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식당에 숨이 막힐 정도의 정적이 흐르는데도 정작 당사자들은 태연해 보였다.
느긋하게 메인디쉬로 나온 고기를 썰고 있는 나엘라와 가니쉬들을 집어먹고 있는 체드란은 식사가 끝나기 전까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둘을 보며 양옆으로 보좌하듯 서 있는 하녀와 하인들, 마든은 죽을 맛이었다.
이게 어딜 봐서 며칠 만에 만난 부부의 저녁 식사란 말인가.
달칵, 소리와 함께 식기를 내려놓은 나엘라가 냅킨을 들어 입 주위를 톡톡 두드리자 체드란도 식사를 멈췄다.
“모두 나가 있지.”
체드란의 말에 나엘라가 눈짓하자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뒤로도 식당엔 잠깐의 정적이 자리했다. 나엘라도 재촉하지 않았고 체드란도 말을 고르는 건지 바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얼마 뒤, 체드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는…… 기사였다고 들었다. 검은 방패 기사단 소속이었나?”
검은 방패 기사단은 마호세르디 공작령과 더불어 서부 국경선을 지키는 기사단이었다.
나엘라의 둘째 오라버니인 다나한 마호세르디가 기사단장으로 있으며 실질적인 마호세르디의 검술이 전수되는 기사단이었다.
“네. 맞습니다. 기사단과 함께 자랐고 기사단 속에서 한 명의 기사로 살아왔습니다.”
담담한 그녀의 말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름을 명백하게 공표했다. 나엘라가 사실 병약한 귀족 영애가 아니라 가장 전투력이 높다고 꼽히는 곳 중의 하나, 서부 국경지대 기사였다는 말이었다.
황실 다음으로 귀하게 자랐어야 할 그녀가 사실 어느 귀족 영애보다 강하게 자랐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럼 단도직입으로 묻지. 한 명의 기사로서 명예와 자부심을 근간으로 자랐을 그대가 왜 노헤스카 대공령의 안주인으로 왔나?”
체드란의 물음에 나엘라는 식탁에 놓여 있던 물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 몸을 조금 틀어 체드란과 제대로 마주 봤다. 상석에 앉아 있던 체드란과 오른쪽에 앉아 있던 나엘라는 자연스레 시선이 겹쳐졌다.
“대공 전하의 물음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일단 제가 기사인 것과 대공가와의 혼인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체드란과는 척을 지어선 안 되기에 나엘라는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제가 기사가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역시 그중의 하나는…….”
나엘라는 차분히 말을 골랐다.
“제가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흔히 천재라고 하죠.”
체드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낯설고도 익숙한 그 단어가 나엘라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마호세르디의 피를 잘 타고 태어난 건지 저는 검을 처음 잡은 그 순간부터 제 나이였을 때의 오라버니들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났습니다. 저 또한 검이 좋았고 검을 잡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기사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체드란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스스로 천재라고 얘기하는 자신감에 놀라야 할지, 귀족 영애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검을 잡아 기사가 된 것에 놀라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군.”
단조로운 체드란의 대답에도 일생을 무뚝뚝한 기사들과 어울려 살았던 나엘라는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쓰는 자들은 심상을 단련하는 것 또한 필수기에 기사 중 말이 많은 이가 별로 없었다.
“그렇다면 대공가와의 혼인은?”
나엘라는 체드란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사람의 속내를 훑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마치 어느 정도까지 말해도 될지를 가늠하는 것 같아 체드란은 가만히 기다렸다.
말하지 않는다면 말하게 하면 그만이고, 말한다면 진위를 가려 어디까지 믿을지 결정하면 된다. 어느 쪽도 완전히 나엘라는 믿지 않는 선택지였지만 체드란으로선 당연한 자세였다.
“아버지와 대공 전하의 계약 조건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비밀리에 마호세르디 공작가가 황태자 전하를 지지할 것. 둘째, 노헤스카 대공 전하가 황제를 배신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것. 셋째, 나엘라 마호세르디와 체드란 노헤스카의 혼인. 맞습니까?”
“그렇다. 표면상으로는 사이가 안 좋다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나는 황태자를 지지한다. 그러니 나에게 있어 누구보다 유리한 계약이지. 욕심 많은 황제의 눈을 가리고 마호세르디의 힘을 얻었으니.”
“그러나 마호세르디에는 전혀 득 될 것이 없는 계약이죠. 지금처럼 황제를 지지한다면 우리는 계속 이 권력을 안전하게 갖고 있을 테니까요. 실례지만 그런 의심스러운 계약을 왜 하셨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처음 체드란에게 이 계약은 독이 든 사과와 같이 보였다.
마호세르디가 안전한 길을 놔두고 황태자를 지지한다는 것은 쓸모없는 모험이었다. 더군다나 황제 앞에서 대놓고 지지하면 마호세르디도 황태자도 더욱 지독한 견제를 받게 될 테니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하는 수고로움도 있었다.
두 번째 조건은 첫 번째 조건을 위한 안전장치였다.
체드란은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황실을 떠났지만, 현재 제국에서 두 번째로 강한 군사권을 갖고 있었다.
계승권을 포기한 이유 자체가 황제와 연관되어 있었으니 황제의 눈에 그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런 체드란이 안전하게 중앙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선 황제의 충신으로 알려진 마호세르디의 이름만큼 더없이 확실한 보증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계약을 증명하기 위한 방식으로 나엘라와 체드란의 혼인이 조건에 포함되게 된 것이다.
둘이 세기의 사랑을 했다 알려진다면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는 체드란이 마호세르디와 척을 질 리 없다는 변명거리가 생긴다. 그것만으로도 적게나마 황제의 의심을 덜 수 있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완벽한 표면상의 이유를 만들기 위해 혼인을 추가했다. 나엘라는 그렇게 마호세르디의 배신을 방지하기 위한 인질이 되었다.
누가 봐도 이득이 한쪽으로 치우친 계약이기에, 오히려 체드란은 독이 든 사과라고 여겼다.
마호세르디 공작에게는 손해뿐으로 보이는 이 계약을 받아들인 이유를 얘기하자면…….
“황제를 알기 때문이다. 황제는 더 오랫동안, 더 큰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 하지. 숟가락 들 힘이 없어도 황제로 살다가 죽으려고 할 것이다. 아마 황태자가 아니라 황태손이 바로 황위를 이어받을지도 모르겠군. 만일 황제가 성군이었다면 황태자는 자신의 자리에 만족했을 것이다. 오히려 머리 아픈 일은 안 해도 된다고 좋아했을지도 모르겠군.”
“그 얘기는 즉, 황제 폐하는 성군이 아니라는 거군요.”
“다들 알고 있는 얘기 아닌가. 황제는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다. 자식조차 자신의 권력을 넘보았단 이유로 죽인 사람이야.”
“전 황태자 후보 말이군요. 둘째 황자였던.”
“귀족들뿐만 아니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수많은 이들도 있다. 그것이 황제가 한 짓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지.”
“그런 이유로 계약을 받아들이셨다는 거군요. 미지라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마호세르디의 힘이 필요해서.”
“그 이유가 반이지. 나머지 반은 황제가 오랜 충신조차도 온전히 믿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요구인지 공작의 의지인지 모르겠지만 첫째인 단제 마호세르디는 황실 기사단장이 되어 황제의 수족이 되었고, 둘째인 다나한 마호세르디는 공작령의 기사단장이 되어 국경을 지키고 있다. 당연히 국경을 비우고 수도로 올라올 수도 없다. 그나마 고려할 사항은 공작이 기사단을 움직일 경우지만 황제의 눈이 있는 한 움직이긴 어렵다. 첫째가 황제의 인질과 마찬가지이니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지.”
“그렇다면 대공 전하께서는 막내인 저만큼은 황제의 눈에서 벗어나게 하도록 아버지가 이 계약을 진행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처음에는. 자신과 두 아들은 이미 틀린 것 같으니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도 보호할 겸, 이 계약을 진행했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있는 자라면 황제의 방식에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다. 평생 소중한 모든 것들이 인질이 되어 도구로서 사는 삶을 바라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대가 기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대를 왜 기사로 키웠을까? 그대가 왜 군사적 지식을 갖추었을까? 공작은 그대에게 왜 그런 것들을 교육했을까?”
“제게 기사단을 맡기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만약 그대에게 국경을 맡기고 다나한 마호세르디와 기사단을 움직인다면? 단제 마호세르디를 포기할 각오를 했다면? 그렇다면 굳이 나와 이런 계약을 하지 않아도 공작은 일을 진행할 수 있다. 황태자를 지지할 수는 있으나 손해 보는 계약을 할 필요 없으니까.”
나엘라는 작게 올라오는 먹먹함을 누르기 위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게, 체드란도 바로 계산하는 방법인데. 아버지는 왜 실행을 못 해서 이런 손해 보는 계약도 하고, 체드란의 의심까지 사는지 모르겠다.
“간단합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아직도 제가 어린 막내딸로 보이기 때문이죠.”
아버지께 대들기도 해 봤고, 성인이 된 이후 집무실에 누워 온갖 생떼도 부려 봤다.
자신이 국경을 맡든, 기사단을 이끌고 수도로 올라가든, 일을 도모할 때 마호세르디의 힘이 되겠다고 소리쳤다.
자신이라고 안 해 봤겠나. 하지만 아버지의 결정은 나엘라가 마호세르디의 검이 되는 것이 아닌 대공가의 보호를 받는 것이었다.
“제가 기사로 큰 것과 군사적 지식을 갖춘 것은 모두 제 의지였습니다. 언제까지 어린 딸로만 보셨어요. 커서도 아버지와 대련 한 번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검을 겨누지 못하셨으니까요. 그러니 계약은 순전히 아버지의 유별난 딸 사랑 때문이 맞습니다.”
“일을 도모하면 마호세르디든 노헤스카든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대공께서 빠져나갈 길을 만드실 겁니다. 일이 실패하면 모든 것은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가 덮고 가겠다는 생각일 게 뻔하죠.”
“공작이 검은 방패 기사단을 움직이고 다나한 마호세르디가 남은 기사단과 병사들로 국경을 지킨다면 마호세르디는 충분히 방비가 된다. 하지만 노헤스카는 내가 붉은 월계수 기사단을 움직이는 순간 남은 기사단과 병사들을 통솔하고 지휘할 자가 없다. 그렇다면 마호세르디가 더 안전한 것 아닌가? 나와 붉은 월계수 기사단이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알게 되면 두칸의 야만족들은 지체 없이 이곳을 침략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다시없을 기회이니 모든 병력을 집중시킬 테고 이곳은 순식간에 전쟁터가 될 것이다.”
“빠른 속도로 황실을 점령할 그 잠깐 동안만 버티면 되는 것 아닙니까? 대공 전하와 기사단이 대공령으로 돌아올 그 기간만 공성전으로 버티면 됩니다.”
“두칸이 야만족이라 불리는 것은 그들이 멍청해서가 아니다. 그들도 총력전을 해 올 테니 론체 반트모어 경을 두고 간다 해도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다. 반트모어 경은 대단한 기사지만 그와 나는 이름값이 다르다. 두칸이 받을 심리적 압박감이 다르다는 이야기야.”
체드란은 두칸의 야만족 전사들을 수없이 학살했던 전쟁광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어차피 마든은 두고 가실 거 아닙니까?”
체드란이 무슨 말을 더 하려 입을 열었다가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