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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6)화 (16/220)

15화

하녀들을 위해서 그 정도까지 해 줄지는 모르지만, 지안의 일을 보면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나엘라의 눈에 든다면? 나엘라가 아끼는 하녀가 된다면?

나엘라의 말에 회의적인 사람들조차 그때만큼은 나엘라가 가만있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자신은 나엘라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

얼마 전에 지나가다 인사를 드렸을 뿐인데.

수많은 하녀 중 한 명일 뿐인데.

게다가 그때는 그로우 영식이었고 이번에는 대공가의 기사이지 않은가?

나엘라가 과연 대공가의 기사들로부터 자신을 완벽하게 지켜 줄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험한 일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때 어깨를 누르는 기사의 아귀힘이 더 늘어났다. 하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이러지 마세요!”

생각보다 훨씬 큰 목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울렸다. 제 목소리에 되레 더 놀란 하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훈련하던 이들도, 그런 이들을 지도하던 기사들도, 모두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무장에는 정적이 가득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그때, 제니가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옆에 있던 어린 하녀를 향해 싱긋 웃었다.

“나 대신 대공비 전하를 모셔 와 줄 수 있겠니?”

어린 하녀는 주저앉은 하녀를 한 번 보곤 바로 들고 있던 목검을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본관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무, 무슨……!”

흙빛이 된 기사가 주변을 둘러보다 제니를 향해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이 하녀가 먼저 유혹했습니다!”

제니는 그저 싱긋 웃었으나 사실 마지막까지 긴장하고 있었다. 하녀가 무엇을 당하고 있는진 너무 뻔한데 끼어들 수가 없었다.

물론, 자신이 끼어들면 기사도 별말 없이 물러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식이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거기다 대공비의 힘을 입은 직속 하녀가 부린 권력 남용처럼 비칠 가능성도 있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직접 말해야 했다.

언젠가 터질 일이라면 지금 일을 크게 터트리는 것이 낫다. 크게 터트려야 나엘라가 나서기 수월하다.

“이 하녀가 먼저요?”

제니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의기양양해진 기사가 하녀를 손가락질했다. 마치 제니가 제 편을 들어주기라도 한 듯.

“네. 맞습니다! 은근슬쩍 신체 접촉을 하고 계속 도와 달라는 식으로 저를 다른 사람에게 못 가도록 막았습니다!”

주저앉아 있던 하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꼴을 보며 제니는 속으로 혀를 찼다. 확실히 언제가 터질 일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자가 있는 것을 보면.

나엘라도 고름을 터트려 확실히 치료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정작 자신의 고름은 신경 쓰지 않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기사님. 나엘라 님이 아주 공정하게 판단해 주실 겁니다.”

제니의 부드러운 웃음에 기사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

옆에 있던 하녀가 나엘라에게 작게 속삭였다.

“결국, 터졌군요.”

나엘라의 전속 하녀 중 유독 침착한 성격의 가린은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 나엘라가 악몽을 꿔 제니와 지안이 정신없이 굴어도 혼자서 침착하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며 시중들던 아이다.

그런 가린의 말에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터질 것이라 생각했고, 애초에 터지라고 따로 주의를 주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 하녀에게는 안 좋은 일을 겪게 했구나.”

“그래서 저희가 돌아가며 수시로 감시했잖습니까. 너무 큰일을 겪기 전에 해결하기 위해서.”

오늘 하필 그런 꿈을 꿨기 때문일까. 나엘라는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고름 위에 약을 바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언젠가 다시 이 일이 터졌을 겁니다.”

가린의 말에도 씁쓸함을 감추지 않던 나엘라는 어린 하녀의 얼굴을 보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숨이 차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하녀였다. 나엘라가 어떻게 대응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지 연신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쭉 지켜봤는데 그 기사님이 먼저…….”

연무장을 가는 길에도 내내 하녀를 변호하는 모습에서 아직 어린 티가 확 났다.

어느새 도착한 연무장에는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많은 인원이 모두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도착한 나엘라를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누군가의 얼굴에는 체념도 드러난 것을 보아하니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길을 내주자 나엘라는 천천히 걸어갔다. 그곳에는 겁에 질린 채 주저앉아 있는 하녀와 제니를 향해 연신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기사가 있었다.

“아!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완벽하게 기사의 예를 보이며 고개 숙인 남자는 자신의 한쪽 가슴에 올렸던 손을 풀었다.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다.”

기사가 무언가 원하는 것처럼 제니를 바라보자 부드러운 어조가 흘러나왔다.

“저는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 말로도 무척 만족했는지 기사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럼 당사자들에게 물어야겠군.”

앉아 있던 하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제가 설명해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기사가 정중한 척을 하며 묻자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 하녀를 지도하던 와중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작은 문제인지는 들어 봐야 알겠지.”

“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리자면 제가 지도를 하고 있는데 이 하녀의 자세가 자꾸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하나하나 잡아 주었는데, 오히려 아까보다 더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자연히 접촉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당황스러워 직접 물었습니다. 그럼에도 얼굴만 붉히고 말을 하지 않으니 제게 호감이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대공비 전하께서 직접 지시하신 훈련을 봐주는 중이니 거절했습니다. 몸이 좋지 않으면 숙소에 돌아가 쉬라고 하자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지 뭡니까? 그래서 지금 같은 소란이 벌어진 겁니다.”

말만 들어서는 기사의 잘못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 왜 그런 복잡한 표정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경의 말은 잘 들었다. 그대는 내게 할 말이 없는가?”

나엘라의 시선이 닿자 하녀는 제니를 바라보았다. 제니는 분명 자신이 당하던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단호하기만 했다.

“할 말이 없는가?”

다시 한번 묻는 말에 하녀는 고개를 숙였다. 연무장의 흙바닥에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절망감일까, 나엘라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것 같다는 불신일까.

그도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 한마디조차 못 하는 바보 같은 자신에 대한 한탄일까.

“이 하녀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모두 들켜 버렸는데요.”

한참 동안 말없이 울기만 하는 하녀를 보며 가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답답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들은 나엘라를 겪어 보지 않았고 두려운 것은 두려운 것이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보복이 얼마나 두려울까.

처음으로 느껴보는 뱀 같은 시선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모든 이들이 집중한 이 상황에서 겪었던 불쾌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또박또박 말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것도 나엘라가 자신을 믿어 줄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한 하녀는 입을 다물고 주변은 술렁거리는 데다 기사는 미소를 짓고 있던 그때, 가린은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러고는 나엘라의 옆에서 눈가가 빨개진 채 어쩔 줄 모르던 어린 하녀의 등을 강한 힘으로 밀었다.

피해자를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겠다는 것은 아니다. 안 되는 건 되게 해야 한다. 자신은 철저하게 나엘라와 함께 자란 사람이었다.

“어……?”

가린의 힘에 떠밀려서 자신도 모르게 나엘라와 주저앉은 하녀의 앞에 서게 된 어린 하녀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그대는 내게 할 말이 있는가?”

순식간에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게 된 어린 하녀는 입을 벌렸다.

아니 나는 분명 가만히 있었는데?

자신을 밀었던 가린은 뭘 보냐는 듯 철저하게 무표정이었다.

더욱 당황한 어린 하녀가 어쩔 줄 모르고 앞에 서 있을 때였다. 주저앉아 있던 하녀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새빨개진 눈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흐르자 어린 하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에라 모르겠다.

“저는 저 기사님이 테샤 언니를 희롱하는 것을 보았어요!”

연무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에, 제니는 가린을 향해 은밀히 엄지를 들어 올렸다.

희롱당했다던 하녀의 이름이 테샤인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저 어린 하녀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냥 같은 하녀라고 편을 들어주는─!”

나엘라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기사를 바라보았다. 서릿발이 내릴 만큼 차가운 시선이라 기사는 금세 합죽이가 되었다.

“나는 모든 이야기를 공정하게 들을 것이다. 계속 이야기하도록.”

그 기사의 외침에 움찔하던 어린 하녀는 후일이 겁도 나지 않는지 당당히 말했다.

“저도 처음부터 본 건 아니었지만 테샤 언니는 계속 거절의 의사를 밝혔어요! 누가 봐도 당황한 티가 났어요. 단호하지 못했던 건 기사님과 말을 섞어 본 것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기사님은 중간중간 하녀들이 몸이 달았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등 이상한 말도 하고, 막 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만지기도 하고 그랬어요!”

제니는 손뼉을 치고 싶었다.

세상에, 어디서 저렇게 똑 부러지는 애가 나왔을까?

나엘라 님께 새로운 막내로 추천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이야기를 지안에게 전해 주면 당장 방방 뛰며 통쾌해할 것일 뻔했다.

손을 내밀지 않는 이를 나엘라가 나서서 도와줄 순 없었다.

권력을 가진 이는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하며 언제나 공정해야 한다. 나엘라가 멋대로 도와준다면 그것은 편애이자 대공비라는 권력의 남용이 된다.

그러면 주인을 믿고 부조리를 말할 수 있는 이는 더욱 줄어든다.

한 걸음, 피해자가 용기 낸 그 한 걸음이면 되었다. 지금, 그 한 걸음을 대신 걸어 준 용감한 어린 하녀가 있었다.

그 순간 기사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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