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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6)화 (6/220)

5화

모르쇠로 일관하는 나엘라에게 더 꼬투리를 잡을 수 없음에도 체드란은 그냥 넘기지 않았다.

하지만 나엘라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단어 선택이나 말하는 어투에서 그의 성격이 느껴졌다.

부드러우나 단단하다. 그런 성격일수록 자신의 적에게는 가차 없으니 세간에 대한 체드란의 평가도 일부는 맞을 것이다. 날을 세우지 않은 것은 나엘라가 확실한 적이라는 판단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나엘라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눈꼬리가 사르륵 접히자 체드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분위기에 갑자기 왜 저렇게 웃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웃는 것 자체를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주의하도록 하지요.”

나엘라는 웬만하면 체드란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저런 성격들을 좋아하기도 했다.

“흠흠, 그렇다면 뭐…….”

순순히 대답하는 나엘라의 모습에 체드란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흘렸다. 제대로 여자를 상대해 봤어야 알지. 그로서는 그녀의 감정 변화가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그대가 주의하겠다고 했으니 더 할 말은 없군. 이만 일어나도록 하지.”

“그렇군요. 그런데…….”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대공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엘라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할 말만 하고 적응을 잘하고 있는지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자신이 너무 무심했음을 깨달은 체드란은 다시 가지런히 소파에 앉았다.

“오셨으면 확답은 주고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답? 뭐에 대해 말인가?”

나엘라는 식어 가던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래서 군사 정보를 주실 겁니까? 안 주실 겁니까?”

체드란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몇 번 눈을 깜박인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질문에 답은 안 하고 다른 것들을 물었다.

“시녀나 다른 하녀들을 모두 거절했다고 들었다. 이유가 있는가?”

“일곱 살 때부터 제 옆을 지켰던 이들입니다. 저와 함께 예법과 더불어 교양에 필요한 모든 교육을 받았습니다. 웬만한 시녀들보단 그들이 훨씬 나을 겁니다.”

체드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엘라는 섬세하지 않은 그가 조금씩이나마 챙겨 주려는 것이 보였다. 딱 봐도 무심하고 말이 많지 않은 성격이니 이 정도가 어딜까 싶다.

그 나름대로 다정히 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지 않을까.

“그런데 왜 대답을 안 하십니까?”

“무엇을?”

“군사 정보 주실 겁니까? 안 주실 겁니까?”

피곤하다는 듯 눈을 감는 모습에서 나엘라는 그가 새삼 놀리기 쉬운 스타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체드란이 나가자마자 나엘라는 불편하던 장갑을 벗어 던졌다. 군사 정보는 좀 더 생각해 보겠다며 나가는 체드란에게 앞으로도 문밖에 하녀는 세워 놓지 않겠다며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자신이 꽤 많이 봐줬음을 체드란은 아는지 모르겠다.

나엘라가 소파에 편히 등을 기대자 한쪽에 서 있던 하녀들이 우르르 다가와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적들에게 악귀와도 같다며?”

“맨손으로 사람을 찢어 버린 적도 있다더니.”

“전쟁터 한복판에서는 불도 뿜는다는데?”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된다니까.”

당연히 못 믿을 소문을 가지고 한마디씩 하는 모습이 웃겨 나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믿지도 않았으면서 장남 삼아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마호세르디에서 조사한 정보들과 실제의 체드란은 조금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했다.

“일 처리에 빈틈이 없다더니 조금 날카로운 면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확실히 본인이 목표한 것은 짚고 넘어가더군요.”

“문제는 앞으로 나엘라 님과 어떤 사이를 유지할 것이냐입니다.”

“지금 보면 딱히 척을 질 것 같진 않아요. 대공 전하도 알고 계시겠죠. 나엘라 님과 척을 지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잠시 진지했던 이들은 금방 장난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나엘라에게 필요하다는 걸 아는 것이다.

“아오, 아까 기사단을 어떻게 접수할지 열심히 상의 중이었는데 말이야.”

“아까 아주 좋은 방법이 번쩍 생각났는데 고새 까먹어 버렸다고.”

“과연 자료를 줄까?”

“에이, 안 주겠지. 대공 전하가 바보야?”

“역시 나엘라 님이 미인계를 연습해야 하지 않을까?”

“아까 고개 갸웃거리다 실패한 거 못 봤어? 그거 네가 알려 준 방법이잖아.”

“이상하네. 나는 잘 먹혔단 말이야!”

마음이 편해지는 재잘거림을 들으며 나엘라는 조금 더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체드란에 이어 마든도 한 번씩 욕해 준 이들은 금세 기사단 접수 방법으로 화제를 되돌렸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황실 다음의 지위를 가진 공녀가 공녀의 하녀들과 매번 이런 식으로 대화한다는 것을. 이것이 나엘라가 시녀가 없는 이유이자 그녀의 힘이기도 했다.

이들과 함께 미래를 예측해 보고 어떤 행동을 할지 고민하고, 또 때로는 막연한 내 편이 돼 주는 이들.

이 네 명의 하녀들은 성정이 믿음직한 천애 고아들을 엄선해 공작이 직접 뽑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엘라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친구가 필요하다는 강박적인 사명감 때문이었다.

이들은 나엘라가 하는 모든 것을 보조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큰오라버니 때문에 그녀가 받는 모든 교육을 함께 받았다.

또한 나엘라의 손과 발은 물론이요, 때로는 그녀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작은 오라버니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나엘라를 따르는 이유가 꼭 그들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게 시작이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두 오라버니 모두 나중에는 나엘라와 하녀들 때문에 얼마나 머리를 싸맸던가. 다 자업자득이었다.

“아무래도 시간을 오래 끌지 않는 것이 좋겠다.”

갑작스러운 나엘라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나는 숨기는 것이 아니라 숨죽이며 때를 보고 있을 뿐이니까. 미리 경계를 살까 조용히 있었지만 이미 시작한 것 같네.”

나엘라가 손을 들어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들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있었다기엔 군사 정보를 달라고 너무 쉽게 지르시던데요?”

“분명 나엘라 님은 아무 생각 없으셨을 거야.”

“주면 좋고, 안 주면 말고 이런 생각이지 않으셨을까?”

“숨죽였다기엔 너무 성의 없으셨던 거 아니에요?”

아직 10대의 소녀다움이 남아 있는 이들이 한바탕 웃었다. 그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 나엘라도 가볍게 웃었다.

확실히 자신은 기다리는 성격이 아니다. 그래 놓고 숨죽였다고 말하지 않았나. 오라버니들이 왜 자꾸 자신에게 뻔뻔하다고 말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장갑 다 갖다 버려. 귀부인 역할, 지겨워 죽겠으니까.”

가만히 있던 날이 며칠 되지도 않았다는 것은 나엘라의 머릿속에서 금세 지워졌다.

자신의 가문과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들을 위해 지금부터 착실히 움직여야 했다.

*

집무실로 향하던 체드란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그리고 그 걸음마저 멈추고는 론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가?”

론체가 애매한 미소를 보이자 마든만 눈을 깜박거렸다.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하녀들 손에 모두 굳은살이 있었다.”

“네? 그거야 하녀들은 고된 일을 많이 하니…….”

“검을 쥐었던 손이었다. 어떤 하녀는 칼자국으로 보이는 흉터까지 있더군.”

“주, 주방에서 요리를 현란하게 한 거 아닐까요?”

“발걸음에 소리가 없고 풍기는 기운이 사람을 죽여 보지 않았다면 가질 수 없는 기세였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마든은 입을 뻐끔거렸다.

설마 암살자란 말인가? 자신은 암살자와 눈싸움을 했단 말인가? 마든은 황급히 자신의 목이 잘 붙어 있는지 확인했다.

아무리 대공비 전하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지만 이런 중대한 사안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마든은 앞으로 행동할 때 더욱 유념해야겠다는 생각을 머리에 강하게 새겼다.

식은땀을 흘리느라 말이 없는 마든 대신 론체가 입을 열었다.

“대공비 전하의 안위를 걱정한 공작이 붙여 놓은 호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기엔 오랜 시간 함께한 유대감이 흐르지.”

“어려서부터 호위를 해 왔을 수도 있습니다. 놀이 하녀라 하였으니 대공비 전하를 보좌할 겸 호위도 시킬 겸 훈련을 시켰겠지요.”

“공작의 막내딸 사랑은 유별나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지.”

체드란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나엘라의 행보는 확실히 이상하다. 하지만 쉽게 트집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저 소문으로만 들었던 나엘라와 실제로 마주한 나엘라에게서 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공작과의 계약은 확실히 우리에게 이득이다.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으면서도 계약을 진행한 것은 그저 감이었지.”

확실하진 않지만, 공작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얼핏 알 것 같아서 한 결혼이었다.

“하지만 대공비가 움직이는 방향이 내가 짐작한 공작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지금으로선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체드란을 따르며 론체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마호세르디 공작과 체드란의 계약을 아는 몇몇 이들을 제외하고 대공가의 사람들은 대공비를 꽤 기대했다. 그녀가 따뜻하고 다정한 안주인이기를, 많은 사람을 품에 안을 수 있는 사람이기를, 상처 많은 주군에게 좋은 아내이기를, 태어날 후계가 사랑스럽기를.

사실 계약을 알고 있던 론체조차 나엘라가 좋은 사람이기를 바랐다. 그래야 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삭막한 이곳에서 주군이 전쟁에 나가 있어도 사람들이 믿고 버텨 줄 테니까. 10대 어린아이도 아니고 바보처럼 조금 들떠 있었나 보다.

“마호세르디 공작가가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 조금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체드란은 고개를 저었다.

“계약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어떻게든 알아보려 했지만,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던 곳이다. 하녀도 하인도 혈연이 없거나 혈연 모두 공작령에 있지 않으면 들어갈 수조차 없고, 가장 오래되고 직급이 높은 사용인들조차도 주기적으로 감사가 나가는 곳이야.”

“그렇게까지 보안이 철통같다는 것은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의미죠.”

“확실히…… 공작가는 무언가 숨기고 있다.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체드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의 인생은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모양이었다. 어쩐지 피곤해지는 기분에 잠시 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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