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다른 사물이나 사람을 볼 때 차갑게 느껴지는 눈동자가 소현에게 닿으면 애정이 눅눅하게 흘러내렸다. 지희는 둘 사이에서 형성되는 야릇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물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어요?”
올라선 소현의 동공이 진동했다. 더는 위기가 없을 줄 알았는데 또 나왔다.
첫 만남.
연수와 하정도 궁금했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소현은 숨을 집어삼켰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첫 만남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소현은 충동적으로 하룻밤을 보낸 사실조차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것만큼은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된다고 힘을 주어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지한이 입을 열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소현이밖에 안 보였어요.”
소현을 곁눈질 한 지한은 낮게 속삭였다.
“지금도 그러는 중인데.”
그 말에 소현의 얼굴이 텅 비었다. 아는 사실이지만 지금도 그러고 있다는 말이 소현의 가슴을 두들겼다. 지희는 흐뭇하게 웃음이 나오려던 입가를 꾹 짓누르며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소현이가 광고 회사 다니는 건 괜찮고요?”
“그게 매력이죠. 남자들 앞에서 PT할 때 내가 또 반했던 거니까.”
“매일 퇴근도 늦잖아요.”
“어차피 소현이 없으면 잠이 안 와서 불편함을 모르겠는데요.”
“집안일은…….”
“일주일에 세 번 가정부가 와서 청소합니다. 침실은 빼고. 그건 내가 해야 해서.”
“침실은 왜요?”
지한은 비스듬히 턱을 돌려 소현을 응시했다.
“워낙 뭘 많이 흘려서.”
시선이 닿은 소현의 얼굴이 빨개졌다. 한 편의 영화처럼 지한을 감상하던 연수와 하정의 입도 떡 벌어졌다. 침대란 요소와 조금 전 발언이 만나 상상을 부추겼다.
“아…….”
얌전하고 맹한 지희 역시 이번 발언이 낯뜨거웠는지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아, 그렇죠, 땀을 흘리긴 하겠네요.”
“나도 흘리고요.”
미쳤어, 정지한. 소현이 그만하라고 눈빛을 쏘아대자 지한이 묵직하게 숨을 흘렸다.
“그럼, 침실 청소는 직접 하신다는 건가요? 안 귀찮고요?”
“소현이가 눕는 곳인데 그 정도야. 앞으로는 요리도 제가 할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 일이 안 귀찮을까요? 시간이 지나도 유지될 수 있는지 궁금해요.”
“왜 귀찮지.”
지한은 공감할 수 없다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데.”
소현은 제가 한다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노력하는 행위에 결과가 되어 주고, 또 노력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어 준다.
깨끗하게 침구를 갈고 가지런하게 베개까지 정돈해두면 달콤하게 곤히 잠든 네 얼굴을 볼 수가 있다. 뜨겁게 사랑을 나눌 땐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아 다시 재정비하는 즐거움도 느끼게 해준다.
직접 제 손으로 재료를 손질하고 간을 맞춘 요리를 대령하면 감동에 녹아내리는 목소리와 힘차게 들썩이는 입술 점으로 보답해준다. 일단 먹여 놓으면 소현은 모든 것에 온화해져 지한으로서는 편해진다. 워낙 까다로워서 맞추기 힘든 소현의 성정이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느낄 때 부드러워지기 때문이었다. 기분 좋은 소현이 해주는 행동이나 말 한마디면 지한은 얼마든지 죽을 때까지 요리만 해서 갖다 바칠 수 있었다.
“힘들지도 않고 귀찮지도 않아요.”
소현으로 인해 시작될 다음 도전이 뭐가 될지, 지한도 기대할 정도였다.
“강소현이잖아.”
지한의 눈빛이 진해졌다.
“이 정도도 못 해주고 어떻게 평생 나만 사랑하라는 소리를 꺼내.”
내가 사랑하는 여자. 이 여자를 가질 수만 있다면 제 노력은 마땅히 희생되어야 할 제물에 불과했다. 나를 잠들게 해주고 휴식이 되어주는 여자의 가치는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으므로.
“소현아.”
“어, 어?”
지한의 말에 푹 빠져 있던 소현이 고개를 움직이자 지희가 화사하게 웃었다.
“나도 결혼 찬성이야.”
소현은 꽉 조이던 가슴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너와 잘 맞는 남자 만난 거 같아.”
지한의 눈썹이 내려앉았다.
“그걸 이제 알았다니 안타까운데.”
“전 오자마자 합격 선언했어요?”
하정은 억울하다며 제 의견을 피력했다. 연달아 연수가 수긍하며 말했다.
“워낙 일밖에 모르는 애라 결혼은 못 할 줄 알았는데 소현이 상황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준다니 걱정할 필요가 없네요. 솔직히 능력도 갖춰서 놀랐어요. 소현이가 더 벌 줄 알았는데…….”
연수가 갑자기 눈가를 가늘게 찢었다.
“강소현, 이거 가만 보니까 자랑하려고 부른 거 아니야?”
소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가 부르라고 했잖아. 어디 생사람을 잡아?”
“흠잡을 데도 없는데 고민하고 있다니까 이해 안 돼서 그러지. 아니면 너무 완벽해서 고민한 거였어?”
인성을 일반적으로 따져 본다면 지한은 이해받기 힘든 범주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연애에 있어서 그 문제들은 장벽이 되지 않았다.
“흔들릴 만도 하구만. 이 정도면 결혼 얘기 나왔을 때 빨리하는 게 맞지, 누가 채가면 어쩌려고 이렇게 여유를 부려? 결단력 좋은 애가 연애할 땐 이상하네.”
“그러게. 애가 왜 이렇게 됐지?”
소현은 기가 찬 헛숨을 뱉었다. 결혼이라는 제 인생의 중대한 결정 앞에서 신중해지려던 것뿐인데, 지한 보다 제가 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소현을 가장 잘 안다는 친구들이 지금은 지한의 추종자가 된 것만 같았다. 지한은 테이블 한편에 놓인 계산서를 들춰보더니 말했다.
“자리 옮길래요? 여긴 내가 대접하기엔 너무 싸게 먹히네.”
그 말에 친구들은 지한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2차로 가게 된 와인 바에서 친구들은 당장 날짜 잡으라는 말부터 시작해 결혼 뒤엔 어디서 살지, 애는 몇 명이나 낳을 거냐는 둥 한참이나 앞질러나간 얘기들로 소현을 맹렬히 공격했다. 차곡차곡 누적되는 피로감에 소현은 지쳐갔지만 지한은 오히려 그 간섭과 참견을 빨아들이듯 흡수했다. 멀끔한 얼굴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니 작품이라며 하정이 박수를 보냈다.
바에서 나왔을 때 소현은 정신이 몽롱했다. 마신 건 고작 와인 몇 잔인데 4차까지 달린 듯한 피로감이 몸을 잠식했다. 소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지한의 곁에 몰려든 추종자들을 보았다.
“아, 그러지 말고 번호 교환 지금 할까요?”
“소현이가 계속 빼거나 말 안 들으면 우리를 지원군으로 불러요.”
저것들이. 지한의 명함 속 핸드폰 번호를 찍더니 돌아가며 전화까지 거는 정성을 보인다.
“오늘 너무 잘 먹었어요, 만나서 반가웠고요.”
“다음에 만날 땐 짝 맞춰서 놀죠.”
“……짝이요?”
지한은 핸드폰을 코트에 넣으며 말했다.
“남자 끼고 노는 거 싫어요?”
“아, 뇨?!”
남자라니, 지한이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 수준이 어떨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묘하게 들뜬 연수와 하정의 눈치를 보며 지희가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다음엔 저는 빠질게요. 결혼해서 그런 자리는 조금…….”
“와서 구경만 해요. 얼굴은 봐줄 만 해서.”
얼굴 얘기에 소현의 촉이 바짝 섰다.
“……너 혹시, 민준 씨랑 장우 씨 얘기하는 거야?”
“별로면 다른 애들 데려오고.”
아니라고 할 줄 알았건만, 맞다니. 낯익은 이름을 듣고 하정이 기함하며 물었다.
“설마 배우 김민준이랑 모델 강장우 말하는 거예요?”
두 사람은 각자의 분야에서 외모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지만, 친한 거로 유명해서 단번에 연관 지어 떠올릴 수 있던 거였다. 지한의 고개가 까딱이자 하정은 속사포로 말했다.
“별로긴, 너무 좋은데요? 저희 꼭 짝 맞춰서 놀아요. 날짜만 잡아줘요.”
술까지 들어간 하정의 목소리는 들뜨다 못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소현은 한숨을 내쉬며 지한의 팔에 제 손을 밀어 넣었다.
“애들아, 오늘 수고했다. 사실 내가 더 수고했지만. 간다.”
“지한 씨 꼭 연락해요!”
걸어가는 내내 뒤에서 꽃가루 같은 환호가 쏟아졌다. 소현은 낯선 친구들의 태도가 가슴에 박혀 알레르기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붙잡은 지한의 팔을 꽉 끌어당기며 소현이 눈초리를 흘겼다.
“너 이렇게 친화력 좋은 앤 줄 내가 몰랐다?”
“네 친구니까 봐준 거지.”
“내 친구들 나이 뻔히 알면서 어떻게 걔네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해?”
“뭘. 매일 정성껏 예뻐해 주고 있다는 말?”
소현은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왜 갑자기 정성이 붙어? 아깐 없었잖아.”
“공도 들이고 있지.”
한술 더 뜬다. 지한이 달라진 건지, 아니면 제 친구들이 단체로 이상해졌는지 소현은 알 수 없었다. 보도블록 위로 두 사람의 발소리가 박자에 맞춰 울려 퍼졌다. 신호등 앞에 선 소현은 코트 주머니로 제 손을 잡아끄는 지한을 보며 말했다.
“내 친구들 눈도 높고 까다로운데 걔들이 널 좋아해. 이게 맞아? 지금껏 한 번도 만장일치 나온 적 없는데…….”
“그럼 안 좋아할 줄 알았어?”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건방진 눈동자가 소현의 얼굴을 훑었다.
“나 두고 고민하는 건 너밖에 없어.”
소현은 그 목소리에 숨결을 빼앗겼다.
“인정해. 나만 한 놈도 없다는 거.”
들이댄다더니 사실이었다. 밤하늘 아래에서 지한은 그 어느 때보다 멋있었고, 주머니로 구겨 넣은 손은 가슴까지 녹일 만큼 따뜻했다.
“나랑 평생을 살아주는 게 뭐가 어려워.”
소현의 손가락 사이로 저를 밀어 넣은 지한이 나직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