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기사단 접수하기
6화
“물러서지 마라!!”
사령관의 외침에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기사단이 나아갔다.
그 뒤를 따라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수많은 군사가 기사단의 뒤를 이었고 그만큼 수많은 목숨이 스러져 갔다.
누군가는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자식이었고 누군가는 어제까지 웃고 떠들며 돌아갈 날을 꿈꾸던 이였다.
고향에 막내를 임신한 아내가 기다리던 자도 있었고 이번 전쟁만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나 짓겠다고 했던 이도 있었다.
지루하고 어디서나 들어 볼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어느 전쟁에 그런 이들이 없었겠는가. 고작 한 명의 병사일지라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존재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 가족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건 남의 이야기였고 그저 그런 전쟁 이야기였다.
그들을 기억하는 몫은 함께 싸웠던 전우와 사지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사령관이었다.
그 결말이 승리였어도 손에 담은 모래처럼 허망하게 사라져 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허억!!”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나엘라는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벌벌 떨리는 손을 누군가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요. 쉬이…… 괜찮으니까 숨 쉬어요.”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지안은 천천히 나엘라의 등을 쓰다듬었다. 웅크리고 바들바들 떠는 나엘라의 이런 모습을 몇 명이나 알까.
지안은 오래전부터 나엘라를 보며 감춰야 하는 사실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그녀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 줘야 하는 이가 필요하다는 것도.
“평소처럼 마실 물과 손 씻을 물을 갖다 드릴까요?”
나엘라는 여전히 꿈의 여파가 가시지 않는지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안이 눈짓을 하기도 전에 다른 하녀가 물이 담긴 그릇과 물통을 들고 들어왔다. 이런 일이 익숙한 사람이 어찌 지안뿐이랴.
“여기요.”
물컵에 물을 먼저 따라 줬건만 나엘라는 손 씻는 것이 우선이었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릇에 손을 넣고 박박 문질러 닦으니 금세 벌게졌다. 그 모습에 지안은 얼른 향유를 꺼내 뚜껑을 열고 미리 대기했다.
“아침 일찍 마든 집사가 왔다 갔어요.”
향유 냄새가 코를 찌를 듯이 방 안에 가득 차자 나엘라는 손 씻는 것을 멈췄다. 손은 여전히 붉었지만, 전에는 피가 나도록 닦아 댔으니 양호한 편이었다.
손 씻는 행동을 멈춘 것을 보아하니 나엘라의 코에 맴돌던 피 냄새가 가신 것 같았다. 지안은 냉큼 향유를 나엘라의 손에 들이붓고 슬슬 문지르며 재잘대었다. 혹시나 악몽을 다시 상기시킬지 모르니 생각의 틈을 막아야 했다.
“국경 한쪽에 문제가 생겨 대공 전하께서 급히 나가셨다네요. 며칠 뒤에나 돌아오실 것 같아요. 반트모어 경은 이곳에 남았다고 말하는데, 웃기더라고요. 기사단장과 자신이 지켜보고 있으니 헛짓거리하지 말라는 건가? 전에도 느꼈지만, 표정이 참 솔직한 사람이더라고요.”
지안이 쉬지 않고 떠들자 머릿속을 울려 대던 비명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나엘라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악몽을 꾼 날에는 꼭 무슨 일이 터지던데.”
지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꼭 무슨 일이 터지긴 했지만 좋은 일도 꽤 많았잖아요? 제 느낌상 오늘은 분명히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자신만 믿으라며 호언장담하는 지안의 모습에 나엘라는 긴장을 살짝 풀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좋은 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비장함까지 엿보여 나엘라도 마음을 조금 편히 먹기로 했다.
정작 지안은 마든부터 눈에 안 보이도록 치워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는 것도 모른 채 나엘라는 스르륵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똑똑─
나엘라에게 조금 더 쉬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들린 노크 소리에 지안이 인상을 확 구겼다. 얼른 달려가 문을 열어 보니 마든이 서 있었다.
“흠흠, 대공비 전하께선 일어나셨는지……?”
아니 치워 버리겠다고 생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나타나?
지안의 인상이 점점 험악해지자 울컥 감정이 올라왔으나 마든은 얼른 표정을 풀었다. 나엘라의 하녀들이 검을 쓸 줄 안다는 말이 번쩍 뇌리를 스쳤다.
“다름이 아니고 저택에 손님이 방문했습니다. 아무래도 대공비 전하께서 맞아 주심이…….”
왜 자꾸 목소리가 줄어드는지는 마든도 모를 일이었다.
“손님?”
마든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자신은 저택을 총괄하는 집사장이고 상대는 대공비 전하의 하녀인데 왜 저쪽이 말이 짧은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크흠, 일단 방문이 예정되어 있던 손님이긴 한데 대공 전하께서 급히 나가시는 바람에 만남을 미루자 연락을 넣었다네. 근데 서신을 보낸 전령과 길이 엇갈린 모양일세. 대공 전하의 손님인 만큼 대공비 전하께서 대신 맞아 주셔야 보기에도 좋고 예법으로서도 좋지 않겠나?”
“하지만 나엘라 님은 이제 막 일어나셔서 준비가 하나도 안 되었는데?”
“크윽. 그, 그래서 일단은 저택을 둘러보시는 게 어떻겠냐 했더니 기사들의 아침 훈련을 구경하신다고 연무장으로 가셨네만.”
“아…… 그럼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도록 하죠, 뭐.”
“그래! 알겠네!”
휙 돌아 쿵쾅거리며 멀어지는 마든을 보며 지안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침부터 왜 저러는지 모를 일이다. 하여튼 이상한 인간.
얼른 방문을 닫은 지안은 나엘라에게 다가갔다.
“손님이 오셨다네요. 아무래도 나엘라 님께서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아! 어떤 손님인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안 물어봤다.”
지안의 말에 커튼을 치고 있던 다른 하녀가 자신이 물어보고 오겠다며 방을 빠져나갔다.
“군사 자료는 그렇더라도, 다른 보고서들은 빨리 달라고 집사장에게 재촉해야겠어요. 누가 와도 정보가 없으니 조금 어렵네요.”
“평소처럼 하면 되지.”
머리가 완전히 맑아지지 않는지 나엘라가 눈가를 문지르자 지안이 눈도 빨개진다며 말렸다.
“그나저나 오늘 터질 일은 그 손님과 관련된 일인가? 아무튼, 좋은 일이었으면 좋겠네.”
“아이 거참, 저만 믿으시라니까요? 오늘은 진짜 좋은 일이라고 느낌이 빡 왔어요.”
지안이 가볍게 윙크를 날리자 나엘라는 피식 웃었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겠는가. 정 안 되면 성격대로 다 패 버리지, 뭐.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
별관들이 모여 있는 건물 뒤로 거대하게 펼쳐진 연무장 앞에서 그로우가 연신 건들거렸다.
“그래서 내가 말이지 대공 전하께 ‘그쪽은 안 됩니다!!’ 하고 딱 말했다네. 그랬더니 대공 전하께서 그대의 말이라면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지, 이러시더니 군사들을 딱, 멈춰 세우시지 뭔가.”
론체는 아침 훈련 지도를 해야 할 시간에 왜 이런 이야기나 듣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이미 대기 중이고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일단 부단장에게 맡기긴 했지만 이런 쓸모없는 이야기에 시간을 버리는 것이 아까웠다.
“그래서 내 도움으로 적군의 매복 장소를 확인하고 역으로 기습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걸세. 크─ 반트모어 경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물며 그로우의 아버지인 가소 백작조차도 대공가의 기사단장인 자신에게 깍듯하게 굴었다. 그런데 나이도 어린 그로우가 명백한 하대로 주절주절 떠들어 대고 있으니 하도 어이가 없어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뭐? 적의 매복을 알려? 그로우가 10분에 한 번씩 저긴 안 된다며 외친 데다 매복 장소야 체드란이 원래 알고 있던 정보임을 누구나 다 알았다.
가소 백작은 신중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쉬이 소란을 피우지 않기에 그의 아들도 마찬가지이리라 여겨 시험 삼아 전쟁터에 한 번 데리고 나갔다가 체드란은 치를 떨면서 돌아왔다.
“그래서 말일세. 다음 전쟁에는 반트모어 경과 함께 보내 달라고 대공 전하께 간곡히 청해 볼까 하네. 나의 기민한 머리와 경의 무위가 합쳐진다면 야만인들인 두칸 정도야 금방 쓸어 버리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내게 공을 다 뺏길까 걱정하지 말게. 아무리 전하께서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손 경을 내치기야 하겠나. 경을 보좌하는 부단장이면 모를까!”
하하하 웃어 대는 그로우를 보며 론체는 핼쑥해졌다. 전쟁터에 같이 나가는 것도 끔찍한데 부단장이라니, 꿈에 나올까 무서웠다.
그때 종종걸음으로 누군가 빠르게 다가왔다.
갈색 머리의 갈색 눈동자를 가진 미색의 여인이 다가오자 그로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대공저에 이런 미인이 있었나? 나는 왜 이제 알았는지 모르겠군.”
그녀가 대공비의 직속 하녀 지안임을 알아본 론체는 이제야 그로우에게서 벗어나겠다며 한숨 돌렸다. 자신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고 있던 기사들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공비 전하의 하녀 지안이라고 합니다. 대공비 전하께서 준비를 끝내었으니 손님을 모셔 오라 명하셨습니다.”
지안이 단정한 자태로 고개를 숙이자 그로우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대공비 전하? 아! 마호세르디 공작가의 병약하다는 그 아가씨 말이군. 몸은 약해도 엄청난 미인이라더니, 그래서 하녀들도 이리 예쁜 건가?”
론체는 다른 의미로 핼쑥해지기 시작했다. 체드란에게도 할 말을 다 하던 그 모습을 본 터라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화를 참는 것인지 지안은 약간의 침묵 후에 조곤조곤 말했다.
“대공비 전하께 예를 갖춰 주십시오.”
“아이, 내가 무슨 예를 안 갖췄다고 그러나?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이 딱 내 취향이구먼. 공녀에게 자네를 달라고 해 봐야겠어. 대공과 가신 가문의 돈독한 사이를 위해 하녀 한 명쯤이야 흔쾌히 주시지 않겠나?”
론체의 머릿속에 차가운 눈매와 무심한 말투로 체드란을 당황스럽게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대공비 전하가? 그것도 그로우에게? 누가 봐도 아끼는 것 같던 자신의 하녀를?
론체는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응접실로 안내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씀을 가려 주십시오. 저는 대공비 전하의 하녀입니다.”
“허? 이것 참, 문제일세. 문제야. 나는 가끔 이런 것들이 이해가 안 돼. 네가 모시는 분이 공녀라고 너도 공녀인 것 같으냐?”
“공녀가 아니고 대공비 전하십니다.”
시선은 그로우의 턱에 닿아 있었고 지안의 표정이나 목소리에도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론체는 점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사건이 터져도 크게 터질 것 같아 중재하려던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