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소현은 답하지 않고 지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가운 계절이 새하얀 입김으로 번지는 입술엔 술 한 모금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친구들이 술을 못 하느냐고 묻자 지한은 차를 가져왔다는 말로 의문을 종결시켰다.
대리 기사를 불러도 된다. 하지만 지한은 직접 소현을 데려가려고 애꿎은 물만 마셨다. 그게 꼭 사명인 것처럼 말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정한 규율이다. 소현이 부르면 묻지 않고 출발부터 하는 성미나, 아침과 저녁엔 데리러 오는 것들. 사소하지만 그랬기에 어느 순간 알아차렸을 때 크게 밀려오는 거다.
“……아까 그 자리, 내 치부가 다 까발려지는 기분이었어.”
지한은 삐뚤게 눈썹 앞머리를 구겼다.
“내가 너의 치부야?”
“아니. 그동안 내가 고집스럽게 유지해왔던 남자 취향이나, 따지고 재며 지켜온 성향을 너 때문에 애들 앞에서 시원하게 버릴 수 있었다고.”
소현은 이내 중심을 잡는 것을 포기했다.
“네가, 내 규칙과 규율을 다 무너뜨려 버렸으니까.”
기꺼이 합류하기로 한다. 소현은 불빛이 바뀐 횡단보도를 건너며 몰아치는 바람결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버님 언제 오신다고 했지?”
“이틀 뒤에.”
소현은 목 뒤를 빳빳하게 세우며 속삭였다.
“알았어. 준비할게.”
머리 위로 진한 시선이 떨어졌다.
“뭘?”
“묻지 말고 넌 그렇게만 알고 있어.”
소현은 묵묵히 지한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
더스틴의 한국 방문은 비밀리에 이뤄졌다. 철저히 비밀에 부쳤음에도 냄새를 맡고 따라온 외국 기자 몇 명 빼고는 순조로운 진행이었다. 한국 지사에 도착해 사내 환경을 살피고 현황과 영업 계획을 PT를 통해 보고 받았다. 인지도와 시장 조사를 한 데이터를 더스틴은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제 아내의 땅에서 그녀의 이름으로 시작하는 과정이니 감회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더스틴의 옆에 한 쌍처럼 앉아 있는 지한은 전혀 다른 상념에 빠져 있었다.
‘저녁 8시, 비발드 호텔 25층에 있는 한식당에 내 이름으로 자리 예약해 놨어.’
아침부터 얘기를 꺼내는 소현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중요한 미팅에 가는 듯 블랙 정장 차림이 평소보다 더 각이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빠져 곧장 대답하지 못 했을 뿐인데 날카롭게 서는 눈매가 지한을 찔러왔다.
‘늦지 말고 와.’
마치 큰 사냥감을 잡으러 나서는 것처럼. 손목시계를 채운 소현은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서 현관을 나섰다.
회사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기 전, 늦지 말라는 당부를 한 번 더 했기에 지한은 손목을 세웠다. 오후 5시. 지한의 눈빛이 냉철하게 올라왔다. 3시간 남았다.
“학력보다는 꿈과 열정이 있는 사원들로 채워졌으면 좋겠군요.”
“그럴 겁니다. 레벨 제도를 도입해 사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줄 테고요.”
더스틴은 회의 이후에도 제 비서인 바트와 계속 얘기를 나눴다. 투표로 선발된 대표와의 면담도 빠질 수 없었다. 그때마다 지한은 허벅지 위에 올려둔 제 손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흥미가 없어 보이는 모습에 더스틴은 물었다.
“대화가 지루한가?”
“아니요.”
뭐라 떠들든, 지금 지한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소현의 첫 만남이었다. 며칠 전 친구들의 도움으로 소현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하지만 오늘 만남에서 그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는 거였다. 아직 소현의 입에서 확답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만남이라서 그런가. 신경이 날처럼 예민해졌다.
6시 30분, 기다리던 시간이 되자마자 축 늘어져 있던 지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직이죠, 늦으면 안 돼서요.”
“8시 약속이니 7시에 출발해도 충분하지 않나?”
더스틴은 시간을 쪼개어 하루 만에 일정을 전부 소화하는 중이었다. 지한은 눈매를 가늘게 떴다.
“모험하기 싫은데요. 그 밖에 궁금한 건 제가 가면서 대답해 드리죠.”
차가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변수나 가다가 어떤 일이 발생할 만약의 상황까지 고려해 결정 지은 합리적인 시간이었다. 더스틴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회사를 나와 차에 올랐다.
“네가 만나는 여자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구나. 지금도 잘 지내고 있겠지?”
“…….”
일에서 벗어나 사적인 질문을 던졌지만 지한은 대답이 없었다. 음, 더스틴은 다시 업무와 관련된 얘기를 꺼냈다.
“킨슬리가 외국 기업이라 소비자 마케팅이 관건일 텐데, 네 의견은 어떻지?”
“그건 대표가 알아서 하겠죠.”
말을 걸지 말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지한의 표정에 더스틴은 웃음을 터트렸다. 통화로 소현의 얘기를 들을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대화를 단절하는 지한은 익숙했지만 이토록 솔직한 감정을 내비치는 건 오랜만이었다. 아마 제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처음일 거다.
그녀가 떠난 뒤 지한은 늘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곤 했었다. 그래서 더스틴은 지한을 살피는 게 버릇이 되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말하지 않으니, 지한이 바라보는 시선의 끝이나 그가 만들어낸 분위기 속에서 해답을 찾곤 했다. 지금도 더스틴은 지한이 말하지 않아도 단번에 그가 긴장했음을 깨달았다.
지한이 긴장이라니, 더스틴은 기분 좋은 웃음을 입가에 녹였다.
서울의 꽉 막힌 교통체증을 겪은 차는 7시 30분이 돼서야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지한은 층수를 누르고 무거운 머리를 기울여 벽에 기대었다.
“에단.”
제 이름에 게슴츠레 뜬 지한의 눈동자가 옆으로 움직였다.
“걱정이 많아 보이는구나.”
“걱정되지.”
지한은 감추지 않고 한숨을 뱉었다.
“소현이가 아버지를 좋아해야 되는데.”
제 마음도 아니고 소현의 마음이라니, 더스틴은 자신의 행색을 내려다보았다. 우람한 체구를 덮은 정장은 흠잡을 곳 없이 깨끗했다.
“마음에 들 거다. 신경 썼고, 말도 조심히 하지.”
“…….”
천천히 더스틴의 슈트를 미끄러지던 회색빛 눈동자가 옮겨졌다. 더스틴은 제 아들이 이토록 불안해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을 정도였다.
사랑을 하면 변한다더니 그래서일까. 아내의 기일에 맞춰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때에도 지한은 잿빛처럼 곧 사라질 것만 같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다채로워진 얼굴이 되었다. 감정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강소현 이름으로 예약했는데요.”
“네.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직원을 따라가며 지한은 더스틴에게 한마디 더 했다.
“이상한 질문은 하지 마세요.”
“알았다. 특별히 신경 쓰지.”
대답을 들어도 못 미더워하는 눈빛이었다. 소현이 고른 식당은 실내에 전통 한옥이 아름답게 구현된 곳이었다. 인조 분수대와 나무들이 도심 속의 정원처럼 여유로웠다. 직원이 룸을 안내하고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지한의 발이 멈추었다.
식탁에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앉아 있던 소현의 고개가 옮겨졌다. 지한은 눈가를 구기며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7시 35분.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소현은 먼저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뒤에 서 있던 더스틴이 지한의 어깨 너머로 소현과 눈이 마주쳤다. 소현은 빨간 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오셨네.”
소현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음에도 지한은 구겨진 눈가를 펼 수 없었다. 이곳을 주시하는 새까만 눈동자와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블랙 바지와 재킷을 입은 소현은 나른한 짐승처럼 육감적인 실루엣을 발산했다. 아침엔 청초했던 입술이 진한 립스틱을 덧발라 강렬했다. 핏빛을 연상케 하는 새빨간 입술이 벌어지자 그 안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시선이 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소현입니다.”
소현은 육식 동물처럼 웃으며 더스틴에게 악수를 건넸다. 더스틴은 그 미소에 넘어간 듯 손을 잡았다.
“일부러 일찍 온 건데 먼저 와 있었군요.”
“30분 먼저 도착해 있는 게 버릇이라서요.”
소현은 더스틴이 익숙할 영어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매끄럽게 맞은편 자리로 더스틴을 안내한 소현이 문에 서 있는 지한에게 눈짓했다.
“와서 앉아, 정지한.”
그 말에 이끌리듯 지한은 소현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더스틴은 외투를 벗어 직원에게 건네주고선 소현을 바라보았다. 사진 한 장 보여주지 않고 꽁꽁 감춰두었기에 비행기에 오를 때부터 어떤 여자일지 궁금했었다.
제 아내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없으리라고 여겼는데 그 편견을 깨뜨리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앉은 모습을 보니 오래전,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그녀도 지금의 소현처럼 정장 바지가 무척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더스틴은 비즈니스에 맞춘 의상을 보고 물었다.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군요.”
“광고 회사에서 AE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군요. 제 아들이 전문 직종의 여자와 만날 거라고 예상 못 했습니다. 게다가 소현 씨를 처음 보았을 때 직접 회사를 경영하는 CEO로 추측했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아버님이 어떤 분일지 궁금했지만 만나 뵙기도 전에 킨슬리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요. 상상할 기회를 빼앗겨서 아쉬워요.”
솔직한 소현의 말에 더스틴은 웃음을 머금었다. 지한은 앉은 이후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까는 긴장돼서 말을 못 했다면 지금은 소현에게 푹 빠져 말을 잃은 듯 보였다. 옆에 앉은 소현의 입술로 줄곧 시선이 향해 있었다. 소현은 그게 익숙하다는 듯 태연하게 받아주며 더스틴과 대화에 집중했다.
“한국엔 잠시 방문한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계실 텐데 시간 내서 저와 만나주셔서 감사해요.”
“이번 한국 방문에서 당신을 만나는 것이 내 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궁금했고 만나고 싶었습니다.”
소현은 매끄럽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음식이 입에 맞아야 할 텐데요, 많이 시장하신가요?”
“당신과 대화하니 허기도 못 느낄 정도군요.”
“맛있는 음식과 함께해야 만남이 더욱 윤택해지고 좋게 기억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음식이 주는 긍정적인 영향을 믿거든요.”
“식사하면서 계약 얘기를 하면 결과가 좋은 것처럼 말이죠.”
“맞습니다. 음식은 사람의 마음을 녹이거든요. 8시에 식사를 시작할 예정인데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그때였다.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지한의 고개가 문으로 향했다가 이내 경직되었다. 그건 더스틴도 마찬가지였다. 문 너머로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이곳에서 유일하게 소현 혼자만이 여유를 가진 채였다. 소현은 입술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제가 초대했습니다.”
노인은 안쪽 상황을 보더니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