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그, 그렇죠? 어머님은 벌레에 물렸다고 말씀하신 듯한데, 유준이가 보기엔 그게 거짓말이고 실은 아버님이 잡아먹어서……생긴 거라고 여기더라고요.”
“그리고요.”
“그래서 자신이 얼른 자라서 어머님과 결혼해 지켜줘야 한다고 말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아버님이 어머님과 함께 주무시니까 결혼하면 잡아먹을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거 같아요.”
“귀엽네요.”
“귀……엽다고 생각하시는 것보단, 앞으로 유준이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신경 써주셔야 할 거 같아요.”
“그러도록 하죠.”
“그렇지만 유준이가 아버님을 미워하는 건 아니에요. 엄마를 지켜줘야 한다고 하면서도 지금 자기가 너무 작아서 아버님에게 못 당한다고 말하는 걸 봐서는 흔히 아동기에 보이는 애착 형태이긴 해요.”
이야기를 들으며 지한은 유준이 언제 이렇게 자랐는지 다시금 신기해졌다.
“아버님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니 그건 아니라고 바로 부정하고요. 그리고 어머님과 아버님이 스킨십하는 부분도 유준이는 엄마가 먹힌다고 표현했지만, 그래서 엄마가 싫어하느냐고 물으면 또 아니라고 했어요.”
“애매하네요.”
지한은 팔을 세워 한쪽 머리를 기대었다.
“엄마를 먹는다는 건 제가 키스하거나 자국 남긴 걸 하도 봐서 그런 걸 겁니다. 부부끼리 할 수 있는 표현이고 그래서 유준이가 태어났다고 얘기해왔는데 애정 표현이 과해서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그, 그렇죠.”
“특히 그 자국이.”
“네.”
민망한 얘기를 너무 태연하게 하는 터라, 선생님은 귀가 화끈거렸다.
“그……어머님 자국만 신경 써주시면 될 거 같아요. 그리고 스킨십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잘 설명하셔서 유준이를 이해시켜주셔야 할 거고요.”
“그러죠. 얘기는 다 끝난 겁니까?”
“네, 다섯 살까지는 부모에 대한 애착이 형성되는 시기예요. 아무래도 어머님을 너무 좋아해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저와 더 시간을 많이 보내는데요.”
“아버님과 보내는 시간에 비해 어머님을 많이 못 보다 보니 아빠가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한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알겠습니다.”
지한은 고개를 까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육아는 끝이 없는 기나긴 릴레이를 이어나가는 것과 같았다. 제 나름대로 교육이 순조롭게 돼가는 거처럼 보이다가도, 또다시 부족한 부분들을 발견한다. 아이의 생각과 감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그걸 다시 메꿔나가는 것이 제가 할 일이었다.
차에 탄 지한이 백미러를 보았다. 유준은 안전벨트를 맨 채 비가 흘러내리는 창문을 보고 있었다.
“강유준.”
“네?”
“엄마 보러 갈까.”
그 말에 유준이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냈다.
“엄마는 지금 회사에 있잖아요.”
“비가 오는데.”
지한은 빗물이 묻은 셔츠를 털어내며 말했다.
“엄마가 우산이 없으니까.”
“엄마 비 맞으면 안 돼요.”
어차피 소현이 퇴근할 때 데리러 가는 지한이지만, 지금은 그런 구실이라도 필요했다.
“네가 물어봐. 어떤지.”
통화 버튼을 눌러 유준에게 건네주자 작은 손이 그걸 받아들었다.
“엄마! 밖에 비 와요.”
조잘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지한은 축축하게 자동차를 두들기는 빗소리를 흡수했다.
“네. 아빠가 우산 가져다주러 간대요. 유준이도 가도 돼요? 네. 엄마, 사랑해요.”
통화를 마친 유준이 두 손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빠, 엄마가 회사에 오면 전화하래요.”
“그래.”
유준은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핸드폰을 건네받은 지한이 시동을 걸었다.
“강유준.”
“네?”
지한은 비 내리는 도시를 달리며 말했다.
“아빠는 엄마 말이면 설설 기어.”
“알아요.”
아이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의 권력 구도는 확실했다. 지한은 느릿하게 입을 움직였다.
“아빤 덩치만 커. 실제로 힘이 센 건 엄마야.”
“엄마는 아빠보다 작잖아요.”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지한은 빨간 신호에 멈춰섬과 동시에 셔츠 단추를 풀어 벌렸다.
“이거 보여?”
뒷좌석을 향해 몸을 틀자 가슴에 꾹 찍힌 빨간 자국을 본 유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아빠가 엄마를 잡아먹으면서 생긴 증표였다. 그 자국이 지한의 몸에도 똑같이 있자 유준은 혼란스러웠다. 지한은 유준을 응시하며 말했다.
“벌레가 깨문 게 아니라 엄마랑 아빠가 사랑하면 생기는 자국이야.”
“사랑이요?”
벌레는 역시나 엄마의 거짓말이었다. 그럼 저건……유준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렀다.
“……유준이 몸에는 그거 없는데, 그럼 엄마 아빠는 유준이 안 사랑해요?”
“이건 부부끼리만 생기는 거야. 유준이도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결혼하면 몸에 생겨.”
“정말요? 그럼 엄마랑 결혼하면 유준이 몸에도 생기는 거예요?”
“아니.”
지한은 딱잘라 말했다.
“엄마는 이미 아빠랑 해서 서로 남았잖아. 유준이는 다른 여자랑 해야 돼.”
유준이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유준이도 엄마랑 결혼하고 싶은데…….”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것을 본 지한이 낮게 속삭였다.
“아빠가 먼저 엄마랑 결혼해서 유준이 낳았어.”
“…….”
“유준이 태어나면서 엄마는 평생 아빠 여자 된 거야. 유준이가 엄마랑 결혼하면 아빠는 외로운데.”
놀란 유준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아빠 외로우면 안 돼요.”
“그럼 유준이가 엄마랑 결혼 안 해야 돼.”
유준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러면요, 유준이가 안 할게요. 아빠한테서 빼앗으면 안 되잖아요.”
일직선을 유지하던 입가 위로 가벼운 웃음이 스쳤다.
“그래. 아빠는 엄마 없으면 못 살아.”
핸들을 끈적하게 감싼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현진 기획에 도착한 지한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유준과 함께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전화를 걸자 소현이 재깍 받는다.
「어디야, 벌써 도착했어?」
“지하야. 로비로 가면 되지.”
「어, 나도 지금 내려갈게.」
“안 바빠?”
「유준이가 회사까지 왔는데 바빠도 시간 내야지.」
지한은 유준의 손에 들린 접이식 우산을 보다가 사납게 시선을 들었다.
“나는?”
「넌 덤으로 딸려 오잖아?」
“섭섭한데.”
「질투할 데에 질투를 해야지. 유준이 보다 네가 날 더 많이 보는데 양심 좀 있어라.」
사실이었다. 소현이 퇴근하고 들어오면 유준은 꿈나라로 떠나고 난 뒤라, 지한은 홀로 침실 문을 걸어 잠그고 소현을 독식했다. 아침에 눈을 뜬 제 아들은 엄마 몸에 찍힌 자국을 보며 걱정했다. 지한은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유준을 밀어 넣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봐도 대단한 통찰력이었다. 엄마를 잡아먹는다니. 부정할 수 없는 표현이라 감칠맛이 났다. 혀를 쓸며 지한이 수화기 너머로 말했다.
“빨리 와. 보고 싶어.”
「지금 간다, 가.」
로비에 도착한 유준은 지한의 손가락을 꼭 움켜잡았다. 커다란 어른들이 로비에 득실득실했다. 구경하던 유준은 지한의 다리 옆에 딱 달라붙어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관찰했다.
“아빠, 옷이 다들 하얀색이랑 검은색이에요.”
“따분하지.”
“엄마도 하얀색 입었는데…….”
혹시라도 못 찾을까 걱정하는 어투라 지한이 낮게 속삭였다.
“엄마는 안 따분해서 금방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준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깜빡였다. 지한의 말이 사실이었다. 사람들 틈에 뒤섞여 걸어오는 소현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목을 꼿꼿하게 세운 채 걸어오고 있었다. 입구를 통과한 소현은 잠자코 제자리에 서서 주변을 한 번 빙 둘러보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지한을 발견하고선 성큼성큼 보폭을 넓혔다. 시원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는 소현을 보며 지한이 뇌까렸다.
“봐. 엄마 바로 보이지.”
“엄마!”
유준이 손을 놓고 달려가자 소현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무릎을 구부렸다. 달려온 유준을 껴안고 버릇처럼 안아 든 소현이 다가왔다.
“어딜 세워놔도 전봇대가 따로 없다니까. 한눈에 들어오던데?”
누가 할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지한은 유준에게 말했다.
“엄마 우산 줘야지.”
“네, 엄마 여기요.”
“엄마 안 그래도 비 와서 걱정했는데 유준이가 가져다줘서 다행이에요. 너무 기쁘다.”
소현은 제 어깨 위로 놓인 찹쌀떡 같은 뺨에 뽀뽀하고 싶은 걸 견뎌냈다. 립글로스 자국을 묻힐 수 없기에. 지한은 가까이 다가가 상체를 기울였다. 촉촉한 혀끝이 입술 위로 뭉근하게 비벼지자 소현의 눈이 경련했다. 공들여 바른 립글로스를 닦아내는 행위 때문에 소현의 정신이 잠시 흐트러졌다.
너무나도 대담한 행동에 이곳이 회사라는 것도 까마득히 잊었다. 아랫입술을 진하게 빨아당겼다가 놓아준 지한이 번들거리는 입술로 소현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해.”
꼭 제 생각을 읽은 것처럼. 소현은 헛숨을 흘리며 말했다.
“그럴 거면 아예 네 셔츠 소매로 문질러 닦아주지 그랬니?”
지한은 수지가 안 맞는다는 듯 눈썹을 구겼다.
“네 입술을 빨 기회를 두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뻔뻔한 대답에 소현은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잊은 채 웃음을 터트렸다. 지한이 만들어준 기회니, 살짝 유준의 뺨에 입술을 모아 찍은 소현이 화사하게 웃었다.
“유준이 보니까 엄마 너무 좋은데, 유준이도 그래요?”
“네. 엄마 일하는 곳 처음 와요.”
“엄마는 여기 위에서 일하는데, 나중에 꼭 우리 유준이 데리고 구경시켜줄게요. 알았죠?”
“네.”
“유치원은 잘 다녀왔어요?”
“네. 오늘 있잖아요…….”
“어머, 팀장님.”
소현이 고개를 돌리자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팀원들이 보였다. 신 대리가 땡그랗고 커다란 눈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상에, 팀장님 아들이에요?”
“어……응. 유준아, 누나 안녕하세요. 해야지.”
“안녕하세요.”
“너무 귀엽다. 어떡해.”
곧바로 지한을 발견한 팀원 중 하나가 입가를 가렸다.
“이분은 예전부터 소문이 자자했던 남편분…….”
벌써 몇 년 전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는 열기처럼 소현의 남편은 사내에서 계속 회자되었다. 백 번을 봐도 미지근한 광고가 있는가 하면, 딱 한 번 보았을 뿐인데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영향력을 지닌 광고가 있다.
“정지한입니다.”
지한은 후자였다. 존재감 하나는 확실한 녀석이라 첫 만남부터 강렬했고, 입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전부 소현에게 충격적이고 획기적이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소현에게 자극제 같은 남자였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지한이 아닌 다른 남자는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기에.
팀원들과 인사하는 지한을 보던 소현은 유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떡해, 아이가 아빠를 너무 많이 닮았어요…….”
“제가요?”
조막만 한 얼굴과 앙증맞은 입술에 푹 빠진 팀원들이 금세 유준을 둘러싼 채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지한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소현이 다가가 물었다.
“왜. 네가 봐도 너랑 너무 닮았니?”
“그렇지.”
무던한 말에 소현이 의문스러웠다.
“근데 왜 그렇게 골똘하게 바라보고 있어?”
“생각 중이야.”
“뭘…….”
“어제 너와 어떻게 잤는지.”
소현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었다. 회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대화라 소현이 주변을 살폈다. 팀원들은 또랑또랑 대답하는 유준에게 푹 빠져 이곳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지한의 시선이 매끄럽게 내려왔다.
“오늘 밤에도 나랑 잘 거지?”
외전2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