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대공저의 총괄 집사인 마든은 무거운 걸음을 옮겨 집무실 앞에 섰다. 근심으로 가득했던 표정을 갈무리하고 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가 퍼지고 얼마 뒤 들어오라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체드란에게 마든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늦었지만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나엘라를 대공비의 침실로 안내하고 오는 바람에 마든은 다른 이들보다 귀환 인사가 늦었다.
“어떻던가?”
나엘라에 대해 묻는 것임을 단번에 알아들었지만 마든은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마든의 머릿속에 무심하던 나엘라의 목소리와 차가운 눈매가 스쳐 지나갔다.
“저보고 집사치고 젊은 편이라고 하셨습니다.”
정확히는 ‘젊군’, 단 한 마디뿐이었다. 그도 총괄 집사를 담당하기엔 스스로가 젊은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체드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자 마든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유독 걱정이 많은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쉽게 넘어갈 일도 아니라 생각되었다.
“혹 대공비 전하께서 이틀 전 먼저 도착한 개인 물품을 정리하지 못하게 하셨던 것은 아십니까?”
“몰랐는데.”
“대공비 전하의 짐이 도착함과 동시에 손대지 말라는 전언도 함께 왔습니다. 거기다 미리 와 있던 하녀 세 명과 오늘 함께 온 전속 하녀까지 네 명이 돌아가며 대공비 전하를 전담할 테니, 다른 시녀나 하녀는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흐음, 낯을 많이 가리는가 보군.”
“혹시나 하는 염려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편하게 말하게.”
“아무래도 부유한 마호세르디 가문의 귀한 막내딸이셨을 테니 노헤스카 대공저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마호세르디 공작령은 가장 큰 철 매장지이자 군수용품 생산지다. 제국의 모든 군수품은 마호세르디에서 나온다는 말이나 장인의 명검을 구하려면 마호세르디 공작령으로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노헤스카 대공령이라지만 부유함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우리도 그리 가난한 편은 아닐 텐데?”
“하지만 공작가와는 비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모르고 온 것이 아닐 거다.”
“하지만 방 안에서도 장갑을 벗지 않으시고 의자에도 편히 앉지 않으신 채 가만히 서 계셨습니다. 함께 온 지안이라는 하녀는 깨끗이 청소해 놓은 곳을 다시 청소하기 시작했고요. 오신 지 30분 만에 손도 두 번이나 씻으신 것 같습니다. 장갑도 계속 갈아끼시고. 결벽증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방이 더럽다고 생각하신 것은…….”
체드란은 마든의 말이 점점 이상한 곳으로 흐르는 기분에 입을 열었다.
“마든.”
“네?”
“노헤스카 대공저가 마호세르디 공작저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나?”
“아, 아닙니다. 이곳은 500년 동안 두칸의 야만인들을 막아 왔던 최전방으로 전대 노헤스카 백작님들의 혼이 담긴 곳이죠.”
체드란이 노헤스카의 성을 잇기 전까지 이곳은 백작령이었다. 500년을 전쟁 속에서 남부를 지킨 곳이나 다름없었다. 부유함으로는 차이가 날 수 있으나 마호세르디 못지않게 자부심 가득한 이들이 지내는 곳이었다.
“그럼 자부심을 느껴라. 이곳은 500년 동안 제국의 남부를 지킨 곳이다.”
500년 동안 제국의 국경을 지킨 것은 마호세르디도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위축될 일은 아니었다. 마호세르디는 마호세르디만의, 노헤스카는 노헤스카만의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죄송합니다. 그냥…… 새 안주인께서 이곳을 좋아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그랬습니다.”
“그녀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니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되겠지.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체드란의 몇 마디 말로 근심을 조금 덜었는지 마든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생각하는 게 표정으로 모두 드러나는 스타일이라 집사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지만, 체드란이 그만큼 믿는 이였다.
한결 마음이 놓인 마든은 다시 힘을 내 집무실을 나섰다. 나엘라가 노헤스카 대공령을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까지 다짐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틀 뒤,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집무실에 뛰쳐 들어갔다. 이번에도 원인은 나엘라였다.
*
“아무래도 대공비 전하께서 첩자 같습니다.”
그동안 밀린 기사단의 업무를 보고하던 론체 반트모어 기사단장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오묘한 얼굴을 했다. 그 옆에서 논의하던 체드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어제부터 무언가 이상했습니다. 어제 제게 대공비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으시더군요.”
마든의 머리에 어제의 대화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안주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엘라의 말투가 묘하게 익숙해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도 잠시, 마든은 성실하게 답했다.
“저택을 관리하고 손님맞이를 하며, 파티를 열거나 대공 전하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시면 됩니다.”
“혹시 재정 관리도 하는가?”
“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안주인이 계시지 않아 전문 회계사가 관리하고 대공 전하께 보고하는 방식으로 진행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대공비 전하께서 계시니 회계사에게 인수인계 자료를 준비해 놓으라 해 놨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나는 재정 관리 같은 것을 할 줄 모르니 이제껏 해 온 것처럼 전문가에게 맡기고 보고받는 것으로 하지.”
“아…… 하지만 원래 귀족 영애들은 재정에 관한 것을 모두 교육받는다고…….”
“내가 몸이 약해서 말이야. 딱 보기에도 그렇지 않나?”
“아, 그렇죠. 몸이 약하셨죠…….”
몸이 약해 공작저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자신도 왜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본 나엘라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게끔 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파티는 그동안 누가 열었지?”
“이때까지 파티는 열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안주인이 없기도 하고 대공 전하께서는 부탁하실 누이분도 없으셔서요…….”
“그럼 파티도 웬만한 것들은 생략하고, 꼭 열어야 하는 파티는 잘 아는 귀부인에게 도움을 받는 것으로 하겠네.”
그 말을 들은 마든의 표정은 급격하게 흔들렸다. 혹여나 나엘라의 말을 곡해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아무리 들어도 안주인의 의무를 행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다! 이렇게 말한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자신이 꿈꾸던 다정하고 우아한 대공비의 이미지가 점점 멀어져 갔다. 마든의 영혼도 혼미해지고 있을 때 나엘라가 뒤이어 쐐기를 박았다.
“내가 알기로 저택의 안주인은 가주가 없을 때 가주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맞는가?”
순간적으로 마든의 머리에 마호세르디 공작부인이 일찍 돌아가셨다는 정보가 스쳐 지나갔다.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귀부인이 없어 공작부인의 역할을 모르는 것이다.
거기다 몸이 약해서 다른 귀부인들을 만날 일이 없었다지 않았나. 안주인의 역할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누가 들어도 이상할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엘라가 말하니 마치 이 대공령을 꿀꺽 삼키겠다는 야심처럼 들렸다.
“네, 네. 그렇습니다만…….”
“가주와 같은 권한을 이행하려면 그만한 권력이 있어야겠군.”
“궈, 권력 말입니까……?”
“흐음, 우리 가문에서는 권력을 잡으려면 가장 먼저 기사단을 접수해야 하지. 여기도 그런가?”
“예……? 아, 뭐, 맞기는 한데…….”
“일단 알았으니 나가 보도록. 오늘은 생각을 좀 해 봐야겠군.”
그렇게 내쫓긴 것이 바로 어제였다.
그리고 오늘.
마든이 두 손을 쾅 내리치자 집무실의 커다란 책상이 보이지 않게 들썩였다.
“오늘 대공비 전하께서 뭐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마든은 하얗게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에 기사단장 론체는 대체 어디부터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나이도 많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로서는 온몸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마든이 늘 어려웠다. 물론 마든의 나이가 20대 초반이라는 것도 한몫했지만.
그나저나 마든은 론체가 이곳에 있음을 인지하곤 있을까. 정신이 나가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성격이니 분명 모를 것이다.
“저택에서 일하는 모든 사용인의 개인 신상 정보들, 3년 치의 재정 관리 보고서, 주변 영지들의 동향 보고서, 노헤스카 대공령과 관련된 모든 귀족, 상인, 주요 인물들의 보고서, 노헤스카 초대 가주부터 전 가주님들의 일대기를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늘어지는 말끝에 체드란이 조용하게 귀 기울였다. 론체도 은근슬쩍 가까이 다가가 관심을 가졌다.
“노헤스카 대공령의 기사단과 군사들의 신상 정보, 군대 편성에 대한 보고서, 여기 있는 론체 반트모어 기사단장에 대한 보고서까지 요청하셨습니다!”
오…… 자신이 옆에 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했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던 론체는 내용을 되짚곤 깜짝 놀랐다. 안주인이 된 귀족 영애가 요청하는 정보의 양이라기엔 선을 조금 넘었다.
군사 정보는 보통 가문의 기사단장과 가주, 그리고 차기 가주를 제외하고는 부단장에게도 일부만 열람 가능한 자료였다.
“심지어는 군사 지역 주요 거점에 대한 지도까지 요청하셨단 말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가진 지도와 비교할 수 있게 상세히 표시된 지도로요. 대체! 왜! 마호세르디 공작 영애가 남의 군사 지역 지도를 갖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건 나도 몇 번 본 적 없는데!”
마호세르디 공작가 정도면 군사 경계 지역의 지도 정도는 비밀리에 갖고 있을 만했다. 하지만 그것을 마호세르디 공작도, 장남인 단제 마호세르디 소공작도, 공작령의 기사단장인 다나한 마호세르디도 아닌 공작 영애가?
체드란과 론체의 눈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
“그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군.”
체드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신의 걱정이 과한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마든은 어제의 일도 일러바치기 시작했다. 안주인의 역할을 안 하겠다느니, 기사단을 접수하겠다느니, 분명 무슨 음흉한 의도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마든은 자기 생각을 필터링 없이 내뱉었다.
“기사단을 접수하겠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