 안 나왔는데? 임신 초기야?”

소현은 인상을 팍 구겼다.

“아직 임신 안 했고, 미리 여쭤보는 거예요.”

“계획 중이야?”

또 돌아온 물음표에 소현은 시선을 옮기며 뇌까렸다.

“하……질문 진짜 많네.”

거기에 움찔한 팀장이 당황한 표정을 얼굴에서 지웠다.

“그건 내가 메일로 보내줄 테니까, 한번 꼼꼼히 읽어 봐.”

“네.”

“그 남자랑 결혼하려고?”

물음표 귀신이 붙었나. 소현이 노려보자 팀장은 입을 쭉 닫았다.

“그냥 물어본 거라고요.”

“나도 그냥 물어본 거다. 궁금하잖아.”

“결혼하면 알아서 청첩장 보낼 거고, 그때 가서 축하해주면 되는 건데 왜 그렇게 호들갑이에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강 과장이 결혼한다고 하니까 그러지.”

“결혼한다고 아직 말 안 했는데요.”

“아니, 그만한 반지 떡하고 끼고 다니는데 결혼 생각이 없었어?”

소현의 시선이 제 손가락으로 떨어졌다. 그냥 지한과 어울리는 거로 골라 선택한 건데, 사내에선 이미 두 사람이 결혼까지 할 거라고 소문이 난 듯하다.

“강 과장, 내 동창 중에 말이야. 5년 넘게 한 여자랑 사귀면서 동거까지 하다가 헤어지고 여자 소개받았는데, 그 여자랑은 한 달 만에 결혼 날짜 잡고 하더라.”

“…….”

“결혼은 시간이 아니라 시기야. 누구는 5년, 10년 만나도 결혼이 고민되는가 하면, 누구는 한 달도 안 돼서 결혼할 마음을 먹는다고.”

소현은 생각에 잠겼다. 지한과 모든 것이 잘 맞고, 좋은데…….

“내가 좋으면 돼. 좋으면. 이 남자다, 하는 느낌이 있으면 그냥 잡아. 재고 따질 필요가 없는 문제야.”

애초에 고심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나. 지한은 제게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다. 이대로 놓치면 두 번 다신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소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팅 다녀올게요.”

“30분 뒤에 출발한다며?”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면서요. 30분이고 10분이고 지금 가고 싶은 기분이니까 갈게요.”

그래도 결혼인데. 더 명확한 기준이 필요했다. 지한에게 홀린 지금 이 감정 그대로 직진해도 좋을지, 냉철하게 평가해줄 잣대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소현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글자를 눌러 담는 대화창은 친구들이 전부 모여 있는 단톡방이었다.

[얘들아, 나 고민 생겼다.]

확인 버튼을 누르고 차에 올랐다. 핸들을 잡기도 전에 메시지가 찌링찌링 울리며 난리였다. 네가 무슨 고민이냐며, 무슨 사고 쳤느냐며 저마다 헛다리를 짚기 시작했다. 소현은 오늘 저녁 8시에 잠깐 만나자고 했다. 다들 이유 불문하고 만날 장소나 말하라며 즉답을 보내왔다.

소현은 제 회사 근처에 있는 곳으로 장소를 정하고 시동을 걸었다.

저녁 8시. 소현이 가게 문을 열자 저 멀리 등대 불빛처럼 제게 보내오는 신호가 느껴졌다. 얼마나 궁금했는지 각자 맥주 한 병씩만 시킨 채 소현을 기다리고 있던 그녀들이다.

“음식은 왜 주문 안 했어?”

“네 고민을 안줏거리로 삼을지, 아니면 맥주 한 병씩만 마시고 나가서 2차를 달릴지 듣고 정하려고 기다렸지.”

“그럴 필요 없으니까 다들 먹을 거 시켜. 저녁 먹고 온 거면 간단한 거 시키고 술이나 마시자.”

친구들은 저들끼리 오묘한 시선을 주고받더니 이윽고 메뉴판을 열었다.

낮에는 브런치 카페, 밤에는 펍으로 운영되는 가게는 손님들로 활기를 띠었다. 유일하게 조용한 건 주문을 마친 소현의 테이블이었다. 소현은 어울리지 않게 물만 마시고 있었다. 속이 터질 것만 같아 결국 하정이 먼저 물었다.

“왜 이렇게 뜸을 들여, 무슨 일이야?”

“얘들아.”

“왜.”

“나 결혼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싸늘한 정적이 훑고 지나갔다. 소현은 예상했다는 듯 얼이 나간 친구들의 얼굴을 차례대로 보았다.

게임 회사 아트 팀에서 일하는 동안 온갖 수정 사안과 야근에 뼈를 갈아 넣다가 관절염을 얻고 퇴사한 하정. 새로운 콘텐츠를 쥐어 짜내는 IT기업에서 근무하는 탓에 변화에 가장 민감한 연수. 그리고 올해 결혼한 지희까지.

“다들 한마디씩 해 봐. 경청할 준비됐어.”

모두 사랑에 빠져 판단력을 잃은 소현을 대신해 냉철한 눈이 되어줄 평가단들이다.

“미친 거 아니야? 누군데?”

하정이 제일 난리였다. 그 와중에도 성민과 불미스러웠던 날을 기준으로 날짜를 차근차근 세어보던 연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인데, 네가 선본 건 아닐 거 아니야.”

“소현아……결혼하려고?”

충격에 눈을 깜빡이던 지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 쪽에서 원하는 거야, 아니면 네가 하고 싶은 거야?”

“남자가 먼저 원했고, 나도 해서 나쁘지 않을 거 같고.”

이상했다. 원래 소현이 연애할 때 결혼이라는 단어는 끝을 알리는 종착점이었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연애도 하기 전부터 아예 뿌리를 박고 시작하던 소현이다.

소현은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들었다.

“지금 내가 냉철할 수 없어. 요즘 걔한테 푹 빠져 있는데, 결혼하자고 해서 솔직히 흔들리고 있거든.”

결혼 얘기에 중심을 잡지 못하는 소현이라니. 이별도 아닌 가정을 꾸리는 미래를 생각하는 모습이 낯설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넋이 나간 두 사람을 대신해 결혼 선배인 지희가 말했다.

“그러면 소현아. 결혼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있을까?”

소현이 그 부분은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음식을 기가 막히게 해.”

“뭐? 이게 못 먹다가 죽은 귀신이 붙었나, 요리 잘한다고 결혼을 해?”

“밥심으로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내 끼니를 매번 챙겨준다고, 그것도 끝내주는 맛으로.”

소현은 눈가를 구겼다.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니야?”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다며 하정이 넋을 놓았다.

“충분하긴, 야. 결혼한 다음에도 남자가 주방에 설 거 같아? 다 그냥 하는 소리지. 알면서 그래?”

“걘 아니야.”

소현은 진지하게 말했다.

“내 앞에서 지키지 못할 말 흘린 적 없어.”

“얘 단단히 맛이 갔다, 갔어.”

소현은 친구들이 인정하는 워커홀릭이었다. 그런 여자를 휘어잡고 바보로 만드는 남자가 궁금한 건 당연한 일이다.

“몇 살인데?”

소현의 눈꺼풀이 매섭게 올라갔다. 지한의 나이를 말하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일은 뭐야.”

킨슬리 코리아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들으면 또 뭐라고 할까.

“얼굴은 잘생겼어?”

눈에 띄는 회색 눈동자가 어떻게 비칠까. 소현은 어느 것에도 답하지 못하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 의미를 잘못 받아들인 건지 하정이 개탄했다.

“하, 이거 봐. 어디 이상한 놈한테 넘어갔나 본데, 너 지금 이거 우리한테 말한 거 조상신이 도운 거다. 가뜩이나 너희 부모님 외국에 계시는데 너 한국에서 사기꾼 같은 놈 만나는 거 아시면 안 말리고 뭐 했느냐고 우리가 혼나.”

눈뜨고 코 베일까 봐, 이 충동적인 결정의 끝이 처참할 것을 알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말릴 계획이다. 얌전히 있던 지희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 연수가 상황을 정리했다.

“오라고 해. 어떤 남자인지 우리가 볼 테니까.”

소현은 떨떠름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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