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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5)화 (15/220)

14화

“허억!”

벌떡 일어난 나엘라가 협탁 위로 손을 휘두르자 물건들이 쿠당탕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저녁 시중을 들기로 한 지안 대신 아침부터 대기하던 제니가 뛰어와 나엘라를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천천히 심호흡하세요.”

부들부들 떨리는 나엘라의 몸을 가만히 끌어안고 있으니 다른 하녀가 손 씻을 물과 마실 물, 향유를 한쪽에 놓고 다급히 커튼을 열었다. 좀 더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도록 침대의 캐노피도 한쪽으로 묶은 하녀는 나엘라가 다치지 않게 떨어진 물건들을 정리했다.

“괜찮아요. 우리는 지금 노헤스카 대공저에 있어요. 이곳은 전장이 아니에요.”

제니는 끝없이 나엘라에게 주문 같은 말을 걸었다.

조금이나마 진정된 나엘라가 손을 씻고 물을 한잔 마시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침대에 도로 누웠다.

그녀의 표정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또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봐. 짜증 나.”

나엘라는 어렸을 때의 꿈을 꾸고 나면 잠깐이지만 그 시기의 말투로 돌아가곤 했다.

말투만으로도 언제쯤인지 알 것 같아 제니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꿈을 얼마나 생생하게 꾸길래 말투마저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무엇이든 잘 잊지 않는 나엘라의 똑똑함이 싫었다.

“언제 적 꿈을 꾸셨어요?”

이것이 지안과 제니의 다른 점이었다. 지안은 나엘라의 꿈에 대해 일절 묻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꿈일 뿐이니 더는 생각하지 말라며 다른 이야기만 떠들었다.

하지만 제니는 오히려 꿈을 꿀 때마다 물어봤다. 나엘라의 고통을 공유하고 싶어 했고 같이 아파하고 싶어 했다.

누가 옳은 것은 없었다. 둘 다 나엘라에게 힘이 되었으니까.

“옛날에 하제라던 신임 기사 기억나?”

“저녁에 제스라 왕국이 기습했던 날이군요.”

“응. 미리 방비하고 있으면 첩자가 있다는 걸 눈치챌까 봐 일부러 적당하게 방비했던 날이었지.”

“선임 기사들에게 미리 언질을 줬던 터라 피해는 크지 않았었죠.”

“그 몇 없는 사상자 중에 하제 경이 있었고. 오만했던 나는 전략에만 몰두해 아주 적은 피해만 입으면 된다고 생각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이상해 보이더라도 확실히 대응하는 건데 그랬어. 첩자를 의심하면 또 다른 전략을 세우고, 새로운 최선의 방법을 찾도록 더 생각했으면 되는 건데.”

제니는 멍하니 허공을 보던 나엘라의 눈 위로 손을 올렸다.

“나엘라 님이 예전에 부하의 목숨값을 모르는 지휘관은 승리할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응…… 아군을 잃은 승리는 승리가 아니니까. 그래서 힘든 방법을 고집했지.”

“그럼 하제 경의 목숨값은 얼마였나요?”

“…….”

“다른 전투에서 잃었던 동료들의 목숨값은요?”

제니의 손바닥에 뜨거운 물기가 느껴졌다.

“모르겠어. 나는…… 아직도 그들의 목숨값을 모르겠어…….”

손을 타고 나엘라의 눈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 나엘라 님이 나섰던 전투들만큼은 잃은 자들의 목숨값을 알 것 같아요. 그들의 목숨값은 살아남은 자들이에요.”

제니는 나엘라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잃은 자보다 훨씬 많은 자를 살리셨잖아요. 그러니 그날을 후회하지도, 아파하지도 마시고 오로지 그들의 명복만 빌어 주세요.”

제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작게 흐느끼던 나엘라는 조금씩 잠에 빠져들었다.

*

대공가의 연무장에서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압!”

메이드 복과 유니폼 대신 각자 편한 옷을 입고 나와 검을 휘두르는 하녀들이 있었다. 기사들의 훈련 시간을 피해 오전 한 시간, 오후 한 시간씩 체력 단련과 검을 휘두르다 보니 손에 물집이 잡힌 사람도 더러 있었다.

안 쓰던 근육을 쓰고 똑같은 자세로 검을 몇십 분씩 휘두르니 하녀 숙소에서는 매일 앓는 소리가 울렸다.

거기다 하녀들은 일반적인 남자들과 체력도 체급도 달랐다. 훈련하는 것도 처음엔 여러 시행착오가 가득했다. 오죽했으면 처음에 남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훈련하다 뻗어 버린 하녀들 때문에 대공령의 일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일도 있었다.

그나마 원래 하던 하녀 일의 업무 강도가 낮아지고 숙소에는 영양 가득한 식사와 치료제가 매일 배달되니 어떤 이는 더 좋아하기도 했다.

“검을 처음 휘두를 때는 휘두르는 횟수를 채우기보단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힘을 주어 휘두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자를 만나기가 어려운 신임 기사들은 하녀들을 훈련시키며 땀을 뻘뻘 흘렸다. 그간 그녀들과 접촉할 일 자체도 없었다. 그 힘들다는 수습 기간을 지나 정식 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처세술도 부족해 어려울 만했다.

숙맥 같은 모습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지도 중인 기사도 있지만 이 시간을 즐기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기사도 있었다.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갔네요. 허리도 너무 뻣뻣하고. 이러면 관절이랑 허리에 무리가 올 텐데 말이에요.”

한 기사 하나가 목검을 쥔 하녀의 손을 감싸고 허리를 바르게 하라며 살살 문질렀다. 어디를 가나 이런 놈은 꼭 하나씩 있는 법이었다.

기사들의 숙소와 하녀들의 숙소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기사들의 숙소 청소조차 모두 남자 하인이 하는지라 서로 거의 마주칠 일이 없는 이들이 붙어 있으니 문제가 없을 리가 없었다.

대공령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 아니던가. 이곳이 대공저라서 이 정도이지 저택 밖에서는 더욱 비일비재했다.

더운 기후와 잘 내리지 않는 비로 척박한 땅. 게다가 이곳은 두칸과 맞닿은 곳이고, 야만스러운 그들을 상대하다 보니 일반적인 영지보다 거친 사람들도 많았다. 당장 시장에서 누군가아 부딪치기만 해도 험한 꼴 당하기 십상이었다.

적어도 대공저에서 하녀로 일하면 못 볼 꼴 보며 살진 않아도 되었다. 그런 생각으로 하녀는 꾸욱 참았다.

“이것 참, 하녀들이 긴 치마와 단정한 메이드 복을 벗고 딱 붙는 바지와 가벼운 티 하나만 입고 다니니 눈 둘 곳이 없습니다.”

체력 단련할 때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신축성 좋은 편한 바지를 입었을 뿐이었다.

“얼마 전에는 소소하게 병사 몇 명이 내기하고 있더군요. 누구의 가슴이 더 클지 내기하는 중인 것 같았는데, 기사가 아닌 놈들이니 기사도를 강요할 수도 없고…… 안 그렇습니까?”

훈련을 처음 시작할 때 론체가 몇 가지 당부한 것 중 하나가 상호 간의 존칭이었다.

어쨌든 검으로 지도하고 지도받는 처지이나 정말 아랫사람은 아니니 서로 예의를 차리라는 말이었다.

하녀는 자신을 희롱하는 기사의 말을 들으며 존칭이 이렇게 역겨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자세 교정을 명목으로 은근슬쩍 몸을 만지며 지나가는 손길은 마치 지렁이가 몸을 기어 다니는 듯했다.

“자세가 아까보다 더 무너졌군요.”

그 싫은 손길을 참느라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니 자세는 더욱 망가져 갔다.

탁, 목검을 붙잡아 검을 멈춰 세운 기사가 가만히 하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감에 요동쳤다. 사람을 내려 보는 듯한 시선과 소름 돋는 욕구가 확연히 느껴져 하녀는 다리마저 풀릴 것 같았다.

“제게 계속 지도를 받고 싶어 일부러 더 그러시는 겁니까?”

하녀는 당황스러움에 몸이 굳어 입을 벌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처음 느껴 보는 그 눈빛이 유독 무서웠다.

너무 어린 시절부터 대공가의 하녀 생활을 한 게 문제였을까. 이때까지 남자 한 번 안 만나본 게 문제였을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겁에 질린 하녀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럴 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상대는 대공가의 자랑인 기사였다. 대공령을 지키는 검이었고 야만족으로부터 하녀가 이날 이때까지 살 수 있게 지켜 준 기사이기도 했다.

부모님으로부터 귀에 박히게 들었던 그 말이 하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미리 말을 해 주지 그랬습니까.”

목검을 잡고 있던 기사의 손이 스르륵 타고 내려와 검 손잡이를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지났다.

티의 소매 안으로 파고든 거친 손이 하녀의 손목을 쓸어 냈다.

“하녀들도 남자 만날 시간이 없어 몸이 달아 있다더니, 소문이 영 거짓은 아니었군요.”

“이, 이러시면 안…….”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더듬거리던 하녀는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들 자신의 훈련에 정신이 없거나, 혹은 이곳의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음에도 어떻게 해야 하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하필 눈치챈 이들은 모두 하녀들인 데다 다른 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기사들은 전혀 모르는 모습이었다.

다시 다른 곳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리던 하녀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

정확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론체에게 무언가 받아 오던 길이었는지 품에 서류가 가득했다.

대공비의 직속 하녀이자 지안과 자매라던 제니였다.

대공비의 직속 하녀라면 얼마 전의 일로 기사들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하녀가 제니를 향해 입을 벌렸다.

“도, 도와주……세…….”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제니 때문에 하녀의 말은 점점 가라앉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응?”

하녀가 바라보는 곳으로 얼굴을 돌렸던 기사도 제니가 고개를 젓는 것을 보았다. 기사는 살짝 긴장하던 것도 잠시 옅게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대공비의 하녀는 이번 일을 묵인할 생각 같았다. 계속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어차피 이 하녀는 대공비의 직속 하녀도 아니니 문제가 없을 듯했다.

“아니 참, 이러면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지 않습니까? 앞으로의 훈련 때도 계속 볼 예정인데 이러면 보기 거북하지 않겠습니까?”

울컥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아 하녀는 다시 제니를 바라보았지만, 제니는 여전히 단호한 표정이었다.

절대 도와주지 않을 듯한 그 모습에 하녀는 새하얗게 질렸다.

“우, 우리는 직속 하녀가 아니라서 그, 그런…….”

제니를 향해 더듬거리는 하녀의 말에 기사가 코웃음을 쳤다.

“이러면 제가 무슨 희롱이라도 한 것 같잖습니다.”

그 말에 하녀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패닉이 올 것 같았다. 이런 눈빛이 처음이라 무섭고 혹시나 앞으로 무슨 불이익이 생길까 두려웠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니를 간절히 바라본 하녀는 잠시 멍해졌다.

제니는 입 모양만 움직여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직. 접. 말. 해.’

뭘? 무엇을? 어떻게 직접 말하란 말인가.

왜 도와주지는 않고 직접 말하라고 할까. 그랬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본능적인 두려움이 일었다.

“왜 이렇게 떠십니까? 지도하는 저를 그쪽이 먼저 유혹한 거잖습니까?”

힘이 빠진 손에서 스르륵 목검이 떨어지자 기사가 탁, 잡아채었다.

“오늘은 많이 지친 것 같으니 제가 숙소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꾸욱 잡는 기사의 힘에 어깨가 너무 아팠다. 아까보다 좀 더 늘어난 눈빛들이 불안에 잠겨들었다.

그래, 다른 가문에서는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근데 저는 왜 절대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행동했을까. 도와주지 않는 제니에게 왜 절망했을까.

아, 한동안 대공저 사람들 사이에 퍼졌던 작은 설렘 때문이었다.

“그 어떤 이라도 모욕을 당하면 내게 알려라.”

“내게 와서 알려 준다면 가문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갚아 줄 것을 약속한다.”

그 작은 설렘이 뭐라고, 새로 오신 대공비 전하가 멋있다며 하녀들 사이에 한동안 이 이야기가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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