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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5)화 (5/220)

4화

“확실히 요청한 자료들을 보면 범상치 않은 인물인 건 분명하다. 대공령을 가장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만 요청했군. 황제의 칼, 제국의 서쪽 방패라는 마호세르디의 명성은 괜한 것이 아닌가 보군. 한 송이 꽃처럼 대우받았을 그녀까지 이런 정보를 아는 것을 보니.”

“맞습니다. 확실히 자신은 마호세르디다 이거죠.”

“하지만 그녀가 대체 어떻게 노헤스카 기사단과 병사들을 장악하겠다는 거지?”

“뭐, 공작가의 기사들이나 병사들이 유일한 공작 영애에게 얼마나 극진히 대우했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여기도 쉬우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론체 반트모어 경,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론체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가주가 자리를 비웠을 때 가주 대행을 원활하게 하려면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특히 기사단을 잡고 있다면 주변 영지나 가신들도 가주가 없다고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지극히 기사 가문다운 생각이었지만 제 가문 사람들이 자신에게 잘했다고 노헤스카 대공령의 기사단도 자신에게 잘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은 너무도 기사 가문답지 않은 생각이었다.

기사 가문의 생리를 뼈저리게 알고 있는 자가 과연 전쟁터를 구르는 기사와 병사들의 습성을 모를까?

그 두 가지 사이의 간극이 론체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저택에서 지내던 우물 안 개구리라 생각하기에는 첫날, 당당하고 곧게 사람들을 바라보던 보라색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말을 아끼는 것이 신중한 론체다웠다.

“잘 모르겠다니요! 이건 분명 무슨 속셈이 있는 겁니다. 대공비 전하가 평생을 가도 기사단을 접수 못 한다는 것에 제 손목을 걸겠습니다!”

흥분해 날뛰는 마든을 보며 체드란은 팔짱을 끼고 턱을 매만졌다.

“그런데…… 그녀가 정말 첩자라면 너무 티를 내고 있지 않은가?”

“어… 음…… 첩자 역할을 책으로만 배우신 게……?”

“그럼 공작은 바보인가?”

“예?”

“계약한 것은 공작 본인이다. 그녀를 첩자로 보냈다면 분명 공작도 관련되어 있겠지.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허술하게 굴 것을 공작이 몰랐으리라 보나?”

“아무래도 부전자전이라고 공작도 은근 허술한 게…….”

무언가 한참을 더 생각하던 체드란은 그대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대공비를 만나 이야기는 해 봐야겠군. 확실히 쉬이 넘어갈 사안은 아니니까.”

체드란이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향하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마든도 얼른 뒤따랐다. 갑자기 혼자 남겨진 론체는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 은근슬쩍 그들의 뒤를 따랐다.

대공령의 안위와 관련된 문제라면 분명 자신도 차고 넘치게 들을 자격이 있다. 그래도 자신은 기사단장이지 않은가.

*

똑똑─

갑작스럽게 울린 노크 소리에 테이블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지안과 세 명의 하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이 마치 놀란 작은 동물들 같아 나엘라는 옅게 웃었다.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님이십니다.”

쌀쌀한 마든의 목소리에 아까 새하얗게 질려 비틀대며 나가던 낯빛이 떠올랐다. 목소리에 경계심을 숨기지 않는 것이 순수해 보여 또 웃겼다.

앉아 있던 하녀들이 허둥지둥 일어나 한쪽 벽에 붙어 섰고, 지안은 얼른 문 가까이 다가가 나엘라를 바라봤다.

나엘라는 느긋하게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소파에 앉아 장갑을 끼고 나서야 지안이 문을 열었다.

“아니 대체…….”

새침한 표정의 마든이 지안을 흘겨보았다.

“문밖에 대기하는 하녀 하나 없이 전부 방 안에 있는 것은 무슨 경우란 말입니까? 제가 뒤따르지 않았다면 대공님께서 직접 노크를 하실 뻔했습니다.”

손가락이 부러진 것도 아닌데 직접 노크 좀 하면 어떻단 말인가?

지안이 이틀간 살핀 대공저는 꽤 자유로운 편이었다. 대공도 딱히 문밖에 하녀를 세워 놓지 않았고 스스로 노크하는 것에 자존심 상해하는 귀족 나으리도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 마든이 한소리 하고 싶어 시비를 거는 것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어제부터 마든이 마음에 안 들었던 지안은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어딜 감히 나엘라 님이 하시는 말씀에 죄다 불만 어린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마호세르디 공작저의 버릇이 익숙하여 아직 이곳의 규칙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마호세르디 공작가는 신분의 고저와 상관없이 웬만한 일들은 스스로 처리하는 편이라 문밖에 하녀를 세워 두지 않아서요. 저희가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턱을 치켜들고 훗 하고 웃는 지안을 본 마든은 온 얼굴을 경악으로 물들였다. 마치 ‘너 어떻게 우리 대공 전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하는 기함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지안의 말에 별 표정 없이 방 안을 둘러본 체드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호세르디는 문밖에 하녀들을 세워 놓지는 않아도 방 안에 세워 놓기는 하나 보군.”

한쪽 벽에 붙어 있던 하녀들이 낭패 어린 기색을 흘렸다. 마든의 말에만 반박하다 보니 자신들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깜빡한 것이다.

지안의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확인한 나엘라는 가만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안의 성격상 아마 속을 부글부글 끓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혼내던 큰오라버니에게도 죽자 사자 달려들던 그녀였으니 대공이라고 눈에 보일 리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제 놀이 하녀로 함께 커 온 사이라 허물없이 굴 때가 있습니다. 너른 마음으로 아량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나엘라가 느긋한 기색으로 맞은편의 소파를 가리키자 체드란도 덧붙이는 말 없이 그곳에 앉았다.

“차를 내오겠습니다.”

서 있던 나엘라의 하녀 하나가 얼른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도 않아 방문이 다시 열리고 차기가 놓인 트레이가 들어왔다. 얼마나 급하게 온 것인지 숨소리도 살짝 거칠고 물이 튄 자국이 언뜻 보였다.

그러나 체드란과 나엘라의 앞에서 차 따르는 모습만큼은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우아했다.

“확실히 마호세르디 저택은 자유로운 분위기 같군.”

하녀들을 보면 그 가문의 분위기가 보인다고 했던가.

지안만 봤을 때는 몰랐지만 나엘라의 하녀들을 보고 나니 공작저가 어떤 분위기일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대공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모양이 윗사람에게 두려움이 없고 자신들끼리의 결속력도 보였다.

체드란의 성격이 고압적이고 예민했다면 지안의 발언은 충분히 처벌 가능한, 애매한 선에 걸쳐 있었다. 주인을 향한 충성심일지 기강이 해이해진 것에 대한 일면일지는 판단하는 사람의 몫이었다.

“기분이 상하셨습니까?”

“그렇게 예민한 성격은 아니네만.”

“그럼 그냥 넘어가십시오.”

나엘라의 말은 무언가 의미 없이 뻔뻔했다. 방금 그 말로 체드란의 기분이 더 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렇게 하지.”

체드란은 사사로운 것에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판단했다.

마든이 목덜미를 잡고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에서 론체가 눈치를 주지 않았다면 필시 한마디를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다.”

“말씀하십시오.”

말을 하다 말고 체드란이 바라보는 모습에서 하녀들은 자리를 피해 달라는 의미임을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모두 시선을 피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제게 말씀하시면 어차피 알게 될 것이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꽤 돈독한 사이인가 보군.”

“대공 전하의 뒤에 서 있는 마든 집사와 반트모어 경만큼 하겠습니까. 다들 돈독한 사이인 것은 알고 있으나 낯선 사내들과 저만 남겨 둘 수 없는 하녀들의 마음도 이해해 주시죠.”

너도 자신의 사람들을 우르르 데리고 있으니 나도 그러겠다. 그런 뜻이 분명했다.

론체는 인사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건만 자연스럽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모습에 놀랐다. 자신의 정체 정도는 단번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돈독하다는 말에 뼈가 있었다. 단순히 론체를 알아본 것이 아니라 그 외의 것들도 알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 왔다. 이것이 마호세르디의 정보력인가? 새삼 감탄스러웠다.

하긴 군사 지역의 지도까지 갖고 있는데 기사 단장의 신상이라고 없을까.

체드란은 무언가 피곤한 기분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나엘라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기억을 되짚어 봐도 몇 마디 나눈 게 다이니 알 수가 없었다.

말 한마디 지지 않고 돌려 말하는 모습이 귀족 영애 같지는 않으나 누구보다 귀족다운 화법이었다.

나엘라는 체드란의 찌푸린 미간을 보며 자신이 과했는지 돌아보았다. 평소 직설적인 화법을 선호하지만, 귀족적인 화법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귀찮아서 안 하는 것이지.

하지만 어제 오늘 마든의 태도를 보았을 때 한 번쯤은 만만치 않은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말을 길게 했을 뿐이었다.

“그럼 그냥 말하도록 하지.”

“네.”

“군대 편성 보고서와 군사 지도를 요청한 이유는 무엇이지? 그대도 변경에 있었으니 안주인이 볼 수 없는 기밀문서라는 것을 알 텐데.”

체드란의 직설적으로 말하는 모습에서 얼핏 자신의 오라버니들이 스쳐 지나갔다. 검을 잡는 사람들은 왜 이리 비슷한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조금 유해졌다.

“군사 기밀이었습니까? 몰랐습니다.”

“몰랐다고?”

“아시다시피 제가 어렸을 때부터 몹. 시. 유약하여 저택 밖으로 나가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 저에게 오라버니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준다며 꺼낸 것이 죄다 전쟁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기밀인지 전. 혀. 몰랐군요.”

거짓말이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그리고 무엇이 거짓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거짓말이라는 티가 났다. 그 본인도 딱히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니 더 문제였다.

뒤에서 마든은 저걸 믿느냐고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마든을 바라보며 지안이 ‘네가 안 믿으면 어찌할 건데?’라는 표정을 보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할 말이 없군.”

저렇게 대놓고 발뺌을 하는데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그대가 이곳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기사단을 접수하겠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들었다.”

“맞습니다. 마호세르디 가문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저희 오라버니들도 저에게 늘 강조했고요. 무언가 잘못됐습니까?”

순진무구함을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나엘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차가운 눈매로 고개만 움직이니 굉장히 안 어울렸다. 본인도 그것을 알았는지 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바로 했다.

“그대는 그대가 일반적인 귀족 영애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

나엘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이곳에 와서 취한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태도를 바꿀 생각도 없는 것 같고.”

“그렇습니다.”

“그대의 방식이 대공령에 해가 되지 않는 이상 나 또한 웬만한 것들을 묵인할 생각이다. 안주인은 안주인의 방식이 있는 것이니 제재를 가할 생각이 없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모든 이들이 쉬이 납득하리라 생각하지는 말도록. 누군가와 척을 지면 상대는 그대를 끌어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어떻게든 그대의 흠을 잡을 것이고. 그것 또한 모르지는 않겠지. 많은 사람이 그대를 불안해한다면 그것 또한 대공령에 해가 된다. 혹 내 사람들이 그대를 경계하느라 제대로 일하지 못한다면 마냥 묵인할 수 없다.”

그것은 확실한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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