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3)화 (13/220)

12화

며칠 동안 대공령엔 평화로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다른 이들은 이 이유를 알 수 없는 평화가 대공 부부의 대화가 잘 끝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낸 나엘라가 론체의 집무실로 향했다. 한창 훈련을 하던 기사들은 의아함을 담아 하나둘 시선을 돌렸다.

나엘라는 흘끔대는 눈길들을 상관하지 않은 채 체드란과의 대화를 되새겼다.

“그대는 그대의 말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체드란의 마지막 말이었다.

다행히 나엘라를 믿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한 나엘라는 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기사단장의 집무실은 기사단 숙소 1층에 있으므로 연무장을 빙 둘러 가야 했다. 그런 나엘라의 눈에 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입고 있는 복장이나 지급된 보급형 검을 보니 수습기사인 것 같았다.

그 기사는 가장 기본 검법을 연습하는지 기초 자세로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길이기에 나엘라는 가볍게 말을 걸었다.

“하체가 흔들리는군.”

“예?”

화들짝 놀란 그가 엉거주춤하게 검을 내리고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하체가 흔들리면 같은 검을, 같은 식으로 휘둘러도 계속 다른 궤적이 된다.”

“아, 그게…….”

아직 어려 보이는 수습기사가 머리를 긁적였다.

“한 기사님께서 제가 근육이 잘 붙지 않는 체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단련을 해도 하체 근육이 약하여 자세가 계속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나엘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근력이 더 붙기 전까지 레이피어나 사브르처럼 얇은 검을 써 보는 것은 어떤가?”

“하지만 그건…… 여인들이나 용병들이 쓰는 검, 아닙니까? 대공비 전하께서도 일반적인 장검으로 결투를 하셨는데…….”

“그대에게는 장검이 맞지 않는 것 같은데?”

“그래도 기사 중에 그렇게 얇은 검을 쓰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건 편견이다. 마호세르디에는 그런 검을 쓰는 이들이 종종 있다.”

나엘라의 말에도 수습기사는 우물거리며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너무도 잘 알기에 나엘라는 탓하지 않았다.

기사에게는 목숨만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기사도였다. 기사도란 공격과 방어에 있어서 불명예스러운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는데, 지금의 기사도는 보이는 외견에 더 치중한 느낌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얇은 검으로 갑옷의 접합부를 노리거나 목과 발목 같은 약점을 노리는 것이 불명예라고도 생각했다.

진짜 강한 자라면 정정당당하게 무예로 이겨야 한다는 멍청한 생각이었다.

“그대의 나이가 어떻게 되지?”

“저는 열여섯 살입니다.”

“그럼 아직 한창 성장기로군. 체력 빼면 시체인 다른 이들은 고된 훈련으로 근력을 촘촘하게 만드는 것도 방법이지. 하지만 그대는 그런 체질이 아니야. 혹독한 훈련은 그대의 성장에 오히려 독이 될 거다.”

“그래도 얇은 검을 쓰면 그에 맞는 검술로 바꿔야 할 테고 그럼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그 손가락을 부러트리면 되지.”

“예에?”

수습기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나엘라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대는 한 번도 전투를 해 본 적은 없겠군.”

“네. 제가 아직 어리고 미숙해 수색이나 정찰은 나가지만 전투는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게. 사브르로 단번에 적을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이와 장검으로 세 합 만에 상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이가 있다. 전투에 더 많은 동료를 살리고 더 많은 적을 죽이기 위해선 어떤 이가 더 필요할 것 같나?”

“당연히 더 빠른 사브르가…….”

“정찰 중에는 적이 안 나타난다는 보장이 있나?”

수습 기사는 나엘라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대비되지 않은 이가 전투는 물론이고 수색이나 정찰에서 과연 힘을 쓸 수 있을까.

“보이는 것에 치중하지 말게. 누군가는 치졸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해. 그렇게 해서 내가 많은 동료를 살렸다면? 그것이 자네는 부끄러울 것 같나?”

“아니, 아닙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울 것 같습니다.”

“기사도는 저기 수도에서 고귀하게 생활하는 기사 나으리들이나 지키라고 하지. 여기는 군사경계 지역이다. 바로 앞에 국경선이 있고 그 너머에는 언제든 이 영지를 끝장낼 수 있는 야만족들이 있음을 잊지 마라.”

“네.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엘라는 수습 기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만약 치졸하다고, 그렇게 살아남았다고 손가락질하는 이가 있으면 즉시 내게 와서 고하라.”

“예……?”

“바로 이르란 말이다.”

“아…….”

“그럼 내가 진짜 치졸이 뭔지 보여 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나엘라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실행이나 변화의 대한 선택은 모두 당사자의 몫이었다.

무엇을 깨닫든 무엇을 잃든 말이다.

*

론체는 어색한 손길로 차를 내왔다. 평소에 차를 잘 먹지 않음을 얼마나 티 내는지 찻잎과 차기를 찾기 위해 온 서랍장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나엘라도 평소라면 만류했을 테지만 오는 길에 수습 기사와 대화를 했더니 목이 좀 말라 그냥 두었다. 어차피 자신이 힘든 것도 아니니 말이다.

물론 차 맛을 맛본 뒤론 찻잔을 그대로 내려 둔 채 그냥 말릴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부르셨으면 제가 갔을 텐데요. 여기는 하녀가 없어서 차를 내올 사람이 없습니다.”

본인 차 맛을 아는지 그도 어색한 말투였다.

“하녀는 왜 없지?”

“제가 좀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이곳은 청소해 주는 하인들과 남자들만 가득하니까요.”

론체 본인이 불편하기보단 아마 하녀가 불편해하는 게 눈에 보여서 오지 않도록 조치한 듯싶었다. 거친 기사들과 병사들, 심지어 근처에 기사 단장까지 있다면 어렵지 않을 리 없으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나엘라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머릿속으론 상큼한 민트 차만 간절했다. 얼른 돌아가서 차에 일가견이 있는 제니에게 부탁해야겠다. 맛없는 차를 마셨더니 입이 영 텁텁했다.

“저택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기본 검술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려고 하네.”

론체는 직접 내린 차를 한 모금 머금은 후 다시 내려놨다. 차 맛도 황당한데 더 황당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인, 하녀, 기타 사용인들을 가리지 말게.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도 수련에 도움이 될 테니 신임 기사들에게 맡기고 가끔 선임 기사들이 들여다보면 되겠군.”

어디부터 어디까지 잘못됐는지 선을 그어 나엘라에게 답변해야 할지 모호했다.

“이유나 방법 등을 자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엇을 원하시는지 제대로 들어야 제 의견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지. 내가 듣기로 대공저가 이렇게 큰 것은 비상시에 영주민들을 내부로 피신시키기 위함이라고 들었다. 이곳은 언제든 전쟁터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때가 되면 하녀들이나 사용인들도 싸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우선 그들도 해야 할 일이 있을 테니 3교대로 돌아가면서 교육하는 게 좋겠군.”

“…….”

“그리고 선임 기사들에게는 미리 언질해 두게. 가끔 들여다볼 때 몇 가지를 유의 깊게 보라고. 발놀림이나 몸 움직임이 뛰어난 것도, 부족한 것도 아닌 어색한 이들은 검을 배운 적 있을 가능성이 높네. 티를 내지 않으려는 이들이니 암살자나 첩자라 의심해 봐도 되겠지.”

“…….”

“너무 열심히 하는 이들도 기록해 두게. 첩자들은 힘들어도 나갈 수 없으니 혹여 밉보일 것을 염려해 열심히 할 걸세. 내 용건은 여기까지, 질문 있으면 하도록.”

나엘라의 말에는 명확한 이유와 부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점이 확실히 있었다. 하녀, 하인, 사용인들을 훈련시킨다는 발상 자체가 놀라워 론체는 진행 방향을 가늠했다.

문득 그녀의 하녀들 모두가 검을 쓰는 자들이라는 게 떠올랐다. 혹시 공작저의 이들 대부분이 기본적인 검술을 할 줄 아는 것일까.

그렇다고 공작가의 사정을 물어볼 순 없으니 대신 가장 걸리는 부분을 물었다.

“외람되오나, 혹시 대공 전하께서 승인한 일이십니까?”

나엘라는 잠시 말을 멈췄다. 선연하게 놀랐다는 기색이 스쳐 오히려 론체가 의아해진 참이었다.

“여기 와서 색다른 경험을 많이 하고 있네. 예를 들면 기사 단장이 내게 반문하는 것도 그렇고, 내게 다른 이의 허락을 받고 왔느냐 의심하는 행태도 그렇고.”

론체는 진심으로 놀랐다는 말투에 오히려 더 당황하고 말았다.

나엘라는 분명 기사였다고 하지 않았나? 마호세르디의 기사 단장이 그녀에게 절대복종이라도 했다는 투라 론체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론체가 알기로 마호세르디에는 세 개의 기사단이 있다. 그중 한 곳의 단장은 둘째 아들이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두 기사단의 단장이 별 볼 일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 다 들어 봤을 법한 이들이 단장으로 있기에 더욱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론체는 그런 당황스러움을 뒤로하고 일단 정중히 사과부터 전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의 주군은 대공 전하시기에 그분의 명을 최우선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이 저택의 사용인들을 모두 교육하려면 많은 인원이 투입될 테고, 그럼 앞으로의 훈련이나 군사 계획들도 수정이 불가피합니다.”

“알고 있어. 다만 그저 색달라서 낯설고 기꺼운 것이니 신경 쓰지 말게. 공작령의 기사 단장들은 내가 내린 명령을 어떻게든 수행하려고 하기 바빴거든.”

“다나한 마호세르디 경이 말입니까?”

“아, 둘째 오라버니는 까칠해서 한 번에 들어주시지는 않았지만 결국 응해 주셨지. 다른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나엘라는 새삼 그때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오라버니들은 대부분 걱정이 앞서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나엘라를 믿는 만큼 모두 들어 주었다. 아버지인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두 단장이야 나엘라가 집무실만 찾아가면 얼굴이 핼쑥해졌다.

“마호세르디 경 외에 다른 두 단장 중에는 크젠키 경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이름을 여기서 들으니 반갑군. 크젠키 경은 내가 어떤 사고를 칠지 떨기 바빴지. 매일 나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면서 졸졸 따라다녔네. 더군다나 제대로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가문의 기사 단장이라도 망설임 없이 응징한다는 것을 잘 아는 이였지. 그래서 더욱 고생했던 것 같군. 인제 와서 생각해 보면 좀 잘해 줄 걸 그랬어.”

전장의 철퇴로 유명한 그 크젠키 기사 단장이……?

거기다 명령이란 말이 물 흐르듯 나오는데, 이렇게 이질적으로 들릴 줄 몰랐다.

기사단과 함께 자라며 기사로 살았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왜 기사 단장들한테 명령하고 다녔단 말인가.

“외람되지만 하나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경은 외람되는 말을 많이 하는군. 물어보게.”

“대공비 전하께서는 기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일개 기사가 어떻게 기사 단장들한테 명령을 내렸단 말씀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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