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허어, 이것 봐라? 널 보니 대공비가 하녀들을 얼마나 풀어 줬는지 알 것 같구나. 모시는 사람이 방만하니 그 아랫것들도 방만해지는 것이 아니냐?”
그로우가 손으로 지안의 뺨을 툭툭 치자 보다 못한 론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 심상치 않은 기류에 부단장과 다른 이들도 훈련을 멈추고 이쪽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하녀는 대공비 전하의 하녀이니 대공가의 하녀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좋겠군.”
“아니 어떻게 경이 이깟 하녀 편을 들 수 있소?!”
론체가 그럴 줄 몰랐다는 듯 그로우가 펄펄 날뛰기 시작했다.
“이깟 하녀 하나가 뭐라고! 이 많은 이들 앞에서 날 망신 준단 말이오! 대공비가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충성스러운 가신보다 먼저란 말인가!”
꽥꽥 소리를 질러 대는 통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 론체를 누군가 은근슬쩍 밀었다. 내려다보니 고개를 숙이고 공손한 자세를 하는 지안이 보였다.
“단장님까지 끼어들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조용히 말하는 지안을 보며 론체는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대공비 전하께서 보통 성격이 아니시라 후처리가 걱정되어 그렇다고.
하지만 가만히 고개 숙이고 있는 지안을 보니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한쪽으로 물러났다.
이런 놈들을 상대할 때는 대꾸해 봤자 말도 안 통하고 머리만 아프니 지안이 사과하고 얼른 넘겨 버리는 편이 나았다.
“내가 말이야! 대공 전하랑 전쟁터에서 생사를 함께한 사이다 이거야!”
“그로우 가소 백작 영식, 대공비 전하께 저지른 무례를 사과해 주십시오”
그로우에겐 지안이 제 풀네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뭐야?! 이익……! 이년이!”
고개를 들고 그로우를 똑바로 바라보는 지안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혐오감이 드러났다. 눈치 없는 그로우라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였다.
“영식께서 사과를 해 주신다면 저도 사과를 하겠습니다.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억……!”
“귀족이라면 귀족의 예우를 지켜 주십시오. 일개 하녀를 탐하는 모습을 가소 백작님께서 보셨다면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는 생각에 몸져누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론체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다는 자조가 들었다. 욕의 최고봉은 부모님 욕이라는데 가소 백작까지 나왔으니 자신이 손댈 수 있는 선을 넘었다.
아무리 그로우가 대공비에 대해 무례하게 언사했다지만 지안은 하녀의 선을 넘은 것이다. 이러면 대공비도 곤란해질 텐데 일을 왜 이리 크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론체는 이쪽을 불안하게 바라보던 부단장에게 눈짓했다.
“대공비 전하를 불러오거라.”
다가온 부단장에게 말을 전하자 부단장은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본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일은 벌어졌다.
“꺄악─!!”
“감히 네깟년이!!”
눈이 뒤집힌 그로우가 지안의 머리채를 잡아 패대기치며 쓰러진 그녀에게 발길질을 시작했다.
*
마든이 거의 뛰다시피 하며 나엘라를 재촉해 댔다. 손 빠른 하녀의 대처로 구두를 단화로 바꿔 신었기에 다행이지 진작에 발목이 나갈 뻔했다.
그런 마든 몰래 나엘라의 다른 하녀인 제니가 조용히 속삭였다.
“아무래도 그때 그 작전인 것 같죠?”
지안의 자매인 제니인지라 금방 눈치챈 것 같았다.
“좋은 일이 터질 거라고 그렇게 장담을 하더니.”
오늘 같은 일은 예전에도 한 번 있었다. 그때의 지안은 한쪽 다리가 부러지고 다른 한쪽은 금이 가서 한 달 넘도록 침대 생활을 해야 했다. 그때 분명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벌이지 않기로 하지 않았었나.
지안은 아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 테니까 말이다.
“이쪽입니다!”
나엘라를 재촉하며 먼저 연무장으로 뛰어가던 마든은 어느 순간 자리에 박힌 듯 우뚝 멈춰 섰다. 그 너머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목소리와 그런 남자를 말리는 기사들의 목소리, 화를 내는 론체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간 나엘라는 바닥에 쓰러진 지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산발이 된 머리, 피가 흐르는 코와 입술, 찢긴 채 넝마가 되어 가슴을 반절이나 내보이고 있는 옷가지, 이리저리 긁혀 생채기가 가득한 손등까지.
“이년이 지금 우리 백작가를 모독했소!! 이 일은 대공 전하와 대공비에게 정식으로 항의할 것이오!!”
“항의하게나! 자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알고나 있는가!!”
“경은 어떻게 이년이 하는 말을 듣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소? 아! 이년과 그렇고 그런 사이오? 그럼 진작 말하지 그랬소!!”
“이 하녀는 대공가의 하녀일세! 그대는 지금 기사가 되어 힘이 없는 여인을 짓밟은 것으로도 모자라 대공가에서 대공가 사람을 건드린 것이라고!”
현장은 개판이었다. 조용하던 론체가 소리 지르며 싸우고 있었고, 기사 여러 명이 달려들어 그로우를 말리고 있었다.
허나 나엘라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다급히 달려간 제니가 망토로 지안을 감싸는 것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알고 있다.
지안이 그간 기사들의 고된 훈련을 견뎌 왔다는 것도, 어련히 알아서 급소는 모두 방어했으리라는 것도, 일부러 보이는 곳만 더 맞았다는 것도, 연약한 여인을 연기하느라 더 추욱 늘어져 있다는 것도. 모두 잘 알았다.
그런데, 그런데도…….
나엘라는 이성이 툭─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지안은 더한 일도 많이 겪었다. 자신과 함께 다니며 죽을 뻔한 적도 수없이 많았고 배에 칼을 맞은 적도 있었다. 지안에게 저 정도는 아프지도 않을지 몰랐다.
근데 그래서? 그렇다고 오늘 일이 별거 아닌 게 되나?
아니, 당연히 아니지. 지안의 배에 칼을 꽂았던 놈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죽을 뻔하게 만들었던 놈들은 이미 죽었다.
받았으면 갚아 줘야지.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에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나엘라가 그로우의 앞에서 멈췄다.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한 표정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천지 분간 못 하는 그로우만이 입을 열려던 바로 그 찰나, 나엘라가 손을 들어 올렸다.
짜악─
조용한 연무장에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과 볼의 마찰음이 퍼졌다.
천천히 열리는 나엘라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내가 깜박 잊고 장갑을 안 가져왔지 뭔가. 결투 신청을 할 장갑이 없으니 볼을 때리는 것으로 대신함을 이해해 주게나.”
론체는 그제야 나엘라의 고요함이 폭풍의 눈과 같았음을 깨달았다.
“대, 대공비가 아닙니─.”
짜악─
그로우가 당황한 얼굴로 더듬더듬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 다시 한번 마찰음이 울려 퍼지며 얼굴이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이건 그냥 내가 때리고 싶어서 때린 걸세. 이것에 대해서는 추후 정식으로 항의서를 받도록 하지.”
한동안 멍한 동태 눈깔이던 그로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무리 대공비 전하라도 이런 행동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까는 대공비라더니 한 대 더 맞자 대공비 전하가 되었다. 역시 이런 놈들은 매가 약이었다. 이제야 좀 예의를 보이지 않는가.
“아무리 하녀 하나 좀 때렸다지만 여인이 결투라뇨! 결투 신청으로 볼을 때리다니요!!”
“그런 것이 문제였나? 비록 여인이지만 나는 마호세르디의 일원이었고 마호세르디로 자란 사람이다. 마호세르디의 이름을 우습게 보지 마시게.”
나엘라가 론체에게 손을 내밀었다.
“론체 반트모어 경, 그대의 검을 빌려줄 수 있겠나?”
잠시 고민하던 론체가 나엘라의 손에 자신의 검을 넘겼다. 그 모습에 그로우는 더욱 당황했다.
“이건 마호세르디로 자랐던 나엘라 마호세르디가 보내는 결투 신청일세.”
점점 부어오르는 그로우의 볼을 보던 나엘라는 스릉─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검을 빼었다. 검날이 햇빛을 반사해 눈부시게 빛났다.
나엘라는 검신을 잠시 바라보더니 가볍게 한번 휘둘렀다. 그 한 번의 휘두름에 묵직하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연무장을 채웠다.
“그래도 결투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는가?”
그로우는 얼이 빠진 얼굴로 입을 벌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로우는 기사다. 그리고 아무리 검을 배웠다고 한들 나엘라는 한낱 여인이었다. 공작가에서 곱게 자랐을.
“하, 하지만 병약하다고 알려진 공녀가 어, 어떻게…….”
“나는 대공비가 아니라 마호세르디 출신의 기사로서 그대에게 결투 신청을 한 것이다. 그대는 여인이라고 기사의 결투 신청을 우습게 보는 것인가? 아니면 마호세르디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인가?”
“아, 아무리 그렇다 한들 겨우 하녀 하나로……!”
“아직도 그런 말을 하다니. 명분이 충분하다는 것을 모르는가 보군.”
명분이야 차고 넘쳤다.
지안은 나엘라의 놀이 하녀였고 평생을 붙어 있던 친구 같은 존재였다. 표면적으로는 대공비의 아끼는 직속 하녀이고 대공비가 노헤스카 대공가 소속이니 지안 또한 대공가의 사람이 맞았다.
더 들어가면 무수히 많은 명분이 생겼지만, 나엘라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검을 들게. 그대의 검은 아니지만 나 또한 내 검이 아니고 드레스 차림이니 조건은 얼추 동등하지 않겠나.”
그 말에 그로우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 얼핏 화가 날 정도였다. 나엘라의 말은 마치 실력이 훨씬 월등하니 제약이 걸린 지금 저를 봐주겠다는 말이 아닌가.
나엘라가 눈짓하자 그로우를 붙잡고 있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나엘라가 정말 마호세르디의 기사인지 확인되지 않았으나 그 이름이 가진 무게가 있었다.
귀족 영애이기에 쉽게 믿을 수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귀족이기에 그 이름의 무게를 누구보다 명확히 안다. 그 말인즉, 당당히 그 이름을 쉽게 뱉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기에 안 믿을 수도 없다는 이야기다.
하물며 본인이 그 마호세르디의 일원인데.
그 틈을 타 제니가 누군가에게 검을 얻어 얼른 그로우의 손에 쥐여 줬다. 얼떨떨한 기색으로 가만히 있기에 손수 검집까지 벗겨 줬다.
마호세르디의 검술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첫째인 단제 황실 기사단장은 황실의 위급상황이 아닌 이상 함부로 검을 뽑거나 대련해선 안 되고, 그 외 마호세르디 검술을 물려받은 인원들은 모두 공작령에 있으니 당연했다.
그렇다고 공작에게 대련을 청할 수 없다. 보려면 공작령에나 가야 가능한데 워낙 경계가 삼엄한 곳이라 제대로 기회가 없다는 편이 맞았다.
어느새 연무장의 모든 시선이 모여 있었다.
“그로우 가소 영식, 영광인 줄 알게나. 내게 검을 시사받는 것이니.”
나엘라는 묵직해 보이는 검과 다르게 가볍게 발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