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물살이 넘실거리는 한강이 아름다웠다. 빛의 물결이 창가를 넘어와 펜트하우스 거실 벽면을 따스하게 비추었다.
벽에 걸린 커다란 액자 안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본 채였다. 그 옆의 액자 속 사진에서는 야외 피로연의 열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는 남자의 은회색 빛 눈동자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야경이 아름다운 뉴욕 도시를 배경에 두고 서로의 허리를 팔로 감은 채 찍힌 사진, 노인과 더스틴이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모여서 찍은 가족사진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지난 추억이 간직된 벽 너머로 사진 속 두 사람이 침대에 뒤엉켜 누워 있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알림음에 가장 먼저 반응한 남자가 햇살이 넘어온 창가를 바라보았다. 은회색 눈동자가 유리처럼 빛을 반사했다.
미끄러지듯 살결을 드러낸 채 잠든 여자의 이마 위로 남자가 입술을 눌렀다. 혀로 건드리자 고운 미간이 구겨졌다.
“으음……몇 시야?”
그새 귓바퀴로 움직인 입술이 갈라진 목소리를 좁은 동굴 안으로 흘렸다.
“7시 30분.”
평소보다 30분이나 늦게 깬 건데, 소현은 좀처럼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어제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진 것도 있지만 돌아오자마자 지한과 육체적 대화를 나누느라 새벽 늦게 잠들었다.
체력 보강한다고 운동을 예전보다 더 체계적으로 하면서 몸을 관리하는데도 아침에 이렇게 천근만근 몸이 무거울 때면 소현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불 안에서 제 허벅지를 찔러오는 공격적인 형태는 아침부터 이렇게나 건강한데.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에 소현은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나 출근해야 돼.”
“알아. 10분 안에 데려다주면 되지.”
“무슨 수로, 도로에 너 혼자 달리니.”
지한은 시선을 내리깔며 녹을 것만 같은 음성이 울리는 목을 입술로 빨아당겼다.
“그럼 10분만 지각해.”
“아…….”
흡력에 소현이 가느다랗게 소리를 흘렸다. 이불에 가려진 가슴으로 입술이 점차 내려갔다. 펼친 손을 한데 모으자 흘러넘치듯 솟은 탐스러운 살결이 탱탱했다. 한입 베어 무는 행위에 소현은 허리를 들썩이며 침대 위로 작은 진동을 일으켰다.
그때 얌전하던 문고리가 덜그럭거렸다. 소현은 턱까지 올라온 신음 때문에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내 문을 콩콩 두들기자 소현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올라갔다.
『엄마.』
문 너머로 들리는 미성에 소현이 빠르게 대답했다.
“응, 유준아. 엄마 일어났어요.”
『아빠는요?』
“아빠는…….”
소현의 시선이 내려갔다. 그만하라는 듯이 얼굴을 감쌌지만 느긋하게 이완된 턱 근육이 허벅지를 깨물었다. 읏, 입술을 서둘러 깨물며 소리를 삼킨 소현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금방 나갈게요. 우리 유준이, 쉬야 먼저 하고 있자. 혼자 잘할 수 있죠?”
『네에.』
“야, 그만해.”
지한의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기며 경고했지만 입술의 점도는 더 끈질겨졌다. 하는 수 없이 이불을 거둬내자 다리 사이에 파묻혀 머리를 들썩이는 퇴폐적인 장면이 들어왔다. 소현은 허벅지를 오므리며 얼굴을 꽉 조였다.
“정지한, 그만하자고. 애 일어났잖아.”
허벅지 사이에 갇힌 주제에 끝까지 입술로 간지럽게 입을 맞춘다. 소현이 억지로 달아오른 숨을 삼키자 허벅지를 문지르던 손이 시트를 밀어 올리며 어제 사용한 콘돔을 찾아 움켜잡았다. 지한이 고개를 들며 쓰레기통으로 그걸 집어 던지며 일어났다.
“애가 아침잠이 없네.”
“유치원 가야 하는데 일찍 일어났으니 기특한 거지. 우리가 잘못된 거고.”
깨우지도 않았는데 일어나 문까지 두들기니 효자라며 소현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먼저 침대에 내려간 지한은 제가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콘돔을 마저 주워들고 정리했다. 소현은 몸 선을 무방비하게 노출하며 침실 욕실로 걸어갔다.
“나 먼저 씻는다.”
“어.”
그 모습을 감상하던 지한이 시트를 잡아당겨 품에 안아 들었다. 잠금장치를 풀며 문고리를 열자 저를 똑 닮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 엄마는요?”
나를 닮아서 그런가. 눈만 떴다 하면 엄마부터 찾는다. 지한은 저를 복제해놓은 듯한 얼굴을 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샤워해, 쉬는 쌌어?”
“안 쌌어요.”
할 수 있냐는 소현의 물음에 대답해놓고선 안 갔단다. 말만 하고 버티는 모습이 또 저 같아 지한은 손으로 자그마한 머리 뒤를 감쌌다.
“엄마 말 들어야지.”
지한은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다 유준을 살짝 밀어주며 욕실로 들어가게 했다. 세탁실에 시트를 놓고선 지한은 다시 욕실을 찾았다. 저 혼자서 씩씩하게 세수를 하고 이를 닦는 모습을 지켜보던 지한은 거울에 비친 아이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7시 40분.
“옷 혼자 입을 수 있지.”
“응.”
“어젯밤에 골라놓은 거 그대로 입어.”
지한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아이의 얼굴을 문지르고선 욕실을 나섰다. 이리저리 뻗친 제 머리를 정돈할 새도 없이 주방에 선 지한은 냉장고에서 계란과 미리 손질해둔 재료를 몇 개 꺼냈다. 간이 안 된 음식과 한 사람에게 맞춤으로 한 음식을 따로 준비하는 손길은 익숙했다.
제일 먼저 야채 볶음밥을 완성시킨 지한이 식탁에 앉아 있는 유준의 앞으로 내밀었다. 유준은 숟가락을 든 채 계속 침실 쪽을 힐끗거렸다. 지한은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봐도 엄마 안 와.”
그제야 유준이 퉁명하게 대꾸했다.
“엄마 오면 같이 먹을래요.”
“엄마는 엄청 빨리 먹어. 너는 입이 작아서 늦으니까 먼저 시작해.”
“나 입 커요!”
유준이 아, 하면서 아기 새 같은 입술을 크게 벌렸다. 지한은 그 안으로 어린이용 빨대 물병을 가져다 대었다.
“쭉 빨아 봐.”
유준이 입술을 오므리며 빨대를 힘차게 빨아당겼다. 쭉쭉 긴 대를 타고 올라가는 물줄기를 본 지한이 흡족하게 시선을 들었다.
“제법인데. 다 빨아 마셔.”
양손으로 물병을 잡고 마시던 유준은 문득 배가 고파졌다. 하는 수 없이 지한이 만들어놓은 볶음밥을 먼저 한 입 먹었다. 오물오물하던 입안으로 또 한 번 숟가락이 움직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말린 소현이 풀어진 블라우스와 바지를 입은 채 걸어 나왔다. 야무지게 밥을 먹던 유준의 눈이 커졌다.
“엄마, 잘 잤어요?”
“네. 우리 유준이 밥 먹고 있었어요?”
“아니요, 엄마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어요.”
“기특해라.”
조그마한 입가에 묻은 밥풀을 미끈하게 쓸어 떼어낸 소현이 그걸 제 입안에 넣으며 앉았다. 유준은 혼자 힘으로 세수도 하고 쉬도 쌌다며 조잘조잘 떠들었다. 소현은 기특하다, 잘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회사에선 팀원들을 조이고 압박하는 독재자로 불리지만 제 아이에겐 선량한 천사였다. 또박또박 말하는 걸 미소로 지켜보던 소현은 제 앞으로 놓인 그릇에 시선을 들었다.
“아, 고마워.”
“뭘 이런걸.”
지한은 무던하게 응수해주곤 평소처럼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바통을 이어받는 것처럼 소현은 아침을 먹으며 유준의 식사를 담당했다.
“유준이 너무 잘 먹네요, 또 먹어 볼까요?”
“네. 엄마도 먹어요.”
“그럴게요.”
처음부터 체계가 잡혔던 건 아니었다. 임신과 출산, 육아 전부 처음이었던 소현과 지한은 그동안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 경험을 통해 지금의 안정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서로가 전부였던 둘 사이에 책임질 존재가 생겼다는 건 색다른 의미로 관계를 더욱더 끈끈해지게 만들었다.
유준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돌아가면서 육아 휴직계를 내었고, 현재는 지한의 차례였다. 임원이라 완전히 회사 일에 손을 뗄 수 없었지만 자택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방향을 바꿨다. 소현 역시 일상과 업무를 완전히 분리하기 어려웠으나 아이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달콤한 결실을 맛보는 것처럼 소현은 물끄러미 턱을 괸 채 유준을 보았다.
두 사람의 합작인 유준은 소현의 방침에 따라 예의 있게 자랐고, 두 사람의 환경에 영향을 받아 영어, 한국어, 중국어 등 3개 국어를 했다. 얼굴 생김새는 대체로 지한을 닮았는데, 새까만 눈동자와 쌍꺼풀은 저를 빼어 닮았다.
우리를 너무 닮아 신기했다.
“엄마, 저 다 먹었어요.”
소현은 눈웃음 지었다.
“강유준. 아빠가 해준 거 맛있어요?”
“네.”
지한이 한국에선 어머니의 성을 따랐던 것처럼, 유준은 엄마인 소현의 성을 따랐다. 이중 국적이라 한국에선 제 성을 쓰고 미국에선 지한의 성을 붙여 에드워드 다니엘로 불렸다.
지한과 소현은 서로를 이해하며 동화된 것에 비해 그들의 아이인 유준은 두 사람을 흡수한 상태로 태어나 성장했다. 유준의 눈가가 연하게 일그러졌다.
“엄마 여기 빨개요.”
“어? 그러네.”
소현은 유준이 콕 가리킨 목덜미를 무덤덤하게 쓸었다.
“벌레가 물었나 봐요. 금방 없어질 거예요.”
“맨날 엄마만 물고. 벌레 나빠요.”
그리고 어느덧 혼자 힘으로 뭐든 하려고 애쓰고, 엄마를 걱정하는 5살이 되었다.
소현은 터지는 웃음을 흘리면서 유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준아, 엄마 하나도 안 아파요. 벌레가 간지러운 부분을 깨물어줘서 오히려 좋은데요?”
늘 지한이 제 몸에 잔뜩 남겨 놓아 매번 벌레 핑계를 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현은 가볍게 넘겼지만, 아파 보이는 새빨간 자국에 유준의 걱정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소현은 지한이 준비한 음식을 말끔하게 비우고선 식기 세척기에 그릇을 넣어두었다.
“이제 양치하자.”
“네에.”
출근 준비에 정신없어야 할 시간이지만 유준과 함께해서인지 마음속에 없는 여유까지 생긴다.
속도를 즐기던 지한이 아이 때문에 SUV 차량으로 바꾼 것도 변화 중 하나였다.
차에 올라탄 세 사람은 각자 다른 모습이었다. 소현은 조수석에 앉자마자 화장을 하기 위해 선바이저부터 내렸고, 지한은 뒷좌석 카시트에 유준을 앉혔다. 힐끔, 백미러로 소현의 시선이 움직였다.
“나 가방 옆에 둘래요.”
“가방은 바닥에 있고 싶다는데.”
“안 그랬어요.”
지한은 안전벨트를 매주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 귀엔 그렇게 들렸어. 가방이 유준이 발밑을 기고 싶다고.”
둘의 대화를 듣는 소현은 웃음이 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