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지한은 생각이 제 안에서 휩쓸려 나간 듯했다. 노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숨만 내뱉었다. 더스틴의 표정을 살핀 소현이 기울였던 상체를 세웠다.
“부족한 부분 있으시면 지금 말해주세요. 저도 그에 따른 방안을 강구해야 해서요.”
“……부족하긴.”
노인이 돌연 크게 호통쳤다.
“해야지, 해야하고 말고!”
주름진 손이 더스틴의 양쪽 어깨를 강하게 짚었다. 놀란 더스틴이 노인을 쳐다보았다.
“자네도 찬성이겠지? 그래야만 하네.”
“…….”
더스틴은 제 몸에 손을 댄 노인의 행동에 답했다.
“……네.”
단출한 대답이지만 지한이 먼저 청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제 의견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훨씬 전부터 독자적인 기질 보이던 지한이다.
더스틴은 소현을 부둥켜안는 노인을 두고 두 사람의 미래를 정리해둔 일정표를 보았다. 결혼식과 아이, 그리고 이곳엔 없지만 이보다 훨씬 뒤에 펼쳐질 나날들까지 더스틴의 눈에는 보이는 듯했다. 업무를 목적으로 방문한 한국이지만 이렇게 색다르고 놀라운 보고를 받을 거라고 생각 못 했다. 더스틴은 미소를 띤 채 종이를 시선으로 문질렀다.
“신기하군. 너는 체계가 없는데, 이 여자는 체계가 확실하구나.”
지한은 고개를 기울이며 움푹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안에 법을 세운 여자니까.”
소현에게 더는 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지한을 재정비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함부로 저를 무너뜨리는 여자다.
지한은 이대로 지금 당장 소현을 끌고 집에 가고 싶었다. 침대에서든, 차에서든 질펀하게 지금 이 감정을 쏟아내지 않으면 안 될 기분이었다. 슬슬 한계치에 다다른 터라, 지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아버님. 죄송하지만 상견례는 한국에 직접 방문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더스틴에겐 오늘 스케줄도 비서의 까다로운 조율을 거친 뒤에야 허락된 시간이었다. 바쁜 걸 잘 알면서 요구하는 이유가 궁금해 더스틴이 침묵하자 소현이 지한을 바라보았다.
“어머님이 이곳에 계시니까요.”
그 순간 지한은 몸에서 피가 빨려 나가는 듯했다. 소현이 제 어머니를 알고 있었다. 더스틴은 지한을 살피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합시다. 날짜는 서로 맞춰야 하니 내게도 연락해줘요. 바트와 얘기해보고 시간을 빼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은 소현이 지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지한은 제게 전해지는 온기를 인지하며 조금씩 굳은 눈가를 구겼다.
소현이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한 번도 그를 눈치챌 만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기에. 거센 시선을 느낀 소현이 한숨을 내쉬며 지한을 보았다.
“놀라지 마. 나도 결혼만 아니면 평생 모른 척하고 싶었으니까.”
저를 바라보는 표정이 평소와 마찬가지라, 지한은 가슴이 쓸린 것처럼 욱신거렸다. 저 무던함에 속아 몰랐던 거다. 한편으로는 제가 알지 못하도록 얼마나 무던하게 노력해왔을지 생각해보니 지한은 시야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그런 과거가 있었느냐며 위로해주었더라면 이런 기분까지는 아니었을 거다. 동정은 지한이 혐오하는 감정이지만 소현이라면 고맙게 받아들였을 거였다. 나를 이해해주는, 내 슬픔을 감싸주려는 의도쯤으로 여기며 너를 안았을 텐데.
소현은 함부로 어머니를 제 앞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저 모른 척하며 배려하는 쪽을 선택했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나로 하여금 네 상처를 치유해주겠다는 자만도 부리지 않으면서.
어머니가 떠난 이후 오랜 기간 상담을 받아왔던 지한은 제 슬픔을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었다. 함께 노력해 슬픔에서 벗어나자고 다가오는 사람들. 그래봤자 제가 느끼는 감정의 발끝만치도 느끼지 못할 타인들이었다.
“지한아, 너는 어떠냐? 결혼 이대로 진행할 게야?”
지한은 소현의 손을 힘주어 움켜잡았다.
“할애비 기뻐해도 되는 게야?”
하지만 이 순간 절실히 깨닫는다. 그동안 네가 손대지 않았던 내 과거가 너로 인해 보호받고 있었다는 걸. 말뿐인 위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저를 잡아주는 손길이 일깨워줬다.
“내가 끌리는 여자인데.”
평생 이 손을 잡아도 되겠다고.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말하지 않아도 나를 전부 알고 있는 네게 뭐든 허락해도 되겠다고.
소현은 옅게 웃음을 흘렸다.
“저희 뜻 두 분께 전했습니다.”
지한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여자였다.
그 점이 심장을 흔들다 못해 헤집어 놓았다. 지한은 감정을 견딜 수 없어 일어났다.
“먼저 가. 급해.”
“그럼, 그래라. 난 사위와 얘기 더 하고 가마. 결혼에 대해서 해야 할 얘기도 많을 테니까 말이다.”
노인은 한껏 기쁨에 들뜬 상태였다. 원수처럼 생각했지만 딸아이가 그렇게 되고 난 뒤 서먹서먹하게 지내던 더스틴과의 경계도 무너졌는지 실실 웃음이 나왔다. 문을 나서려던 지한의 발이 멈췄다.
“근데 6개월은 뭐야.”
반쯤 돌아온 시선이 노인의 만개한 안면으로 날아가 꽂혔다.
“나 몰래 둘이 재미 좀 봤나 본데.”
소현은 제 발이 저린 것처럼 움찔하며 지한의 팔을 양팔로 감쌌다.
“할아버님, 아버님. 실례하겠습니다, 내일 연락드릴게요.”
“크흠. 그래, 소현아. 가보거라.”
서둘러 소현이 시한폭탄을 끌고 나갔다. 문턱을 넘자 위험하게 번득이던 회색빛 눈동자가 진해졌다.
“뭘 했어.”
“할아버님은 예전에 우연히 만나서 얘기 나눈거야. 내가 너에 대해서 더 알고 싶기도 해서. 할아버님이 너와 가까운 분이잖아.”
“6개월?”
“그건 나 남자 6개월 이상 만나본 적 없다고, 그 얘기야.”
6개월만 만나보겠다고 한 제 과거 발언도 문제였지만, 노인 역시 지한이가 알면 안 된다고 당부했던 만남이라 소현은 책임감이 육중해지는 걸 느꼈다. 노인을 본능적으로 감쌌지만 지한을 통해 들어야 했을 어머니 얘기를 식사 자리에서 꺼낸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지한의 어머니 얘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혼을 하기로 한 이상 양가 부모님도 중요한 사안이니까. 소현은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 결박했던 지한의 팔을 놓아 주었다.
“너 몰래 알아봐서 미안해.”
솔직하게 얘기한 소현을 지한은 몸으로 몰아붙였다.
“미안하면 갚아야지.”
벽으로 밀착된 소현은 등골이 저릿해졌다. 짐승처럼 원초적인 얼굴이었다.
“오늘을 위해 내가 이틀 동안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오히려 네가 뭘 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좋다는 감상이라도, 읏…….”
돌연 고개를 숙여 귀 끝을 깨무는 지한 때문에 소현의 목덜미로 소름이 일었다. 느릿한 턱짓으로 잘근잘근 씹던 지한이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 귓바퀴의 곡선을 쓸었다.
“나 섰어.”
타액이 눅눅해진 곳으로 젖은 음성이 밀려왔다.
“만져 봐. 얼마나 커졌는지.”
시선을 내린 소현은 입안의 수분이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가 제 고백이 어땠는지 듣고 싶었는데, 정지한은 몸으로 표현하는 남자였다.
“네 얘기에 계속 이 상태였지.”
근육이 성성한 허벅지가 소현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며 밀착했다.
“……제발 좀. 밖에서 이러지 마. 아…….”
그 말을 묵살하며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는 지한 때문에 소현의 살결이 전율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사이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지, 또 사람이 타게 될지도 몰랐다. 소현이 CCTV 카메라를 주시하며 지한의 팔을 잡았다.
“알았으니까, 지한아. 내가 차는 좁아서 싫거든. 집까지만 참아 봐.”
“만져보고나 얘기해.”
낮은 어조가 그게 가능하겠냐는 식으로 소현을 조여왔다.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전부 느껴졌다. 한계에 다다른 지한은 곧 터질 것처럼 팽창한 채로 소현의 배를 흉포하게 건드렸다.
“끝까지 안 만져주네.”
“만지면 너 또 버튼 눌릴 거잖아.”
“버튼은 이미 아까 눌렸어.”
미끄러지듯 지한의 중심이 블라우스 위로 문질러졌다.
“네가 거기 혼자 예쁘게 앉아 있을 때부터 하고 싶었어.”
소현은 뱃속이 간질간질해졌다. 안이 들끓는 기분이었다. 머리를 벽면에 기대자 퇴폐적으로 젖은 눈동자가 소현을 끈적하게 시선으로 마찰해왔다.
“집까진 못 가.”
단호한 음성이 벌어진 입술을 헤집었다.
“여기서 한번 해.”
소현은 밝게 불이 들어온 로비 버튼을 보며 떠올렸다. 이곳이 호텔이라는 것을.
*
체크인을 마치고 호텔 방에 들어오자마자 소현은 지한에게 얼굴을 붙잡혔다.
“으응……!”
밀려오는 혀를 받아들이느라 비음이 샜다.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핥는 느낌에 벌어진 점막이 헐떡거렸다. 매트하게 바른 립스틱은 이미 지한의 혀끝에 의해 전부 헐벗겨지며 사라졌다. 커다란 손이 소현의 목선을 움켜쥐며 쓸어올렸다. 가녀린 턱이 위로 향하자 지한이 다시 정교하게 입술을 붙였다.
“으음……응…….”
문지르며 입술을 오므렸다가 벌리자 입안으로 서로의 입술이 맞물리듯 교차되었다. 치열에 부딪치고 쓸리는 느낌이 화끈거렸다. 넘어온 혀와 타액이 점성을 이루며 소현의 목으로 고였다. 삼키는 것을 본 지한은 거친 숨을 흘리며 소현의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차례대로 씹어댔다. 아프기보단 오히려 자극적이라 소현의 허벅지가 움찔거렸다.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은 지한은 그곳으로 제 허벅지를 끼워 맞춰 마찰했다. 아래가 압박된 상태로 쓸리자 소현이 아래를 퉁겼다.
“하아!”
고개가 비틀릴 정도로 강한 자극이었다. 잠깐 입술이 떨어진 사이에 본 혀가 매끈한 빛을 머금어 야했다.
“……지한, 음…….”
혀가 다시 들어와 소현의 말을 막았다. 블라우스 단추를 푸는 손길이 우악스럽고 성급했다. 살결이 화끈거리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열기에 꼿꼿해진 부위는 브래지어가 갑갑하다는 듯 자꾸만 지한에게 내밀어졌다. 풀어달라는 애원처럼. 순식간에 흥분의 궤도에 올라온 소현을 지한이 벽으로 몰아붙이며 동시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읏!”
척추와 배가 아릿했다. 블라우스 단추 사이로 밀려온 손이 브래지어를 파고들며 정확히 소현이 갈구하던 곳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조였다. 소현의 턱이 움찔하며 경련했다. 지한의 혀가 깊게 밀려오며 파고들었다. 소현의 목 안에서 쩔꺽거리는 마찰음이 빚어졌다.
“흐응……으…….”
손가락을 조였다가 풀며 지한이 입술을 뭉갰다. 읏, 소현의 숨이 빨려 나갔다. 목에 두른 손끝을 구기자 안쪽 깊숙이 혀를 쑤셨다가 뺀 지한의 눈동자가 혼탁하게 번들거렸다.
“아이 가지고 싶어?”
소현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