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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3)화 (3/220)

2화

날씨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고 온 사방에서 꽃가루가 휘날렸다.

황가의 결혼식이 아니면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대신관이 새로운 부부의 탄생을 축복했다.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은 다른 여자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아내에게 헌신하며 성서를 따라 신실한 삶을 살 것을 맹세합니까?”

나엘라는 대신관의 수염이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 둘이 결혼하는데 왜 성서를 따라 신실하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다.

“네. 맹세합니다.”

평균보다 큰 키와 체구를 가진 남자가 낮게 대답하자 대신관이 나엘라를 바라봤다.

“나엘라 마호세르디 공녀는 자신의 가문이었던 마호세르디 공작가를 떠나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만을 바라보고 그에게 헌신하며 성서를 따라 신실한 삶을 살 것을 맹세합니까?”

얼굴까지 가리는 형태의 면사포라 다행이었다. 아니라면 나엘라의 지루함이 모두 보였을 테니까.

“네. 맹세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대신관은 둘이 완벽한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했다.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과 나엘라 마호세르디 공녀는 이 시간부로 부부가 되었으며 신전에서는 이를 승인했음을 선언합니다!”

댕─ 댕─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축포가 터졌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꽃가루 속에서 사람들의 박수 소리와 함성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나엘라는 조금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

다그닥다그닥.

장인이 섬세하게 정성 들여 만든 마차는 대공령으로 넘어가는 거친 길에 접어듦에도 흔들림이 적었다. 한참을 창밖만 보고 있던 나엘라가 맞은편에 앉은 체드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자신도 있고 하녀도 있는 이 마차에 함께 올라탈 줄은 몰랐다. 밀린 서류가 많은 것인지 마차에 타자마자 종이만 들여다보던 그는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제와 똑같은 백금발을 뒤로 넘기고 파란색 눈동자를 내리뜬 체드란은 전쟁광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커다란 체구와 턱에 난 옅은 흉터가 눈에 띄었다.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하니 단정히 가린 옷 안으로는 더한 흉터들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있는 것이 불편한가?”

“딱히.”

옆에 앉아 있던 지안이 말을 길게 하라며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나엘라는 나름 억울했다. 말을 길게 하면 저도 모르게 명령조의 말투가 나올 것만 같은데 어쩌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뒤따라 들린 운에 보라색 눈동자가 대공에게 고정됐다.

“공녀는, 아니 대공비는 공작과 내가 한 계약에 대해 알고 있나?”

자신의 아내를 남 부르듯 지칭하는 호칭 때문일까? 지안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 느껴졌다.

나엘라를 위해서라면 죽는시늉도 하는 지안은 자신의 주인에게 깍듯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장 싫어했다. 그것은 남편이 된 대공이라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있어요.”

일반적인 귀족 영애들과 다르게 자꾸만 딱딱한 말투가 나왔다.

지안의 고개가 자신 쪽으로 휙 돌아온 것이 느껴졌지만 꿋꿋하게 대공만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은 말을 건 대공의 잘못이다.

“말투는 편하게 해도 괜찮소.”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안 그래도 말투가 가장 불편하던 참이었다.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로는 보이지 않겠지만 애초에 그런 결혼이었다. 그런 점에 관해서는 대공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의 계약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결혼 첫날, 신부에게 그 말을 꺼낸 모습에서 체드란이 무심하고 무뚝뚝한 성격이라는 게 단적으로 느껴졌다. 기대한 바도 없지만 평범한 영애였다면 가혹한 처사였다.

나엘라에게는 누구보다 편한 스타일이고.

“전부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적인 결합이라 떠드는 것도 알고 있겠군.”

“알고 있습니다.”

“소문을 조금 바꾸고자 하는데 원하는 것이 있는가.”

무뚝뚝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나엘라의 의견조차 고려하지 않을 테니.

“세기의 로맨스, 이런 소문이 필요하십니까?”

“이왕이면 그런 쪽이 낫지.”

“보는 눈들이 많아 쉽게 믿진 않을 겁니다.”

“어느 정도는 행동으로 보여 줄 필요가 있겠지.”

세기의 로맨스, 그 정도의 소문이 나기 위해서는 그리 큰 행동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니까.

다만 시발점이 될 행동들이 필요했다.

“파티에 함께 참석하고 다정한 모습을 보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체드란은 잠시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론 부족할 것이다.”

“그럼 생각해 둔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저택 내에서 하루 한 번 산책하는 정도로 하지. 다들 내가 바쁘다는 걸 알 테니 그것만으로도 소문의 단초가 되지 않겠나. 앞으로 차차 늘려 가면 충분할 것 같군.”

나엘라의 말투, 시선, 딱딱한 행동들은 저택에만 머물렀던 영애가 가질 것들이 아니었다. 체드란이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시간은 많다. 확인하게 될 날은 언제고 올 것이다.

“계약 조건 중에 이혼 불가 조항이 있다. 알고 있나?”

“두 사람이 동시에 원하지 않는 이상 한쪽의 일방적인 이혼 요청은 불가하다는 것 말입니까.”

“알고 있군.”

“계약서를 직접 봤으니까요.”

“그런 조항이 왜 들어갔는지 알고 있나?”

이혼 불가 조항. 귀족 사회에서 흔하다면 흔하고, 흔하지 않다면 절대 흔하지 않은 조항이다.

이혼 불가 조항은 보통 권력이 강한 가문 쪽에서 건다. 거액의 혼인 지참금을 주고 아내를 사 오는 경우다. 상대의 폭력성을 안다 해도 약소한 가문은 모른 척 그 부당한 조항을 받아들인다. 약소한 가문에게 이혼은 흠이고 강한 가문에게 이혼은 흠이 아니니 흔하면서도 흔하지 않은 조항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대공가가 마호세르디보다 낮은 가문은 아니지만, 권력도 돈도 이미 가진 마호세르디 공작가에서 먼저 그 조항을 요청했다는 건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 결혼 생활에 문제가 될 만한 결함이 있는가?”

“결함 말입니까?”

“성격적으로는…… 지금 봐서는 모르겠군. 신체적인 결함이 있는 걸 수도 있고.”

“신체적인 결함이라면 어딘가 장애가 있는지 묻는 겁니까?”

“혹시 아이를 가질 수 없는가? 후계 문제 때문에 이혼을 염려한 공작이 그런 조항을 넣었나 싶어서 말이네.”

“후계라면 정확히 모르겠군요. 여성적인 신체 문제는 없었으니 아이 낳는 것에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럼 신체적인 이유는 아니라는 거군.”

쾅─

지안이 주먹을 쥐고 의자를 내리쳤다. 얼마나 강하게 내리쳤는지 마부가 창문을 열어 봤을 정도였다.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

이 악물고 내뱉는 말에 체드란과 나엘라가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대체 어떤 신사분이 오늘 결혼한 자신의 아내에게 신체적인 결함을 묻는답니까?”

그제야 체드란이 ‘아……’ 하는 멋쩍은 소리와 함께 눈을 피했다.

“대공비 전하? 자신에게 무례하게 군 남성의 뺨을 쳐도 모자랄 판국에 대체 어떤 레이디가 신체에 문제가 없다며 화답해 준답니까?”

“아…….”

이번엔 나엘라가 눈을 피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체드란이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기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눈을 피하는 두 사람을 보며 지안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았다. 원래 이런 쪽으로 나엘라가 둔하기도 하고 사교계에 대해선 아주 기본적인 예법만 배웠으니 그렇다 치지만 대공 전하도 다를 바 없다니. 앞길이 구만리라는 걸 알게 된 지안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에 나엘라의 시선은 창밖으로, 체드란의 시선은 서류로 떨어졌다.

무례에 대한 사과나 대화의 마무리도 없이 약속이나 한 듯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어 버리는 둘의 모습에 지안의 한숨은 더욱 깊어졌다. 그런 지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둘은 대공령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마호세르디 공작가가 서쪽 국경이라면 노헤스카 대공령은 남쪽의 국경이었다. 제국의 북부 끝과 동부 끝이 모두 바다니 실질적인 국경은 서쪽과 남쪽밖에 없는 것이었다. 국경의 가장 강한 군사력을 가진 두 곳이 결혼으로 묶였으니 황좌를 넘본다는 소리가 나올 만도 했다.

노헤스카 대공령이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풍경도 급격히 변해 갔다. 노헤스카는 남부 야만족이라 불리는 두칸과 맞닿아 있어 건축 양식이나 사람들의 표정과 자세에서 거친 느낌이 물씬 풍겨 왔다.

세간에 알려진 체드란 노헤스카의 느낌과 딱 맞는 곳이었다. 거칠고 적에게 자비란 없는 전쟁광. 그의 기사단도 딱 그와 같은 느낌이라던데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창문을 훑는 나엘라의 손끝에서 낯선 설렘이 올라왔다. 끼고 있는 장갑 너머로 창문의 차가움이 전해졌다.

나엘라는 체드란을 모른다. 식사 자리 한 번과 결혼식장에서 본 그는 그저 말이 없는 남자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체드란도 나엘라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공작가의 병약한 막내딸이란 소문과 오늘 잠깐의 대화, 그리고 그녀도 그만큼 말수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어느 순간 저 끝부터 하나의 요새 같은 대공저가 보이기 시작했다. 수도의 하얗고 색색의 화려함이 가득한 건축 양식이 아니라 오로지 본연의 목적에만 충실하게 지어진 거대한 본관과 회백색 별관들이 주를 이었다.

“곧 도착입니다.”

마부의 말과 함께 정문을 통과한 마차는 점점 속도를 줄였다. 마차가 완전히 멈췄을 때 정갈한 노크 소리와 함께 마차 문이 열렸다. 본관 앞에 하녀들과 사용인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가장 앞에는 집사로 추정되는 남자가 서 있었고, 그 옆으로 갑옷과 칼을 차고 있는 기사들도 보였다.

체드란이 먼저 마차 밖으로 내리곤 나엘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지안이 허겁지겁 나엘라에게 숄을 둘러 주고 챙이 넓은 모자까지 건네었다.

“모자는 됐어.”

나엘라는 모자까지 써서 얼굴을 가릴 생각은 없었다. 이곳은 앞으로 그녀가 평생을 살아야 할 곳이다. 새 식구에 대한 적응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이지 자신이 고려해야 할 범위가 아니었다.

체드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피부로 느껴졌다. 저 중에는 행정이든 총관이든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기사단장도, 대공을 보좌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시선에는 걱정도, 호기심도, 무덤덤한 기색도 엉겨 있었다. 물론 공작가의 영애라는 이유인지 적대감을 얼핏 내비치는 자도 있었다.

새로운 환경, 낯선 사람들, 그 속에서 나엘라는 평소와 같이 허리를 바로 세우고 어깨를 펴곤 기운을 가라앉혔다.

그녀를 소개하려는 체드란에게 한 손을 들어 말을 막은 후 나엘라가 직접 입을 열었다.

“일단 반갑다고 해야겠군.”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녀의 숨소리에조차 집중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라 설핏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엘라 마호세르디였던, 그러나 이제는 나엘라 노헤스카가 된 나엘라라고 하지.”

낯선 사람을 만날 때면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리기보다는 직접 제 소개를 해 왔다. 오랜 그녀의 버릇이었다. 마호세르디 공작령에서와 똑같이 또박또박 담담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미리 말하지만 내 성격이 유하거나 쉽지는 않아. 일반적인 귀족 영애와는 다를 수도 있고. 그러나 내가 할 일에 관해서는 허투루 할 생각은 없다. 그러한 이유로…….”

늘어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작은 파문이 일었다. 무엇을 생각했든 보통의 귀족 영애가 결혼한 첫날, 남편의 영지에서 저택 식구들에게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체드란조차 푸른색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나엘라는 당당히 체드란과 기사들을 지나 사용인들 사이를 걸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검은 생머리와 당당한 보라색 눈동자에 그 순간 사람들은 모두 시선을 빼앗겼다.

사람들에게 파문을 만든 나엘라의 대공령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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