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게 문제였군.”
나엘라는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대공 전하께 듣지 못했나 보군.”
“무엇을 말입니까?”
“사실 나는 말일세.”
진지하게 뱉어지는 말에 론체가 눈을 부릅뜨고 집중했다.
어쩌면 마호세르디의 특별한 무언가를 알게 될지도 몰랐다. 다른 귀족가처럼 나엘라에게 직책만 줬을 것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상체까지 그녀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천천히 나엘라의 입이 열렸다.
“천재였네.”
천재였네─ 천재였네─ 천재였네─
담담하고 한없이 진지한 그 말이 론체의 귀에서 맴돌았다.
“아무튼, 여기 와서 수많은 이들을 새롭게 굴릴 생각하니 매우 기쁘네. 앞으로 잘 부탁하지.”
론체의 갈 곳 잃은 시선이 테이블 위를 정처 없이 떠돌았다.
*
모든 사용인이 기초 체력 단련부터 기본 검술까지 익히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나엘라의 말대로 의심 가는 자들 또한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와 별개로 체드란은 흔쾌히 그리하라 말한 것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고민 중이었다. 자신은 그저 나엘라의 의견이 타당하고 대공가의 이득이 되는 일이라 생각했을 뿐이건만.
점점 눈에서 총기가 사라지던 체드란이 뭐에 홀린 듯 업무 보고 하는 론체에게 물었다.
“일을 벌인 건 대공비인데 왜 내 일이 늘어났지?”
일이 늘어난 것은 체드란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얽혀든 론체도 고개를 저었다.
체드란은 영지 내 업무 처리로 정신이 없었다. 이 시기엔 기본적으로 일이 많긴 했지만 이번엔 유독 준비할 것이 쌓인 때였다.
반년 후 수도에서 움직이려면 정치 구도 정리와 대공령의 보수 작업, 두칸에 대한 대비를 미리 해 놔야 했다.
그런 시국인데 예상치 못한 일이 점점 더 쌓이고 있었다. 책상을 가득 채운 서류를 보자 골이 다 지끈댔다.
“아무튼,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 오늘 추가로 의심되는 세 명이 있었습니다. 첩자로 의심되어 그간 은밀히 살폈습니다. 두 명은 몸치인 것으로 판명 났고, 나머지 한 명은 확실하지 않아 대공령에 오기 이전 행적을 조사하는 중입니다.”
“그럼 이때까지 암살자로 판명 난 인물만 다섯 명이고 첩자로 판명 난 인물이 스물두 명, 의심 가는 이들이 열 명이군.”
“맞습니다. 밀착 감시 중임을 본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빨리 처리를 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암살자는 모두 죽이는 것이 낫겠지. 첩자는 처리할 인원과 내버려 둘 인원, 회유해서 이중 첩자로 돌릴 인원을 분류하지.”
“데리고 있으며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도 좋으니까요. 이중 첩자를 몇 명이나 시킬지도 논해야 하고 암살자와 첩자의 의뢰 대상자, 증거 보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심문도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그런 건 다른 이들을 시킬 수 없으니 경이 좀 더 수고해 줘야겠군. 나도 중간중간 계속 내려갈 테니 부탁하지.”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주요 공신인 대공비는 뭐라던가.”
론체는 한눈에 보기에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것이…… 공작가의 막내딸로 귀하게 자란 대공비 전하께서는 심문 같은 일은 할 수 없다고…….”
“귀찮은 건 전부 나에게 맡기겠다는 거군. 그런 일을 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라.”
그 말을 직접 들은 론체 자신도 황당한 답변이었으니 체드란은 오죽할까.
“보통은 가문을 내세우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 미덕인데 그녀만큼 가문을 잘 써먹는 이도 없을 것이다. 이럴 때만 공작가의 막내딸이군.”
뒤로 갈수록 발음이 뭉그러졌다. 묘한 억울함을 느꼈다. 그렇다고 일을 내팽개칠 수도 없어 체드란은 이를 갈았다. 어쨌든 일은 벌였으니 누군가는 해결을 해야 했다.
“그로우 영식 일을 공식화해라. 대공비의 하녀가 맞았으니 그에 화가 난 대공이 사용인들을 단련시키는 것으로 하지. 갑작스럽게 첩자가 줄어도 명목은 우리에게 있으니 황제도 크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귀에 대공비 전하가 기사였다는 것이 이미 들어갔을 겁니다.”
“황제는 편협한 이다. 공작이 딸을 아껴 검을 가르쳤다 한들 여자이니 그 실력이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하겠지. 그저 어느 망나니 한 명 이길 정도는 되는구나 할 것이다. 그로우 영식의 평가는 워낙 낮으니.”
“이번 한 번은 그냥 넘길 수 있다는 거군요.”
“그리고 다음번부턴 첩자를 이용해 정보를 통제하면 될 것이다.”
“확실히 대공가에는 좋은 일입니다. 갑작스럽게 첩자를 정리하면 황제의 의심을 살까 봐 그동안은 가만 둔 것이었으니까요.”
워낙 의심 많이 많은 데다 언제 자신의 권력을 탐하는 이가 나타날지 몰라 자식조차 감시하는 늙은이였다. 이번 기회에 전부는 아니라도 첩자들을 얼추 정리할 예정이다. 그럼 조금의 숨통은 틀 수 있으리라.
“늙은이가 무언가 눈치채기 전에 정말 세기의 로맨스라 소문이라도 만들어 놔야 할 판이군.”
처음에는 파티에 함께 나서는 정도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나엘라가 이 정도로 일을 벌였으니 더 큰 소문이 필요했다.
체드란은 또다시 시작된 고뇌에 뜨끈한 눈가를 문질렀다.
“일단 마든을 시켜 대공비에게 오늘 산책할 시간과 의사가 있는지 물어봐 주게.”
아무래도 나엘라와 의논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점심 식사 후 티를 마시는 시간, 나엘라와 체드란은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둘의 사이가 마냥 좋다고는 할 수 없는지라 그들을 바라보던 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혹여나 대공 부부 사이에 불화가 생기면 걷잡을 수 없었다. 둘 다 무뚝뚝하고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 말 한마디 없이 10분째 걷기만 해 다들 안달이 났다.
그냥 걷기만 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었을 터다. 하필 걷는 모양새가 누가 더 완벽한 걸음을 구사하는지 대결이라도 하는 듯해 주변인들은 애만 타들어 갔다. 마치 행군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같은 정원을 일정한 속도, 일정한 간격, 일정한 자세로 세 바퀴쯤 돌았을 때 아차, 싶었던 체드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구두를 신고 있는데 발이 아프겠군.”
남들보다 키가 큰 체드란의 보폭으로 벌써 세 바퀴나 돌았다. 이제 와서 말을 하다니, 무심했다. 제 배려를 탓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나엘라는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
“훈련 같고 좋았습니다. 구두는 편한 단화를 신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훈련이라…….”
체드란은 나엘라가 기사라는 것을 듣기만 한지라 신분 높은 귀족 영애의 표본 같은 겉모습에서 살짝 괴리감을 느꼈다.
물론 모습만 그러할 뿐 태도나 말투, 성격은 누구보다 잘 어울리긴 했다.
“다른 것이 아니라 그대도 계약에 대해 알고 있으니 앞으로에 대해 얘기하고자 청했다.”
“생각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말씀하세요.”
“우리 사이에 소문이 조금 필요할 것 같더군. 그대와 그로우 영식과의 일로 시선이 조금씩 쏠리고 있다.”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소문을 원하십니까?”
“로맨스적인 소문이 필요할 것 같군.”
“연애결혼으로 가죠. 마호세르디는 보안이 철저해 새어 나가는 정보가 별로 없습니다. 마호세르디에서 만났다고 하면 다들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만났다고 하면 좋겠나?”
“같은 군사 경계 지역이니 함께 대책을 논의한다든가 서부와 남부가 맞닿은 부분의 경계 강화라든가, 그런 이유로 당신이 찾아왔을 때 만났다고 하죠. 그리고 원래 가장 고전적인 것이 잘 먹히는 법입니다.”
“고전?”
“한눈에 반했다고 하죠.”
체드란은 잠시 눈동자를 돌려 먼 곳을 응시했다가 다시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에는 황궁에서 늘 목숨을 위협받으며 살았고 그 이후에는 전쟁터에서만 살았으니 연애의 기본이 무엇인지 아는 게 없었다. 아니, 알아야 한단 필요성조차 느낀 적이 없었다.
왠지 그게 왜 고전적이냐고 물으면 안 될 것 같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나엘라는 나엘라 대로 잠시 체드란의 기색을 살폈다.
다른 이들에게 한눈에 반하는 것이 가장 흔하고 잘 먹히는 사랑 이야기라 들은 적이 있었다. 체드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아하니 맞는 모양이었다.
역시 뭐든지 아는 것이 힘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엘라는 더 힘차게 걸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말하려던 체드란은 씩씩한 그녀의 걸음걸이를 보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떨결에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산책은 횟수로 다섯 바퀴를 채우고서야 끝이 났다.
함께 따라다니다 지친 하녀들과 함께.
*
나엘라가 아직 기사였던 시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
그 어느 날 새벽, 서부 국경과 맞닿아 있던 제스라 왕국의 침공이 있었다. 목적을 알 수 없는 게릴라전에 모두들 몸을 날래게 놀렸다. 새벽부터 집합한 두 기사단과 병사들은 어느새 국경 근처에 간이 막사와 사령부를 세운 채 대치 중이었다.
오늘은 공작령에 귀빈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어 다나한이나 검은 방패 기사단은 출정할 수가 없었다. 다나한은 급한 대로 검은 방패 기사단의 일부라도 함께 나가길 바랐지만, 나엘라가 거절했다. 이번 침공의 목적이 검은 방패 기사단의 분산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망할 그 귀빈 때문이었다. 황녀 중 한 명이라나 뭐라나. 국경지대를 오려면 조용히 올 것이지 소문이란 소문은 다 내는 바람에 제스라 왕국에서도 한 번쯤 건드려 보는 게 아니냔 말이다.
“단장님!!”
아직 앳된 기색이 남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한 기사가 달려오고 있었다. 이번 상반기 기사 시험에서 합격한 신임 기사였다.
“단장 아니라니까 왜 자꾸 단장이라 불러?”
지금의 나엘라보다 훨씬 가벼운 말투로 툴툴거리는 그녀가 거기 있었다.
“마호세르디 경이란 호칭은 다나한 단장님과 같다고 싫다고 하시고, 나엘라 경은 공녀가 기사라고 동네방네 소문내냐고 뭐라 하시고, 단장님은 단장님이 아니니 싫다고 하시면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그냥 부르지 마!”
짜증스러운 나엘라의 말투에도 신임 기사는 개의치 않았다. 얼마나 넉살이 좋은지 되레 나엘라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럼 애칭이나 가명을 만드는 것은 어떻습니까?”
“집어치워. 차라리 그냥 참모장이라고 불러. 나는 오늘 출정 금지됐으니까 참모다.”
“참모장이요? 세상 어떤 참모장이 총대장의 권한을 갖고 있답니까?”
“그런 권한 없다고. 결정은 단장이 한다니까?”
“말 안 들으면 단장님들 멱살 잡으시잖아요.”
“누가 그래?”
“막사 지키던 제 동기가 봤다고 했습니다.”
나엘라는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첩자 하나의 연락이 끊겨 열심히 여러 수를 계산하던 차였다. 마호세르디 영지와 바로 마주 보던 영지 기사단에서 꽤 직위가 있던 이였는데 제국 귀족으로 망명을 약속하고 첩자를 선택했던 인물이다.
그런 이가 갑작스러운 침공 전에도, 게릴라전이 계속 이어지던 오후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분명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물론 첩자가 그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첩자들은 서로의 정체를 몰랐고 연락을 보내는 방식 또한 모두 달랐다. 이런 상황에 다른 이들과는 지속적인 연락이 닿음에도 불구하고 그 혼자만 감감무소식이다?
만약 그가 잡혔다면 다른 첩자들도 위험했다. 걸리면 무조건 죽을 텐데 본인이 자수했을 리는 더더욱 없다. 그러니 지금부턴 제스라 왕국 쪽에서 첩자를 잡아내는 어떠한 방법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넘어오는 정보의 진위를 가려야 했다.
첩보전은 계속 의심하고 가장 믿을 만한 정보들을 모아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싸움이다. 그러니 신경이 몹시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신임 기사가 계속 말을 걸어 대니 짜증을 안 낼 수가 없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필요 없어.”
“오늘 식사 당번이 마른 풀로도 고기 맛을 낸다는 그 기사님이에요! 꼭 드셔 봐야 해요!”
“필요 없다고.”
“먹어야 힘이 나고 먹어야 머리도 잘 돌아가는 거예요. 자자, 오늘은 참모장이신 참모님? 어서 가서 저녁 드시죠?”
“필요 없다니까!”
왈칵 뱉어진 짜증에 신임 기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치를 보던 그는 결국 나중에라도 꼭 먹으라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비켰다.
나엘라는 몰랐다.
경직된 모습이 걱정되어 나엘라의 긴장을 풀어 주고자 신임 기사가 계속 말을 걸었다는 것도, 기사 여럿이서 서로 나엘라에게 가겠다고 가위바위보를 했다는 것도, 그 대화가 신임 기사와 마지막 대화였다는 것도.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신임 기사는 그날 저녁의 기습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