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어떠한 무위는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한 단계 끌어 올린다.
나엘라의 검술은 부족한 근력을 채워 주기 위함인지 일반적인 기사들보다 스피드가 훨씬 빨랐다. 그렇다고 내지르는 검이 가벼운 것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녀의 검에는 스피드로 인한 가속도와 체중이 담겨 있었다.
그로우는 갑작스럽게 퍼부어지는 검에 황급히 검을 들었지만 막기에 급급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세는 무너졌다. 대응 속도가 느리다는 것은 경험의 부족을 얘기했다.
일반적인 남자들보다 체격이 작아 자세 변환이 더 빠른 나엘라에게 그로우는 손쉬운 상대였다.
오른쪽으로 치고 들어오는 검을 황급히 막으니 어느새 왼쪽 허리춤을 베였고, 위에서 내리치는 검을 막으니 어느새 허벅지를 얕게 베고 지나갔다.
나엘라의 검술을 또 다르게 표현하자면 유연함이었다. 근육이 두꺼운 남자라면 쉽게 하지 못할 자세를 탄탄한 하체가 흔들림 없이 받쳤다.
그런 나엘라를 일개 기사인 그로우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완전히 일방적인 결투였으나 나엘라는 쉽게 끝내주지 않았다. 검은 급소를 하나도 노리지 않았다. 허나, 중간중간 날아오는 주먹이나 발차기는 정확히 급소를 가격했다. 딱 기절하지 않을 정도만.
“자, 잠깐. 하, 항─!”
항복이라는 단어가 채 나오기도 전에 나엘라는 무릎으로 명치를 찍어 입을 막았다.
그로우의 점점 끔찍해져 가는 몰골과 항복이라는 말도 못 하게 만드는 집요함을 보며 연무장에 있던 이들은 깨달았다.
마호세르디의 기사라는 말을 당당히 뱉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실력이어야 하는지.
“항……ㅂ…….”
한참 뒤, 끝내 항복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못하고 그로우가 혼절했을 때에야 나엘라는 검을 멈췄다. 그로우의 몰골은 피와 흙으로 범벅되어 걸레짝과 다름없었기에 몇몇 기사는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나엘라는 혼절한 그로우를 슬쩍 응시하곤 발로 그의 종아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빠각─ 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었다간 다음 타자는 무조건 자신이 되리라 확신이 들었다.
“후우, 끝까지 항복이라는 말을 하지 않다니 그 정신력만은 인정해야겠군. 소정의 치료비는 보내 줘야겠어.”
전하께서 못 하게 만들었지 않습니까! 모두의 아우성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끌고 가서 시내 아무 곳에나 내버리거라. 가소 백작이 알아서 주워 가겠지.”
자기 아들인지도 못 알아볼 몰골이지만 몇 명의 기사는 묵묵히 그로우를 치웠다.
“그나저나…….”
나엘라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자 모두 기합이 들어가 정자세를 유지했다.
“다들 오늘 일로 깨달았겠지.”
무엇을? 대공비의 하녀를 건들면 걸레짝이 된다는 것?
“지안은 내 하녀이니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은 간다. 분명 나에 대한 모욕을 들었겠지. 또는 자신이거나.”
몇몇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에 대해 지안의 대응은 당연한 행동이다. 너희의 모욕은 너희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 대공 가문의 기사를 모욕했다면 곧 대공을 모욕함과 같다. 모시는 주인에 대한 모욕은 당연하니 접어 두고, 하녀든 기사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욕을 당하면 내게 알려라.”
늘 담담하고 무심하고 차갑다 생각했던 눈에 강한 기백이 담기자 론체는 지안이 왜 그렇게 굴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성격을 확신하기 때문이리라.
“내게 와서 알린다면 가문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갚아 줄 것을 약속한다.”
지안은 자신의 주인을 믿었고 그래서 당당했으며 아무 말 없이 두들겨 맞아 나엘라에게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보통 믿음이 아닌 이상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공가에 들어온 안주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범상치 않은 것에 작은 한숨을 쉰 론체는 걱정되는 바를 말했다.
“아무리 가소 백작이라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보복은 걱정하지 말도록. 내가 누구의 이름으로 싸웠는지 잊었는가? 책임은 마호세르디가 질 것이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 나와 대공 전하가 혼인했을 때 노헤스카가 마호세르디의 이름을 얻었음을 깨달았어야지.”
기사들 사이에 작은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체드란과 나엘라의 결혼으로 둘 사이의 끈이 생긴 것은 맞지만 마호세르디의 이름을 얻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똑같은 500년 역사의 가문이라는 자부심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마호세르디 공작가가 어떤 가문인가. 마호세르디가 완전한 같은 편이 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기사들 사이의 술렁임이 점점 커졌다.
마호세르디의 기사인 나엘라, 그리고 그녀의 가문인 서부의 방패 마호세르디.
그 모든 것이 노헤스카의 편이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그 설렘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조금씩 반짝거리기 시작한 눈동자들이 나엘라를 향해 모였다.
“검을 들게, 론체 반트모어 경. 나는 아직 화가 덜 풀렸네.”
“예……?”
“우리 지안이 저만큼 두들겨 맞을 때 그대는 뭘 했는가?”
론체가 침묵하자 부단장이 얼른 나섰다.
“그로우 영식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기도 했고, 그래도 가신 가문인지라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론체는 부단장을 향해 손을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내 여분의 검을 가져오게.”
“단장님! 아무리 그래도 기사들과 병사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나엘라는 픽─ 코웃음을 쳤다.
“그대가 부단장이지?”
“아, 네. 노헤스카 대공가 붉은 월계수 기사단의 부단장 바체 다롱입니다.”
“다롱인지 아롱인지 그대도 저기 서서 대기하고 있게.”
“예……?”
“그대도 말리지 못하지 않았나? 그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던 기사 셋도 함께 대기하고 있게.”
부단장 바체는 입을 천천히 벌렸다.
그리고 이어진 대련에서 그로우를 상대할 때 보인 실력이 나엘라의 본 실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백전노장이라 불리던 론체 반트모어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으니 말이다.
나엘라의 강함에도 놀랐지만, 검에서 느껴지는 상대를 이기겠다는 집요함, 지안을 내버려 둔 것에 대한 분노에 질려 나가떨어졌다.
이어 아롱다롱으로 불리게 된 부단장과 세 명의 기사들이 줄줄이 나가떨어지고 있을 때, 체드란은 저택에서 온 한 편의 급보를 받았다.
전령새의 발목에서 종이를 풀어 내용을 확인하던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된 산행에 잠시 휴식을 취하던 체드란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기사는 얼떨떨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집사장이 스트레스가 심한가 봅니다. 돌아가면 휴가를 내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슨 일이지?”
기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대로 말했다.
“대공비 전하께서 그로우 영식을 두들겨 팼답니다.”
그로우라는 이름에 체드란은 안 좋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음, 그로우를 뭘 어쨌다고?”
“두들겨 팼답니다. 대공비 전하께서 직접. 거기다 단장님과 부단장님도 두들겨 맞고 선임 기사 몇도 두들겨 맞았답니다.”
“그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자기는 너무 무섭다고 하루빨리 돌아와 달라는데요? 아니면 마든 집사장이 이곳으로 오겠답니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필체가 날아다니는 것이 아무래도 또 정신이 나가 있는 모양입니다.”
“확실히 돌아가면 휴가를 줘야겠어.”
기사는 아무렇지 않게 쪽지를 모닥불로 던져 넣었다. 그 뒤로 마든에게 몇 번 더 급보가 날아왔지만, 예정된 그의 휴가만 점점 길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체드란이 돌아왔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
“아버지가 가소 백작에게 뭐라고 보냈다고?”
그 일이 있고 난 뒤 나엘라의 요청에 마호세르디 공작은 바로 가소 백작가에 소정의 치료비와 서신을 보냈다.
지안은 이래야 더 아파 보인다며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딸기를 야무지게 먹으며 기억을 떠올렸다.
“미사여구랑 통상적인 안부 내용을 제외하면 이런 뜻이었어요. ‘우리 딸아이가 님네 망나니를 뒤지게 팼다는데 원래는 참한 아이다. 그런데 혹시 우리 아이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아시는지? 물론 그 댁 망나니가 묵사발이 났다는 것은 유감이다. 우리는 기사 가문이라 어렸을 때 검술을 조금 가르쳐 놓았는데 망나니를 팰 정도의 실력은 되었나 보다. 원래 몸이 허약하다고 알려진 아이인데 그런 애한테 맞을 정도면 너희 가문 망나니가 너무 허약한 것이 아니냐?’”
지안의 입에서 많이 뒤틀려진 편지가 줄줄 읊어졌다. 고개를 끄덕인 나엘라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평화롭던 방 안에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붕대를 너무 많이 감아 뒤뚱뒤뚱 움직이는 지안을 대신해 제니가 다가가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마든이 서 있었다.
“크흠, 다름이 아니오라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대공비 전하께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청하셨는데 괜찮으신지요?”
굉장히 상냥해지고 극진해진 어투에 지안이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
“알겠다고 전해라.”
나엘라의 말에 마든은 허리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고는 뒷걸음질로 총총 사라졌다. 마든의 잿빛 머리를 한참 바라보던 나엘라가 작게 웃었다.
그때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지안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대공 전하께 뭐라 변명하죠?”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이들은 다시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에도 나엘라만 여유로울 뿐이었다.
*
“나보고 지금……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인상을 쓴 체드란이 관자놀이를 문지르자 책상 앞에 일렬로 서 있던 이들이 면목 없다며 고개 숙였다.
그중의 하나인 론체는 왠지 더 왼팔이 욱신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왼팔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엇다.
“그러니까…… 반트모어 경이 옛날에 왼팔을 다쳤다는 걸 눈치챈 대공비가 집요하게 그쪽만 노렸다? 팔을 길게 베고 나서도 계속 왼팔만 노리길래 이러다 왼쪽 팔이 없어질까 봐 항복을 외쳤다? 기사단장이? 대공비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론체의 귀 끝과 목덜미가 붉어졌다.
체드란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함께 서 있던 부단장과 몇 명의 기사들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도 얼굴에 멍과 어디 하나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