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나마 가장 마지막에 서 있는 기사가 가장 멀쩡했다. 앞선 대련들을 보고 나엘라와 검을 맞대자마자 두 합만에 일부러 얼굴 한쪽을 맞아 주고는 바로 항복을 외친 기사였다. 덕분에 얼굴에 시퍼런 멍 자국이 있긴 했지만 가장 멀쩡했다.
앞선 대련으로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던 나엘라가 분하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으니 결국 승리자는 마지막 기사였다.
“그녀가 마호세르디의 기사라는 것도 믿을 수가 없는데 모든 기사와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 기사단장과 부단장을 꺾었다니,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집무실의 분위기가 점점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 와중에 잠시 나엘라에게 말을 전하러 갔던 마든이 돌아왔다. 들어오자마자 숨이 턱 하고 막히자 얼굴엔 좀만 늦게 올 걸 그랬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마든.”
“네, 넵?”
“차후 조치는?”
마든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가자 체드란은 결국 이를 갈았다.
“그로우 영식 말이야.”
“아! 대공비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시내 한복판에 버렸고 주위 경비대에 가소 백작가 쪽으로 연락을 넣으라 시켰습니다. 그래서 가소 백작이 데려갔고요.”
“하! 진짜 시내 한복판에 버렸다고?”
“넵! 대공비 전하께서 나중에 확인까지 하셨으니 확실합니다. 대공비 전하의 말씀으로는 치료만 잘했다면 어디 장애가 생기진 않을 거랍니다. 치료와 재활이 오래 걸리겠지만 괜찮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체드란은 차마 더 들을 수가 없어 손으로 뜨끈한 눈동자를 덮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눈치 없이 마든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이후의 조치는 마호세르디 공작께서 하셨습니다. 서신을 넣었다는데,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가소 백작이 한마디도 없는 것을 보면 잘 해결하신 것 같습니다.”
“하아, 대공비가 기사였다는 건?”
“아, 그건 소문나도 상관없으시답니다. 아니, 소문이 나길 바라고 계시던데요?”
체드란이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그대들은 대공비가 기사였다는 걸 믿는 것인가?”
머뭇거리던 론체가 입을 열었다.
“대공비 전하의 검술을 직접 본 사람은 누구든 믿을 겁니다. 물론 기사도에 맞지 않는 부분은 있으나 검술이 대단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아마 마호세르디의 검술을 대공비 전하에게 맞도록 변형하지 않았을까 추측 중입니다.”
“대공비가 연약하여 저택 밖으로 일절 나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가진 것이 많은 자일수록 감춰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적이 많은 공작가이니 딸이라고 가리지 않고 검을 가르친 것 같습니다.”
“그대가 잊고 있는 듯해 말하네. 대공비는 기사라고 했다. 기사가 무슨 뜻인지 잊었나?”
체드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직접 보진 않았으나 체드란도 론체가 느꼈던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대공비 전하의 검술은…….”
주제넘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지만, 만약 이 이야기를 누군가 해야 한다면 그것 또한 단장인 자신의 몫이었다.
“그 검에는 살의가 담겨 있습니다. 그저 가문의 일원으로 교육받은 것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기사였다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적어도 기사가 되기 위한 고된 과정들을 거쳤고 가주에게 인정받았다는 뜻일 겁니다.”
“살의가 담겨 있다는 말이 뜻하는 건 그것뿐이 아닐 텐데.”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 전쟁도 참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약점만 노리는 속전속결의 검술, 순간의 대처, 군더더기 없는 발도, 정석대로 이어지지 않는 검법들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수련이나 대련으로는 그런 살의가 담길 수 없으니까요.”
체드란은 책상 위에 올려진 보고서들을 골치 아픈 눈으로 훑었다.
갑작스럽게 국경을 넘은 세력들 때문에 그에 대한 보고서도 황실로 보내야 했고, 책상 한쪽에는 황태자에게서 온 서신도 있었다, 분명 황제와 그 주위 인원들에 대한 며칠간의 동향에 대해 보냈을 테고 차후 방향에 관한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영지의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런 와중에 나엘라까지 문제를 일으키니 체드란은 머리가 다 아팠다. 자신이 정말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위험분자를 대공저 안에 들인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했다.
“기사들과 병사들의 반응은?”
론체가 바체 다롱에게 눈치를 주자 황급히 입을 열었다.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단순한 그들의 눈에는 가문도 좋고 무위도 수준급인 사람이 대공가로 들어온 것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안주인이라는 느낌보단 또 다른 주군이라는 반응이 강합니다. 물론 흑심이 있거나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는 반응도 많고 기사도가 없는 검술이라는 평도 있지만, 그걸 제외하고도 실력만큼은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아시잖습니까? 기사들에게 실력 좋은 상관이 얼마나 자랑이 되는지. 거기에 더해 마음에 안 들던 그로우 영식까지 걸레짝을 만들어 놨으니까요. 드레스와 검이 그렇게 섹시한지 몰랐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섹시……. 일단은 넘어가는 분위기라는 거군.”
“그렇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체드란은 나엘라의 트집을 잡기도 어려워졌다. 명분도 분위기도 이미 그녀가 잡고 있었다. 자신이 없을 때 문제를 해결해 준 셈이니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감춘 것이 대공저에 위험이 될 것이냐, 아니냐였다.
“잠시 다롱 경과 다른 기사들을 내보내도 괜찮겠습니까?”
론체의 말에 부단장과 기사들이 체드란의 눈치를 보았다.
“마든 집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밝히지 못할 것이 있다는 말이었다. 체드란이 눈짓하자 마든과 다른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할 말이 뭐지?”
“대공비 전하께서 저번에 기사단을 장악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지. 경은 설마…… 대공비가 노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이번 일은 갑자기 발생한 사건이니 계획적인 것은 아닐 겁니다. 다만 이번 일로 대공비 전하께서 얻으신 것이 많습니다.”
“말해 보게.”
“가장 큰 이득은 역시 유대감이죠. 같은 기사라는 유대감은 기사들의 사정을 잘 모르는 귀부인으로 보지 못하게 만들 겁니다. 엄청난 무예를 갖고 있다는 경외와 상관될 사람이 제 사람에게 생긴 불의를 참지 않고 행동으로 나설 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 그걸 무마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 대공비 전하가 들어옴과 동시에 대공비의 가문인 마호세르디 가문의 힘도 갖게 된다는 것까지. 기사들이 단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경의 말은 대공비가 기사단을 장악한다고 했던 말이 실현되고 있다는 거군.”
“앞으로도 기사단의 주인은 대공 전하시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대공비 전하의 영향력이 늘어날 겁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직접 그녀의 목적을 듣거나, 무슨 수를 쓰든 그녀의 목적을 확인해서 해가 되지 않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거군.”
“영향력이 커지기 전에 빨리 확인해야 합니다.”
굵고 긴 손가락이 책상을 일정하게 두드렸다. 손가락마다 가득한 굳은살과 흉터들이 체드란의 시간을 증명했다.
“마호세르디 공작과 계약할 때까지만 해도 딸의 보호막을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그게 아니면 누가 봐도 공작이 손해 보는 계약이었으니까.”
“대공비 전하께서 일을 벌이시리라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의심하긴 했지만, 공작이 무언가를 꾸몄다고 하기에는 대공비 전하의 신변이 저희 쪽에 있는 상태입니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지 않습니까.”
“정말 첩자일 수도 있다. 단순한 정보 제공만 하는.”
“첩자라면 의심을 부추길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건 대공비 전하의 성격과 기사였다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혹, 그분의 개인적인 것은 제외한 공작의 다른 의도는 처음 예상한 것과 같다면 어떻습니까?”
론체의 말은 공작의 의도가 나엘라의 보호 의도가 맞고, 다만 대공비의 성격이나 기사였다는 언질만 없었을 뿐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체드란의 푸른 눈동자가 론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묵묵히 서 있었다.
“깜박 잊었군.”
“무엇을 말입니까?”
“경도 그 자리에 있었던 기사 중 하나였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그대도 긍정적인 반응이리라 염두에 둬야 했는데.”
“아…….”
탓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론체는 자신의 실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가장 의심스러운 이는 대공비였고 그 목적을 확실히 알기 전까진 끊임없이 의심하고 온갖 대응을 짜 놔야 옳다.
대공저의 안위에 가장 큰 부분을 책임지는 자신이 어리숙하게 굴었으니 질책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그만큼 대단한 것으로 하지.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보통이 아닌가 보군. 마호세르디에서 자라서 그런가.”
귀족 위의 귀족이라 불리는 공작이다. 그런 공작 밑에서 자랐다면 나엘라도 지도자적인 면모를 자연히 습득했을 것이다. 확실히 다른 이들에게 보고 들었던 나엘라는 명령이 익숙한 이였다.
체드란이 보았던 나엘라 또한 그랬다. 결혼 첫날 마차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부터 이미 평범한 귀족 영애의 것은 절대 아니었으니.
“어쨌든 오늘 바로 확인하지. 내 저택에 의도를 모르는 자를 계속 돌아다니게 할 수 없으니.”
대화가 끝난 것을 알리자 론체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집무실을 걸어 나오며 착잡한 마음을 애써 숨겼다.
론체가 봤던 나엘라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출중했다. 그 당당한 보라색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당연히 따라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제 속에도 틈이 생긴 모양이었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쉰 론체가 문밖에 서 있던 마든에게 인사를 전한 뒤 복도를 걸었다.
이 나이에 수많은 사람을 접하며 사람 보는 눈을 키워 왔다. 제 눈에 비친 나엘라는 분명 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진짜 적은 밝은 미소를 띤 채 칼을 숨긴 사람들이지 자신의 것을 내보이며 부딪치는 사람이 아니다.
아까 자신의 어리숙함을 한탄했음에도 론체는 체드란과 나엘라의 대화가 나쁘지 않기를 바랐다.
눈을 빼앗기도록 검을 휘두르던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 그래서 대공과 대공저의 사람들에게 힘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