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지금 시간이면 지한은 퇴근해 집에 있을 거였다. 그런데 막상 번호를 보니 전화를 걸기가 어려워진다. 워낙 친화력과 거리가 먼 녀석이라 친구들 있는 자리를 싫어할 것 같았다. 갈등하던 소현은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을 몸에 이식해 놨는지 연결음 세 번 만에 전화를 받는다.
「어.」
“……지한아.”
제게로 꽂히는 친구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소현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너 지금 어디니.”
「회사 근처.」
“거기서 뭐 해?”
「애들이랑 있어.」
애들이라고 하면 회사 사람들인가, 아니면 민준 씨 무리인가. 중요한 건 집이 아니라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는 건데, 안 그래도 꺼내기 힘든 말이 더 어려워졌다. 말없이 눈동자를 굴리자 지한이 먼저 물었다.
「너 오늘 야근한다며.」
“그랬지. 근데 기분이 별로라서 나왔어.”
지한의 목소리가 빠르게 변했다.
「밖 어디.」
“……말하면 올 거야?”
그때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언제는 안 간 적 있나.」
소현은 심장이 날뛰는 것을 느꼈다.
「어딘데.」
“여기, 회사 앞에 있는 사거리 알지? 건너편에 크게 상가 있는 곳. 거기 1층 시리우스 미켈란.”
「금방 가.」
통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소현이 떨떠름하게 손을 내리자 연수가 의아한 눈을 했다.
“왜 끊어? 우리 있다고 말 안 해?”
“……하기도 전에 오겠다고 먼저 끊네.”
“와, 소현이 네 전화에 묻지도 않고 그냥 오는 거야?”
지희가 놀라운 듯 말하자 하정이 단칼에 잘랐다.
“너 회사 생활 하는 거 다 이해해 준대?”
“어.”
“말이면 뭘 못해.”
소현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흔들며 말했다.
“방금 못 봤어? 얘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애야. 요리도 나 때문에 배웠다는데, 몇 달 동안 말도 안 하고 나한테 감췄다고.”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한집에 같이 살아봐야 알아, 그래야 서로 본성이 나오지.”
이미 같이 살고 있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살아 보니 더 좋아졌다고 말하면 역적 취급을 받게 될 거다. 보여주는 게 빠르겠지. 소현이 물을 마시자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맥주와 가볍게 곁들여 먹을 음식들이 차려졌다.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감바스를 한 입 먹던 소현은 턱짓을 멈추며 혼잣말을 흘렸다.
“……맛없어.”
지희가 먹어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찮은데, 입맛 없어?”
지한이 제 미각을 전부 망가뜨려 놓은 것만 같았다. 이 돈 주고 먹을 바엔 차라리 집에 가서 지한에게 요리를 해달라 부탁하고 싶었다.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채소로 밥만 볶아도 제 입엔 녹아내릴 터였다.
“너희 먹어, 난 별로 생각이 없네.”
포크를 내려놓고 소현은 물을 마셨다. 저 빼고 다들 잘 먹는 걸 보니 시선이 무거워졌다. 산처럼 쌓인 음식이 반으로 줄어들자 소현에 대한 걱정이 흘러나왔다.
“1년만 더 만나 봐. 결혼 준비는 순식간에 지나가지만 다시 솔로로 돌아오는 길은 몇 년이나 걸리고 힘들다, 너. 그거 아니까 결혼 피해왔던 거 아니야?”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에게 하정의 시선이 꽂혔다.
“야, 진짜 잘생겼다. 무슨 사람이 게임에 나오는 3D 실사판처럼 생겼대.”
“어디?”
고갯짓이 가리키는 곳으로 몸을 돌린 지희가 말을 잃었다.
입구에 선 남자는 제게로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빨아들이며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노골적인 네온사인의 핑크빛 조명도 윤기 나게 머금는 눈동자였다.
날뛰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미치도록 잘 어울리는 퇴폐적인 얼굴인데, 블랙 슈트는 업무 미팅에 내놔도 손색없을 만큼 정갈했다. 무릎에서 흔들리는 검은 롱 코트를 기가 막히게 소화하는 남자에게로 연수의 시선이 박혔다.
“저 정도 스펙이면 모델 아니야?”
묘하게 이국적으로 생긴 얼굴에 하정이 감탄하는 사이, 그 주인공이 걸어와 테이블 앞에 섰다.
“어…….”
하정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까이에서 보니 빛을 흡수하는 눈동자는 회색빛이었다. 투명한 눈동자가 테이블에 앉은 여자들을 훑더니 이내 뒤돌아 앉아 있는 소현의 머리 위로 고정됐다. 친구들의 입이 얼어붙었다.
“야, 소현아, 너한테 볼일 있나 봐.”
그제야 뒤돌아본 소현이 어색하게 제 옆자리 의자를 빼냈다.
“왔어? 앉아.”
그 말에 코트 주머니 안으로 차 키를 밀어 넣은 남자가 얌전히 긴 다리를 접어 착석했다. 친구들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소현은 예상했던 반응을 보며 말했다.
“……얘들아, 내가 만나는 사람.”
놀란 기색이 테이블 위로 꽃가루처럼 흩날렸다. 지한은 제게로 달라붙는 관심들을 받아주며 물었다.
“누군데?”
“나랑 같은 고등학교 다니고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들. 인사해, 이쪽은……진연수.”
소현이 직접 소개하자 지한의 눈빛이 달라졌다. 단순히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료인 줄 알았는데 어릴 적부터 소현과 함께한 사람들이었다니. 그동안 소현에게 친구 얘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지한은 구미가 쭉 당겼다.
“이쪽은 장지희. 얜 결혼해서 지금 신혼이야.”
“어……안, 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얘는 유하정.”
하정이 홀린 것처럼 말했다.
“합격.”
미쳤다며 저를 쏘아붙이던 하정의 입에서 나온 말에 소현이 인상을 찌푸리자 지한이 입술을 미끄럽게 올렸다.
“정지한입니다.”
얼마 만에 지한의 존댓말을 들어보는 건지, 소현은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소현이 보통 남자와 만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런 쪽으로 상상했던 건 아니다. 억지로 단점을 꼽으라 해도 현재 보이는 겉모습에선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긴 목선과 결이 깨끗한 피부, 남다른 옷 태만 봐도 속이 단단한 근육으로 옹골차게 차 있을 거라고 예측 가능했다. 일이 전부던 소현이 결혼을 고민하는 것도 단번에 이해 가는 얼굴이다. 저런 외형이면 개같이 벌어서라도 집에서 살림만 시키면서 결혼이란 제도로 속박하고 싶을 거다.
“식사는?”
“아, 별로 생각 없어서 안 먹으려고.”
소현의 귓불로 손을 뻗은 지한이 만지작거렸다.
“집에 가서 내가 해줄까.”
“응……어.”
스킨십에 하정은 기함했다. 저런 얼굴에 요리까지 잘하다니. 게임 끝났다고 결론 내린 하정과 달리 남자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사상을 지닌 연수가 제동을 걸었다.
“오늘 소현이가 갑자기 고민이 있다고 저희를 불렀지 뭐예요. 결혼을 하고 싶어 하신다고요.”
지한이 눈썹을 들썩였다.
“야, 그걸 왜 말해?”
소현은 민망해했지만 오히려 그 한마디에 지한은 이 자리에 불려 나온 것이 기회라는 걸 느꼈다. 친구들의 입김이면 소현의 마음도 쉽게 흔들릴 거다. 지한은 코트를 벗어 의자 뒤로 걸쳐 두며 진지하게 대화에 껴들었다.
“결혼하고 싶죠. 꼬시는 중인데 워낙 깐깐해서.”
“소현이 쉽지 않죠. 원래 결혼이라면 질색하는데,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어떤 남자인가 싶어서 불렀어요. 아시죠? 소현이 부모님 외국에 계시는 거…….”
“저희 부모님도 외국에 있습니다.”
“혼혈?”
지한이 고개를 까딱이자 하정의 입에서 감탄이 흘렀다.
“예상은 했는데……아, 죄송해요. 눈이 정말 예뻐서 한 말이에요.”
“눈 말고 다른 곳도 예쁜데요.”
자신감 넘치는 건방진 발언에도 하정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넓고 굵직한 체격과 얼굴. 안 예쁜 곳을 찾는 게 더 어려웠다.
지희가 해맑게 미소 지었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돼요?”
드디어 나온 질문에 소현은 더는 볼 수가 없어 시선을 내렸다. 그에 비해 지한은 태연하게 답했다. 싸늘한 적막이 소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했다. 지희가 굳은 입술로 어수선하게 웃었다.
“어, 어리네요. 아니, 어린 게 아니라 젊어요. 그렇게 보이기도 하고요……20대 중반…….”
그동안 연하를 만나도 한두 살, 동갑보다는 연상을 더 선호해왔던 소현을 간파하고 있던 친구들에게 지한의 나이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소현은 눈을 감은 채 한숨을 흘렸다.
“호구조사는 하지 말자, 얘들아.”
“연애도 아니고, 결혼할 거면 이런 건 중요하지.”
“해도 됩니다.”
결혼이라는 말에 발동 걸린 지한은 얼마든지 제 안을 파고들어도 좋다는 듯이 가슴을 폈다. 이곳에 온 이상 조사에 성실히 임할 의향이 있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연이어 질문이 터졌다.
“그럼 취업은 했어요?”
“회사 다닙니다.”
지한은 재킷 안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내 열었다. 굳이 제 입으로 떠벌리지 않아도 종이 한 장으로 해결되는 것이 편리해 늘 품에 넣고 다니게 되었다. 한 장씩 나눠주자 연수의 입이 가장 먼저 떡하니 벌어졌다.
“킨……슬리…….”
IT 기업에 다니는 연수가 요즘 대책 회의로도 모자라 세뇌당하다시피 듣는 회사가 바로 킨슬리였다. 국내 시장에 발을 들인 거대한 몸집을 견제하기 위해 킨슬리의 대한 조사는 기본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베일에 싸여 있던 인물은 CFO였다. 무척 젊은 남자라는 뜬소문과 더불어 킨슬리 창립자인 더스틴의 아들이라는 유언비어까지.
“혹시, 아버지가…….”
지한은 숨길 것 없이 답했다.
“아빠가 앉혀준 자리긴 하죠.”
그런데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가 그 베일에 싸인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니. 연수가 믿을 수 없어 입을 뻐끔거리며 소현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소현의 눈이 떨떠름해졌다.
“말 안 해서 미안해.”
이제야 이해된다. 소현이 결혼에 흔들리는 것을. 재력과 외모를 두루 갖춘 남자를 마다할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거기다 소현을 위해 손수 요리까지 배웠다니. 연수는 판단하는 것을 멈추고 백기를 흔들었다. 하정은 이미 문 열고 지한이 들어온 순간부터 항복을 선언했고.
그나마 결혼 선배인 지희가 할 말이 있었다.
“만난 지는 얼마나 됐어요?”
“석 달 조금 넘었나.”
“음, 결혼을 생각하기엔 조금 빠르긴 하네요.”
“별로. 이미 같이 살고 있는데요.”
그걸 또 왜 말하느냐고 하려던 소현은 이미 엎질러진 물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지희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동거요? 소현이 집에서요?”
“내 집에서요.”
지한은 테이블 아래에 놓인 소현의 손을 잡았다.
“매일 예뻐해 주고 있죠.”
손등을 문지르는 끈적함에 소현은 한숨이 나왔다. 진짜, 저렇게 팔불출 같은 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사람도 지한밖에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