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며칠 전, 소현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해서 흔쾌히 수락했건만 약속 장소에는 소현 혼자가 아니었다. 더스틴과 눈이 마주친 노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
소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에게 다가갔다.
“할아버님 오실 때까지 기다렸어요.”
당혹스럽지만 소현이기에 매서운 말이 나가질 않았다. 소현은 노인의 심정을 녹일 것처럼 눈웃음 지었다.
“미리 말씀 안 드린 건 죄송해요.”
“무슨…….”
“이쪽으로 오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소현이 노인의 팔에 제 팔을 끼우고선 걸어갔다. 딱 하나 남은 자리가 더스틴의 옆이라는 걸 본 노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앉기 싫었지만 소현이 살살 웃으며 의자를 빼주니 무거운 엉덩이가 결국 풀썩 주저앉았다.
제자리로 돌아간 소현은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마치 제 계획이 딱 들어맞았다는 듯이. 껄끄러운 두 사람을 붙여놓은 기가 막힌 상황에 지한이 소현을 빤히 응시했다.
“이제 다 모였으니 식사 시작할까요.”
대체 무슨 생각이지.
알지 못한 채로 준비된 코스 요리가 나왔다. 지금 세 사람은 소현이 짜둔 판에 꼼짝없이 걸려든 장기 말들 같았다. 노인은 제 어깨와 같은 선상에 놓인 더스틴의 어깨를 의식하며 말했다.
“잘 지냈느냐.”
“네.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영어로 짤막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어색함을 지우려고 꺼낸 말인데, 오히려 그 뒤로 찾아온 적막에 분위기가 더 깊숙이 침몰했다. 소현은 서먹한 두 사람을 지켜보며 태연하게 물었다.
“두 분이 잘 안 만나시나 봐요?”
노인은 얄밉다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일전에 소현에게 지한의 과거 얘기를 해주었기에 당연히 더스틴과의 사이도 알아들었을 터였다. 딸이 유명을 달리하고 어쩔 수 없이 지한을 위해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라지만 이렇게 같이 앉아 식사하는 건 석연치 않았다. 그런데 몰래 이런 자리를 만들다니, 제아무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현이라지만 이번만큼은 발칙하게 느껴졌다.
“할아버님, 혹시 화나셨어요?”
노인의 입이 한숨과 함께 열렸다.
“아니다, 화날 게 뭐가 있다고.”
이런 자리에 저를 왜 불렀냐고 말할 수 없었다. 바로 앞에 지한이 있는데, 조금이라도 그때 몰래 만났던 얘기를 흘렸다간 저 회색빛 눈동자가 칼날처럼 변할 거였다.
“서로 바빠서 자주 못 만날 뿐이지, 사이 나쁜 거 아니다. 나쁠 것도 없어.”
그 말에 지한은 삐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노인이 뭘 잘못 먹었나 싶을 만한 발언이었다. 소현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더스틴의 안색을 살폈다.
“두 분 다 지한이에게 각별한 분이라 함께 식사하면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제가 무례를 저지른 건 아니죠?”
“아닙니다. 몇 달 전에도 뵀습니다만…….”
더스틴은 아내의 기일 때 잠깐 노인과 만난 얘길 꺼내려다가 웃었다.
“그만 식사할까요.”
“네, 맛있게 드세요.”
지한은 이 상황이 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절대로 저와 눈을 맞추지 않는 소현이나 노인까지 몰래 부른 행위도. 의심이 길어졌지만 그마저도 소현의 모습을 보니 잊혀졌다. 지한의 눈동자가 금세 눅눅하게 젖었다.
오늘 소현은 제가 본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빛났다. 침대에서 다 벗겨놓은 것도 야하지만 금욕적으로 몸을 가렸을 때가 더욱 아랫도리가 끓어오른다. 정장을 입고 냉철한 눈빛을 한 소현을 볼 때면 저 발밑에 깔려 다 뜯어 먹히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다. 지한은 뻐근해진 허벅지를 문지르며 음식을 씹었다.
지한이 소현의 일을 이해해주는 것도 다 저 모습 때문이었다. 누구든 제게 덤벼들면 잡아먹을 것처럼 무장한 모습이야말로 소현의 매력이었다. 거기다 오늘은 사냥감을 둘이나 앞에 둔 거센 눈빛까지 마음에 들었다. 어떤 마음으로 이런 자리를 만들었든, 지한에겐 또 반하는 순간이 되었다.
동상이몽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났다. 후식이 나오자 노인과 더스틴 둘 다 어색한 손짓과 눈짓으로 입가심을 했다.
“식사는 어떠셨어요?”
“괜찮았다.”
“다행이에요.”
퉁명한 노인의 말에 소현은 웃으며 냅킨으로 입술 끝을 정리했다. 그리고 의자 아래에 내려놓았던 서류 가방을 들어 올렸다. 지퍼를 열어 안에서 서류를 꺼낸 소현이 일어나 테이블을 한 바퀴 돌았다.
노인은 제 앞에 놓인 종이를 보며 의아한 눈빛이 되었다. 더스틴에게는 특별히 영어로 된 서류가 놓였다. 두 장을 가진 채로 지한의 앞에 선 소현이 둘 다 내밀며 물었다.
“넌 어떤 거?”
지한은 말없이 영어가 적힌 문서를 집어 들었다. 내용을 살피는 지한의 눈가가 글자를 파고들 것처럼 예리해졌다.
“말보다는 제가 직접 정리한 자료 보여드리면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5장이나 되는 종이가 각자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하며 소현이 말했다.
“할아버님, 영어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더스틴을 배려해 꺼낸 말이었다. 그러자 더스틴이 고개를 들었다.
“한국말로 해도 됩니다.”
“어……한국말 하실 줄 아시네요?”
놀란 소현을 향해 더스틴은 미소를 머금었다.
“제 아내가 연애할 때부터 가르쳐 줬던 거죠.”
이제는 자주 사용하진 않는 건지 어눌한 발음이었지만 듣기엔 무리가 없었다. 새삼 지한이 한국말을 능숙하게 하는 것에 이유가 있었다고 수긍하며 소현이 제 손에 들린 종이를 한 장 넘겼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것에 언제든 질문이 있으시다면 해주셔도 됩니다. 우선 1페이지엔 제 출생과 약력, 현재 재산 보유 사항이 간단하게 정리돼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부모님과 제 동생도요.”
“…….”
“강소현의 성장 배경과 현재 상황을 궁금하실 것 같아서 제일 먼저 넣게 되었습니다만…….”
안에 내용을 확인하는 노인과 더스틴을 보며 소현이 골반을 짚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강소현을 소개하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얼마나 정지한과 잘 맞는지가 중요하죠.”
뒷장의 내용까지 빠르게 훑은 지한이 소현을 쳐다보았다. 지한과 눈을 맞추며 소현이 나직이 속삭였다.
“지금 이건 제가 정지한과 결혼하기 위한 기획안입니다.”
지한의 동공이 넋이 나간 듯 비워졌다. 결혼이라니, 소현은 그 안에 저를 새겨 넣고선 앞에 앉은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노인도 난생처음 듣는 얘기에 놀랐고, 더스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제가 정지한과 결혼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게 결혼은 배려와 이해로 설명되는데, 지한이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고 있어요. 교제하기로 서로 얘기하고 연인으로 만난 건 석 달 조금 넘었지만, 그 전부터 충분히 제가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지한이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고요. 제가 본 것이 후에 달라질 거로 예상하지도 않습니다.”
“…….”
“저를 위해 미국행 비행기도 포기했고, 킨슬리까지 취업해 지금은 절 아침마다 회사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죠. 집에 오면 맛있는 음식이 절 기다리고 있어요. 지한이가 저 때문에 요리를 배웠다고 하더라고요. 기특하죠, 저를 석 달 넘게 속였어요.”
이틀 전에 준비한다는 게 이거였나.
“노력을 입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은 많이 봐왔지만, 지한이처럼 꾸준히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저는 그 실행력을 높게 평가한 거고요.”
지한은 저를 평가하며 힘차게 율동하는 소현의 입술을 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제 약력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동안 저는 광고에 뜻을 가지고 쉴 틈 없이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지한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즐겁고 좋아요, 지한이는 제게 긍정적인 영향과 에너지를 주는 사람입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그런지 제 업무에까지 바람직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요.”
전부 처음 듣는 얘기라 지한은 어떤 것을 가장 먼저 흡수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제가 지금보다 더 성공해 자랑이 되고,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지한이가 되었어요.”
모두 제게 하는 고백이었다.
“세 번째는, 제 인생에 아이를 생각한 적 없었는데 지한이와 만나면서 출산에 대해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한 남자를 사랑하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한 가지 걸리는 건 제가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선 지한이에게 동의를 구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상관없는데.”
소현이 주춤하며 지한을 쳐다보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지한은 입가를 문지르며 다시 말했다.
“상관없어.”
소현은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두 분 다 들으셨을 거라 생각하고, 다음.”
한결 가벼워진 숨을 뱉은 소현이 마저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육아에 체력을 쏟을 수 있을 적절한 시기가 언제일까 고려해보았는데 답은 단순하더라고요, 한 살이라도 어리고 젊을 때.”
소현의 눈빛이 일순간 날카로운 이빨처럼 곤두섰다.
“그러니 내년을 목표로 할 겁니다.”
지한은 그 맹렬한 계획을 얼른 따라주고 싶어 온몸의 세포가 곤두섰다. 입가를 쓸며 폭주할 것만 같은 기분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리고 결혼식은 공평하게 한국에서 한 번, 미국에서 한 번 할 예정입니다. 2페이지 보시면 일정표 나와 있습니다.”
노인과 더스틴은 얼떨결에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엔 소현이 계획한 일정이 치밀하게 정리돼 있었다.
“제가 큰 프로젝트가 내년 상반기까지 차 있어서요. 결혼은 7월로 예상하는데요, 여기에 의견 있으신가요?”
“아니, 잠깐…….”
노인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소현아, 네 부모님은 이걸 아느냐?”
“안 그래도 뒷장에 보시면 간략하게 적혀 있습니다만.”
역시나 제게 반격하는 의견은 치밀한 준비성으로 짓눌러준다.
“부모님께 어제 연락해 결혼 의사 밝혔고 허락받았습니다. 다음 주 주말에 한국 방문해 주신다고 했고요. 아버님과 만나는 건 일정을 다시 잡아야겠지만 우선은 지한이를 제 가족에게 소개할 예정입니다.”
노인은 깔끔한 일 처리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결혼 계획을 이렇게 발표하는 걸 보는 일도 처음이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소현의 태도였다.
“저희 부모님, 제 결정을 어릴 때부터 존중해주시던 분들입니다. 제 결혼이니까, 제가 가장 우선순위인 것도 당연하고요. 지한이를 각별하게 아끼시는 두 분 역시 지한이의 의사를 가장 중요히 여기실 거로 생각됩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방식으로 두 사람을 설득하려고 하다니.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저 얼마 전에 지한이에게 청혼받았고, 이게 지금 제 결정이고 대답입니다.”
쉴 새 없이 말을 이어나가던 소현은 가볍게 종이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양손을 짚으며 맞은편에 앉은 노인과 깊숙이 눈을 맞췄다.
“할아버님. 예전에 지한이 6개월 만나보고 결정하겠다고 말씀드린 거 못 지켜서 죄송해요.”
그리고 강력한 호소를 밀어 넣었다.
“저 정지한하고 결혼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