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표정 없던 체드란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어 갔다.
“내가 지금 마호세르디의 정보력에 감탄해야 하는가, 황제의 첩자도 가득할지 모를 정도로 낮은 보안에 걱정해야 하는가?”
“보안 걱정은 만일을 위해 대비하는 것이 좋겠군요. 대공령의 총집사가 너무 어린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습니다.”
나엘라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체드란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게다가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총집사의 덕목인데 마든은 너무 솔직하더군요. 좋은 하인은 될 수 있지만 좋은 총집사는 아닐 겁니다. 마든 손바닥에 가득한 굳은살을 봤습니다. 검을 한두 해 잡아 본 손이 아니더군요. 그러다 문득 대공가의 잿빛 머리기사에 관해 떠올랐습니다.”
대공과 함께 전쟁터를 누비며 두칸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잿빛 머리칼의 기사. 그의 유명세가 두칸 쪽에 유독 강해서 그렇지, 아는 자들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특이하게 투구를 쓰지 않고, 잿빛 머리가 피로 붉어질 때까지 싸우기로도 유명했다. 그는 이름 하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별칭과 용모파기만큼은 두칸의 전사들이라면 모두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성전이 벌어질 경우 그가 별동대를 구성해 처음 한두 번만 나가 싸우는 것만으로도 두칸의 사기는 확 꺾일 것이다.
나엘라가 잿빛 머리를 보고도 마든과 그 기사를 한 번에 연결 짓지 못한 것은 성격 때문이었다. 모순적인 일이었다. 집사가 맞는지 의심하게 한 것도, 소문의 잿빛 머리기사가 맞는지 의심하게 만든 것도 그 성격 때문이라니.
누가 봐도 겁이 많은 마든을 어떻게 학살자라 불리는 그 기사와 동일인물이라 생각할까.
나엘라가 마든의 정체를 확신하게 된 계기는 지안이 스치듯 한 언급 때문이었다. 마든의 습관이 나엘라와 같다던 그 말. 유난히 손을 자주 씻는다는 것도, 악몽을 자주 꾼다는 것도.
나엘라는 버텨야 했고 마든은 버틸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유일한 의문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마든을 집사장으로 임명했는가’지만 그것까지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누구에게나, 혹은 어떤 가문에나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있는 법이었다.
“이런, 내가 그대 하녀들 손의 굳은살을 봤듯 그대도 그랬으리라 생각했어야 했는데. 실책이군.”
“그러셨습니까? 이것 참, 제 손만 숨길 것이 아니었는데 깜박했군요.”
“하녀들이 장갑을 끼고 다니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나. 그대는 숨기는 것에 성의가 없더군.”
“제 하녀들과 같은 말을 하십니다.”
체드란은 식당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꽤 진지하게 얘기하는가 싶던 나엘라는 어느새 한마디도 지지 않는 뻔뻔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이번 대화로 나엘라의 성격은 조금 알 것 같았다.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기는 체드란을 보며 나엘라는 그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두었다.
얼마 후 고민을 끝냈는지 그의 눈동자는 이때까지 봤던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마치 전쟁터 한복판에서 그를 마주치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날, 대공가의 사람들이 모욕을 당한다면 상대가 그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내 보기엔 그대가 한 말의 범위가 모욕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사람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이는군. 그대의 사람을 건들면 절대 가만있지 않는 성격이 맞는가?”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마호세르디 공작과 두 공자 또한 두고 볼 생각이 없겠군. 그런데도 나와의 혼인을 수락했고 말이야. 마지막으로 묻지. 그대는 대공가에서 무엇을 할 예정인가?”
나엘라는 이 질문이 바로 체드란이 가장 묻고자 했던 내용이자 앞으로의 대공가 생활을 판가름할 출발점이라 생각했다.
한 치의 거짓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체드란의 눈빛에도 나엘라는 주눅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하니까.
“지킬 겁니다. 늘 하던 대로.”
“무엇을? 누구를?”
“제 아버지도, 두 오라버니도, 그리고 제가 남은 평생을 살게 될 이 대공가도 말입니다.”
식당은 더는 대공 부부의 식사 자리가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전장을 겪었던 두 군장의 강인한 기세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
“저기…….”
마든의 부름에 지안이 돌아보았다. 식당 밖에 서서 주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은 마든과 지안의 사이가 소원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은근슬쩍 귀를 기울였다.
“몸은 괜찮은지……. 아무래도 몸이 나을 때까지는 회복에 전념해야 할 테니 집사장으로서 하녀를 하나 더 지원을 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아?”
안 그래도 지안은 붕대를 둘둘 감은 몸으로 무리해 따라나선다며 한소리 들었던 차다. 그래서 홧김에 붕대를 죄다 푸르고 졸졸 따라왔는데 회복에 전념하라니?
지안의 표정이 와락 구겨지자 마든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나름 신경 써 준 것인데 왜 저렇게 표정을 구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몸은 멀쩡하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는 눈이 많은 터라 지안은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했다. 자신이 괜히 무례하게 굴어 나엘라의 흠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맞았는데…….”
지안은 점점 짜증이 치밀었다. 그가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었다. 두들겨 맞았다 동네방네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왜 자꾸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별거 아닙니다.”
“그게 어떻게 별거가 아닙니까?”
지안은 점점 이를 악물었다. 나엘라에게 언질을 들어 마든이 잿빛 머리기사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마든을 좋아하지 않았다. 강한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겁이 많은 것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음이 약한 것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지안의 눈에는 나엘라 또한 그저 여리디여린 사람이니까.
하지만 마음이 여려도 지킬 것이 있는 사람들은 강해져야만 한다. 약한 마음이 약점이 되지 않도록 속으로 꾹 눌러 삼킨 채 버텨야 했다.
그러나 마든은 지킬 것이 없는지, 아니면 이 대공가가 지켜야 할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 건지 전혀 그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나엘라가 있기에 더욱 비교되는 걸 수도 있었다. 마든은 나엘라와 같은 습관을 갖고 있지만 여러모로 달랐다. 나엘라처럼 손에서 피가 날 때까지 씻지 않았고 악몽을 꾸었다 한들 숨을 못 쉴 정도로 허덕이지도 않았다.
나엘라는 이를 악물고 버텨 내는데 마든은 온몸으로 티를 내며 헬렐레 돌아다니고 있다. 그 꼴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지안이 마든의 습관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가 온 사방에 말하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그게 왜 별거입니까?”
짜증을 티 내지 않으려 참다 보니 지안의 목소리 끝이 조금 갈라졌다.
“한 명의 기사가 여인을 무차별 폭행한 겁니다. 당연히 큰 문제입니다.”
마든의 얼굴에 걱정이 올라와 지안은 더 짜증이 났다.
“다른 귀족가였어도 큰 문제였을까요? 이건 나엘라 님이 큰 화를 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됐을 뿐입니다.”
“그, 그렇지만 다른 귀족 집안에서 그냥 넘어갈 문제라고 별거 아닌 건 아닙니다…….”
“별거 아닌 게 맞습니다. 다만 조금 달랐을 뿐입니다. 나엘라 님은 제 사람을 건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시고 저는 제 주인의 모욕을 그냥 넘길 수 없었을 뿐입니다.”
“그건…….”
“저는 주인의 모욕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고 주인이 아닌 자에게 사과할 생각도, 무릎 꿇을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오직 나엘라 님을 위해서 일하고 나엘라 님에게만 사과하고 나엘라 님에게만 무릎을 꿇습니다. 그렇게 배웠고 앞으로도 그러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마든의 입이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채 열렸다 닫히는 것을 반복했다. 그저 걱정했을 뿐인데 지안이 이렇게 단호히 나올지 몰랐다.
나엘라의 하녀 중 유독 성격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앞으로도 그리하겠다 확언한 셈이다. 정말 나엘라를 위해서라면 위험한 일도 스스럼없이 달려들 것만 같았다.
“지안은 대공비 전하를 많이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바닥으로 고개를 푹 숙인 마든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웅얼댔다. 어딘지 처량한 말투에 지안은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안은 여린 모습을 보이는 이들에게 약했다.
“저는 주군의 사람이니 제 모든 행동은 나엘라 님을 향하는 것이 당연하고, 나엘라 님이든 나엘라 님의 명예든 지키는 것이 당연한 소명입니다.”
“그런가요……?”
마든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숙여 곧 땅이랑 만날 기세였다. 그 짜증 나는 모습도 싫고, 왠지 자신이 저 꼴로 만든 기분이 들어 괜히 한마디 덧붙였다.
“후우,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강한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강한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을 더 굳건하게 지킬 수 있으니까요.”
“지안은 강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겁니까?”
“네. 그래서 이렇게 맞았다고 한들 겁먹지 않습니다. 또,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 치부할 강한 사람이 되고 싶고요. 그래서 버티는 겁니다.”
“그럼 지안은…… 버티는 사람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 주군은께선 그런 분이라 저도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아…….”
마든은 눈을 끔벅거리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무언가 놀란 것 같으면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혼잡한 표정이었다.
마침 식당 문을 열고 나엘라가 나오는 바람에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그만 가자.”
나엘라의 말에 지안과 다른 이들이 뒤를 따랐다.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며 마든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멋, 멋있잖아……?”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도 모를 듯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마든 때문에 주변의 눈동자들이 그에게 향했다가 얼른 흩어졌다.
나엘라의 뒤를 따라 나온 체드란이 마든을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왠지 모르게 눈이 반짝거리는 것이 평소의 태도와는 미묘하게 달랐던 탓이다.
자신을 보는 시선이 어떻든 마든은 집무실로 돌아가는 체드란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급히 따라붙었다. 그러고는 피곤한 체드란을 붙잡고 내내 소리쳤다.
앞으로 자신이 체드란을 지킬 것이며 더 강한 사람이 되겠다고.
그 충정이 절절 흘러넘치는 외침은 참다못한 체드란이 마든을 집무실 밖으로 쫓아내고 나서야 일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