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너 그럼……으응…….”
정점을 건드리는 지한 때문에 소현의 목소리가 흐트러졌다. 소현은 다시금 앙칼지게 눈을 치떴다.
“나랑, 결혼하면서 애는 안 낳을 거였어?”
“솔직히 아이 생각은 없었지.”
소현을 제 옆에 붙여둘 요량으로 결혼도 원했던 거였으니. 제 것이 잔뜩 묻은 입술이 야릇하게 벌어졌다.
“이렇게 생각이 다르네. 나는 네가 결혼하자는 얘기하자마자 아이부터 떠올렸는데.”
지한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런데 소현이 아이를 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널 닮은 자식을 낳아봐야 비로소 알 거라고 했다.
“우리 사이에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어떨지 넌 궁금하지 않아? 얼굴 중에 어디가 너를 닮고, 성격은 누구를 닮을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어떻게 사랑이 완성되는지.
“나는 너 볼 때마다 혼자 속으로 상상했어. 꽤 여러 번…….”
지한의 시선이 소현의 얼굴을 문지르는 것처럼 지나갔다.
“당장이라도 할까.”
찰칵, 차갑게 벨트가 풀리는 소리에 소현의 눈동자가 흐트러졌다.
“그동안 네 안에 그냥 넣어보고 싶었는데.”
억압하던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내린 지한은 곧바로 소현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빠르게 소현의 바지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고스란히 노출된 탐스런 허벅지 위로 지나가는 손길에 골반이 비틀렸다. 추격하듯 오므라진 다리 사이로 손이 감기며 들어갔다.
“끝내줄 거 같아.”
“아!”
외마디 탄성이 튀어 나갔다. 소현의 안에 스며든 손끝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가까이에서 부딪쳐오는 은회색 빛 눈동자로 윤기가 흘렀다.
“지금도 이렇게 손에 감기는데 맛들이면 어쩌지.”
얼마나 저를 짜릿하게 핥아줄지, 지한은 손가락으로 미리 가늠했지만 상상을 이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 것을 온전히 끌어안고 감싸 달라붙는 소현을 맛보고 싶어 안 그래도 흉포해진 성미가 더욱 고개를 쳐들었다. 지한은 장난을 그만두고 소현의 허벅지 한쪽을 잡아들었다.
“아, 그렇게 갑자기……!”
훤히 저를 향해 모습을 드러낸 곳으로 질척한 시선이 고였다. 소현이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속삭였다.
“정지한.”
“왜.”
“침대가 코앞이잖아? 꼭 여기서 이래야…….”
“오늘은 방 전체를 쓸 생각인데.”
우아하게 발끝이 선 다리를 보며 지한의 시선이 올라왔다.
“많이 할수록 성공 확률도 올라가지.”
살짝 굳은 얼굴을 보니 지한 역시 궁금해졌다. 지한은 참을 수 없어 소현의 이마를 입술로 더듬으며 거친 숨을 흘렸다.
“나 녹여줘.”
우리에게 과연 어떤 아이가 찾아올지.
*
철중은 이제 늦은 밤중에 저를 찾는 남자가 이상하지도 않았다. 다만 의아한 건 3주가 넘도록 남자가 요리 학원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래 제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세 번은 반드시 지켰는데 흥미가 식은 걸까.
그러다 문득 일생일대의 도전처럼 12시까지 상차림을 완성했던 그날이 머릿속에 스쳤다. 그래, 그날 이후 남자는 요리 학원에 지금 처음 오는 거다.
“아, 수강생분 오셨습니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자동문이 열리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밖에 눈 많이 내리죠?”
남자는 말없이 벗어낸 가죽 장갑으로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냈다.
“내일 저녁까지 내린다는데 아무래도 꽤 쌓일 거 같습니다.”
안 그래도 차가워 보이는 눈동자인데 평소보다 그 냉기가 배로 느껴져 철중은 안면 근육을 쭈욱 당겨야만 했다.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 봅니다. 학원에 오랜만에 와주셔서…….”
이상하다. 앞치마를 맨 철중과 달리 남자의 손에는 애지중지 끼고 다니던 칼집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길쭉하게 포장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철중이 빤히 바라보자 장갑을 코트 주머니 안으로 쑤셔 넣은 남자가 그걸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열어 봐요.”
눈이 묻어 젖은 머리카락 사이 너머 남자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다가왔다. 철중은 마른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상자를 받아 들었다. 알 수 없는 무게감이었다. 안에 뭐가 들었을지. 나무 상자를 단단히 고정시킨 이음새를 풀자 달칵, 하며 뚜껑이 열렸다.
“아니, 이건…….”
철중은 주춤했다. 상자 안에 담긴 건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로마네 꽁띠 1974년산이었다. 그 귀하다는 빈티지 와인을 본 철중은 검은 보디를 타고 흐르는 색채에 눈이 먼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표정을 면밀히 살피던 남자가 물었다.
“입맛에 안 맞아요?”
“아니요, 아닙니다. 이걸 어떻게 구하셨는지……아니, 그보다 이 귀한걸 제게 선물로 주는 겁니까?”
대답하듯 고개를 가볍게 까딱하는데 철중은 왈칵 눈물이 터질 뻔했다. 선물이라니.
“그때 도움을 받았는데 말로만 때울 수가 없어서.”
그동안 많은 수강생들에게 가르침에 대한 답례로 선물을 받아왔지만 이 수강생에게 받는 건 뭔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철중은 남자와 처음 만남부터 시작해 요리를 함께 만들어나가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쳤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철중은 애꿎은 앞치마로 손을 문질렀다.
“이 차 한 대 값이나 다름없는 걸……수강생분이 제 수업에서 얻은 게 있다면 저는 그거로 충분합…….”
“선생님.”
한 번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철중은 놀라 답했다.
“네. 수강생님.”
“제가 결혼을 하게 됐는데.”
남자는 요리 테이블에 한쪽 허벅지를 걸쳐 앉으며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선생님 덕분에 가능하게 된 거나 다름없어서요.”
결혼을? 그때 그럼 프러포즈를 한 걸까? 이제야 남자가 요리 과정에 매순간 비장하게 임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그보다 제 덕분이라니…….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선생님이 해냈습니다.”
철썩, 거센 파도가 철중을 가슴을 적셨다. 물결과 같은 감정의 여운이 심장에서 뜨겁게 잔류했다. 지금껏 요리는 감정의 교류라고 생각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던 철중이다. 정성을 담아 요리한 음식이 상대방의 입에 들어갔을 때 제 노력과 진심이 함께 전달된다고 생각해왔다. 요리는 국가와 인종, 그리고 언어도 필요 없는 위대한 교감이었다.
“그래서 고맙다고요.”
남자의 입에서 요리를 통해 결혼하게 되었다는 말이 나오니, 철중은 제 자부심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역시, 감사합니다.”
까다롭고 어려운 수강생이었다. 이 남자를 과연 제가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고민했던 나날이었다. 그때마다 한 번 알려준 것은 잊지 않는 것과 요리할 때만큼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철중의 안에서 끈기를 발동시켰다.
“수강생님 덕분에 저도 이젠 이 세상 어떤 수강생이 오더라도 무섭지 않습니다.”
남자가 뚫어지게 철중을 주시했다.
“그리고 제가 해내다니요, 저는 그날도 레시피를 알려만 드렸지, 전부 수강생님이 직접 손으로 만든 요리가 아닙니까.”
한 사람을 감동시켜 프러포즈에 성공할 정도로 남자의 솜씨가 뛰어났다는 거니까. 솔직히 철중은 남자의 요리 실력이라면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다고 보증할 수 있었다.
“결혼 정말 축하드립니다.”
남자가 매끈하게 뻗은 손을 내밀었다.
“정지한입니다.”
“……네? 아, 네.”
철중은 얼떨결에 남자의 손을 잡았다. 정지한이라, 이름을 들은 철중은 실없이 웃음이 났다.
“이름도 잘생겼습니다.”
지한은 손을 놓으며 눈썹 끝을 치켜세웠다.
“아부를 잘하네요.”
“……너무 티 났습니까?”
“아니요. 난 아부 잘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철중이 허허 웃음을 흘렸다.
“제가 아첨 하나는 타고나서 끝내줍니다. 아, 결혼식은 언제 하십니까?”
“내년 7월이요.”
“어이구, 준비할 것도 많을 텐데 빨리하시네요?”
“늦게 하는 건데요. 소현이가 워낙 바빠서요.”
소현이? 아, 남자의 동거인. 이제는 예비 신부가 된 여자를 머릿속에 입력한 철중이 물었다.
“예비 신부님께서 바쁜 직종에 종사하시나 봅니다.”
“다시 말해 봐요.”
실수를 감지한 철중의 입이 합죽이가 되었다. 남자는 원래 제 사생활을 간섭하는 상황을 꺼려 했었다.
“듣기 좋아서.”
지한은 그 불안감을 노곤하게 풀어주었다. 철중은 들뜬 사람처럼 다시 신명 나게 떠들었다.
“앞으로 훨씬 더 많이 듣게 될 겁니다. 예비 신부님은 어떤 분인지 물어도 됩니까?”
“봐서 알지 않나요. 내가 요리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하기야 주는 것만 받고 제가 자발적으로 남을 챙기지는 않을 것처럼 생긴 남자였다. 그가 요리를 하지 않을 때 모습을 보자면 태연하다 못해 느긋했고 모든 것들에게 무관심했다.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도 크게 한몫했지만.
“내가 앞으로 뭘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도전하는 보람도 주고.”
그런데 지금은 남자가, 아니 정지한이라는 사람이 그리 어렵지 않은 느낌이었다.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지한이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무엇보다 예뻐요. 남자 다 후리고 다닐 정도로.”
아……외모를 따지는구나. 철중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저렇게 생긴 남자가 예쁘다고 말할 정도면 대체 미모가 얼마나 뛰어나기에.
“결혼식에 초대해주신다면 그때 예비 신부님도 뵙고 싶은데요?”
철중은 사진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알아서 완급 조절을 했다. 지한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한국에서 한번, 미국에서 한 번 할 건데.”
“네? 아……결혼식을 양쪽에서…….”
철중을 주시하는 은회색 빛 눈동자가 생기 있게 번득였다.
“할 수 있어요?”
철중은 얼떨결에 답했다.
“그……럼요. 해야죠. 초대만 해주신다면…….”
스케줄이야 조절하면 되니까……한국에서만 참석하겠다는 소리는 차마 나오지 않았다. 지한은 입술 끝을 올리며 읊조렸다.
“내 예비 신부가 미식가라.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그럼요. 안 그래도 퓨전 요리 쪽으로 방향을 틀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중식도 한 번 도전해 보시죠.”
그때 짧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코트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을 꺼낸 지한은 액정을 보았다. 소현이 보낸 문자였다.
“거기에 추가로.”
지금 퇴근한다는 글자를 본 지한이 윤기 나는 웃음을 입가에 묻혔다.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