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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7)화 (17/220)

16화

“말도 안 됩니다! 이건 모함입니다!”

기사가 방방 뛰며 당장이라도 어린 하녀를 해할 것처럼 굴자 나엘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 기사의 입을 막아라. 반론은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들을 것이다.”

나엘라의 말에 몇 기사들이 그를 제지했다.

“다른 이들은 이에 관해 할 말이 없는가?”

나엘라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단 한 사람의 말은 언제고 더 강한 목소리에 묻힐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낸 의견은 더 강한 목소리가 되고, 그것은 곧 나엘라의 명분이 되었다.

어린 하녀를 보며 망설이던 이들이 한 명씩 나섰다. 그들은 진즉 테샤가 곤란한 것을 눈치챘으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저도 보았습니다. 테샤는 분명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기사님이 강압적으로 돌아가 쉬라고 말했습니다.”

한 소녀의 용감한 한 걸음을 다른 이가 뒤따랐다. 그리고 그 걸음을 이어 주는 또 다른 이가 있었다.

“저, 저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기사님은 직접 데려다준다며 테샤를 끌고 가려 했습니다.”

“저도 기사님이 테샤의 손목을 희롱하던 장면을……!”

“저는 기사님이 하녀들은 몸이 달았다고 함부로 말씀하시던 것을……!”

다들 이런 것이 처음이었는지 조금씩 떨고 있었다.

하녀는 모든 것을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것이 미덕인 이들이다. 다만 익숙해졌을 뿐 제 목소리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저도 얘기해도 됩니까?”

조금이라도 테샤의 편을 들기 위해 앞다퉈 얘기하던 하녀들 사이에서 기사 하나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갑작스러운 낮은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렸다. 설마 기사가 나설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한 듯했다. 같은 신임 기사끼리는 함께 고생한 동료의 정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손을 든 이는 신임 기사가 아닌 선임 기사였다. 수상한 이가 있는지 확인하러 잠깐 들여다본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로우 영식 사건 때 나엘라에게 얼굴을 한 대 얻어맞고 장렬하게 항복을 외쳤던 이였다.

“저는 이 기사가 다른 하녀를 희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칭찬해 달라는 듯 나엘라를 향해 씨익 웃는 모습에 가린은 고개를 저었다. 나엘라의 성격상 하녀를 희롱하는 것을 보고도 묵인했으니 저자는 오늘 대련 확정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선임 기사는 해당 기사의 죄를 낱낱이 고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나엘라는 주저앉아 있던 하녀를 바라보았다. 테샤는 이 사태가 믿기지 않는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멍한 얼굴이었다.

“그대는 아직도 내게 할 말이 없는가.”

테샤는 나엘라의 보라색 눈동자가 서늘하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를 마주 보고 나서야 알았다. 왜 제니가 도와 달라는 자신의 말에 고개를 저었는지, 처음부터 다 봤으면서 왜 끝까지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는지.

도와 달라고 손을 내밀어야 하는 상대는 제니가 아니었던 거다. 자신을 믿어 주고 도와줄 수 있는 이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도, 도와주세요. 나엘라 님……!”

폭포수같이 흐르는 눈물 속에서도 나엘라의 자수정 같은 눈동자는 선명히 보였다.

그리고 나엘라는 잘했다는 듯 설핏 웃었다.

*

나엘라는 울음 섞인 그 말을 끝까지 묵묵히 들었다. 때로는 더듬거리거나 했던 말을 반복하고, 때로는 두서없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하지만 전부 기사가 했던 말을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나엘라는 다른 기사들에게 붙잡혀 입이 막혀 있던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내게 말했다. 테샤가 호감을 표시했고, 그 호감이 거절당하자 모두의 이목을 끌어 이 일을 벌였다고 말이다. 하지만 테샤와 다른 이들은 그대가 테샤를 희롱하고 원활히 이뤄지지 않자 강압적으로 행동했다고 말하는군.”

“읍!”

“풀어 주거라. 지금부터 반론을 듣겠다.”

다른 기사들이 물러나자 그는 바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모함입니다!”

“나는 분명 공정하게 듣겠다고 말했다. 이 모든 증언이 모함이라면 그 이유를 대라.”

“저는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분명 저 하녀가 먼저 유혹했단 말입니다!”

“그럼 이 많은 이들의 증언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모두 같은 하녀지 않습니까? 그러니 서로 도와주려 말을 맞춘 겁니다!”

“말을 맞출 시간은 없었다. 테샤나 다른 이들의 이야기도 서로 상충하지 않아.”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을 끼워 맞췄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선임 기사의 증언은 무엇인가?”

“그, 그것은……! 그것은 이번 일과 연관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대의 평소 성품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면 그대의 결백을 증언해 줄 이나 평소 그대의 성품을 증언해 줄 사람이 있는가?”

기사는 황급히 주변을 살피며 평소 친하게 지냈던 신임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눈을 맞추는 자가 없었다.

“기, 기사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못 봤을 겁니다!”

“그럼 기사들에게 묻겠다.”

신임 기사들의 눈이 나엘라에게 향했다.

“증언들을 듣고도 이 기사를 믿어 이번 일이 모함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는가?”

기사들은 모두 고개를 돌리거나 바닥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 기사를 처벌하는 것에 불만이 있는 자가 있는가?”

하녀들 또한 신임 기사들을 바라보았지만, 그 누구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나엘라는 고개를 돌려 제니에게 말했다.

“가서 기사단장 론체 반트모어 경을 불러오너라.”

제니가 바로 몸을 돌렸지만, 집무실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무슨 일이 터졌단 낌새를 느껴 나와 본 것인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끝에 론체가 서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지켜보고 있었나 보군. 어디부터 보았는가?”

“하녀들이 증언할 때부터 있었고 그 전의 이야기는 옆에 있던 기사에게 들었습니다.”

론체의 옆에는 한 신임 기사가 서 있었다. 나엘라와 눈이 마주치자 신임 기사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론체가 과정을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얼른 불러온 모양이었다.

“저택 사용인들의 관리는 모두 내 소관이라고 알고 있다. 기사단의 문제는 그대의 소관이고. 맞는가?”

“맞습니다.”

“나는 내 사람을 건든 저 기사를 처벌하고자 한다. 처벌권을 넘기는 것에 이의 있는가?”

기사는 와 닿은 론체의 시선을 느끼곤 유일한 동아줄이라고 여겼는지 얼른 무릎을 꿇었다.

“단장님! 이건 모함입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런 기사를 바라보며 론체는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거친 남자들이 불편할까 봐 집무실에 하녀도 쓰지 않는 사람이다. 이번 일을 달가워할 리 없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단장님!”

기사가 버럭버럭 소리 지르는 것이 시끄러워 나엘라는 주변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기사들은 눈치 빠르게 바로 알아듣곤 그의 입을 막았다.

“나는 분명 공정하게 모든 정황을 듣고 판단하겠다 말했는데…….”

무릎이 꿇려져 거의 바닥에 처박힐 듯한 자세의 그가 두려운 눈으로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왜 내게 무례할까?”

사람을 내리누르는 듯한 그 무겁고도 차가운 눈빛에 그제야 기사는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교양 있는 자들은 모욕을 받았다고 똑같이 행동하면 결국 같은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지.”

나엘라가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아까 어떤 하녀의 한걸음과는 매우 다른, 누군가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한 걸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철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상대가 사리사욕을 숨기지 못하는 장사치처럼 굴면 나도 그런 장사치가, 장소와 시간을 알지 못하는 시정잡배처럼 굴면 나도 그런 시정잡배가 되는 사람이지. 그렇게 복수하지 않으면 밤에 두 발을 뻗고 자지 못하는 사람이야.”

나엘라가 또 한 걸음을 다가서자 기사는 어떻게든 뒤로 물러나려 몸부림쳤다.

“그대는 하녀를 희롱했고 힘으로 제압하고자 했다. 또한 이 모든 일을 하녀의 탓으로 돌리며 전혀 반성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번 일이 커지지 않았다면 그대의 성격으로 보아 저 하녀에게 또 다른 큰일이 생겼을 것이다. 심지어 다른 이도 희롱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내게 무례하게 군 것까지.”

나엘라는 한 걸음 더 내디뎌 그의 눈앞에 섰다. 싸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처벌을 말했다.

“이자의 옷을 벗겨 시내 중앙에 묶어라. 지나가던 이들이 죄목을 알 수 있도록 실태를 커다랗게 적은 종이도 함께 붙여놓아라. 다섯 시간 후 풀어 주되 그 뒤에는 기사의 자격을 박탈하며 국경 최전방의 수색 병사로 좌천시킨다.”

그 말을 끝으로 기사는 다른 자들에게 끌려 나갔다. 그의 마지막을 보던 나엘라는 몸을 돌려 아직 모여 있던 이들을 바라보았다.

테샤는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 얼떨떨한 얼굴이었고, 다른 하녀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잔뜩 상기되어 있었으며 복잡한 표정의 기사들도 보였다.

그 와중에 선임 기사가 겁도 없이 나엘라를 향해 엄지를 세웠다. 마음이 좋지는 않은지 조금 어두운 표정의 론체까지 바라본 나엘라는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모두 기억해 둬라.”

다 끝난 줄 알고 좋아하던 이들이 놀라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너희가 모시고 지키는 나는 원한에는 똑같은 원한으로 갚는 사람이란 걸. 또한, 내 직속 하녀가 아니라도 이 대공가의 모든 사람은 나의 것이다. 나는 나의 것을 건드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아. 그것이 혹여 내 사람이었대도 내 것에 해를 입히는 이는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다 다시 나엘라를 보았다.

“내 품 안에 있고 싶다면 그 점을 명심해라.”

분명한 경고였는데 이들의 표정이 왜 이리 밝은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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