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대공가 접수하기
17화
나엘라를 따라 본관을 향하던 론체가 슬쩍 운을 뗐다.
“이번 일은 조금 과하셨습니다.”
“저번에는 유했던 것처럼 말하는군. 처벌이 약했다면 그자는 분명 테샤에게 보복을 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뻔히 일어날 일을 외면하진 않는다. 그자가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은 말아. 그자를 본보기로 삼은 것도 있지만 난 선을 넘는 자에게 절대 유한 사람이 아니야.”
“탓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대공비 전하께서 상대에게 똑같은 사람이 되리라 하셨으니 곧, 당신을 여왕처럼 대우하면 제게도 그런 사람이 될 것이란 말이지 않습니까.”
론체의 말에 나엘라는 조금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겠군. 그대를 여왕처럼 대우하기엔 누가 봐도 여왕의 행색이 아니야.”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그 말조차 웃겨서 론체는 가볍게 웃었다.
“대신 매우 아껴 주지. 그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겠군.”
론체는 아무래도 체드란의 말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로우 영식 사건 때 자신도 대공비에게 호감을 가졌으며 이번에는 제대로 인정하게 됐음을.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하게.”
“언제부터 그렇게 과격하셨습니까?”
나엘라는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냐는 표정으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과격하다고? 아마 천방지축 어렸을 때의 자신을 본다면 기절이라도 할 기세였다.
“어렸을 때는 더 심했다.”
“그러니까 대체 왜입니까? 공작님께서도 과격한 타입이십니까?”
“그럴 리가.”
“그럼 마호세르디 경들이?”
“둘째 오라버니는 조금 과격하긴 하시지.”
“그럼 다나한 마호세르디 경을 닮으셨습니까?”
“그건 아니다. 둘째 오라버니도 내가 벌인 일들에 기겁하곤 하셨으니.”
“그럼 태어날 때부터……?”
나엘라는 론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검을 좋아했지.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검을 끼고 살았다. 기사단의 모든 기사를 찾아가 대련을 청했고 내가 꺾지 못한 기사에겐 며칠이고 도전했지. 그러다 기사단 내에 적수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밖이라 하시면……?”
“용병, 노숙자 등 신원을 가리지 않았고 연무장, 숲, 뒷골목 등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때 좀 여러 가지를 배웠던 것 같군.”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천재였다니까.”
“그러다 안 좋은 감정을 품은 이들이 떼로 덤비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하셨습니까.”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나 혼자 돌아다니게 가만있었겠나. 그리고 나 또한 보복을 염두에 두지 않을 만큼 바보는 아니다.”
나엘라가 밖으로 나갈 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호위들이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정말 위험한 곳에는 가지 않았다.
황당하다는 듯 론체가 고개를 저었다.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보통 성격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경은 본관에 왜 가는가?”
“곧 시찰 가셨던 대공 전하께서 돌아오실 시간입니다.”
“자진 납세하러 가는군.”
“자진 납세는 대공비 전하께서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 대신 경이 불려 갈 것 같으니 미리 가는 거 아닌가?”
뻔뻔하다 못해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가서 나는 아주 공정하게 처벌했다 말하게.”
“강요하시는 겁니까?”
“협박일세. 지금보다 일 더 많아지고 싶나?”
론체의 일이 많아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투다. 나엘라에 대한 호감과 별개로 그녀를 볼 때마다 벌벌 떨었다는 마호세르디의 기사단장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
체드란은 입고 있던 경복을 풀다가 일렬로 서 있는 론체와 마든을 보고 멈칫했다. 마든은 하녀들을 통해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온 차였고 론체는 그 전부터 대기 중이었다.
둘을 애써 무시하고 옷을 갈아입은 체드란은 집무실 의자에 앉았다. 급해 보이지 않는 얼굴들을 보니 큰일은 아닌 듯했다.
“들어오는 길에 어떤 기사 하나가 끌려 나가며 난동을 피우더군. 무슨 일인가?”
“대공비 전하의 명으로 처벌받은 기사입니다.”
“무슨 처벌?”
“시내 중앙에 나체로 다섯 시간 묶여 있는 벌과 그 후 기사 자격 박탈, 최전방 수색 병사 좌천을 명하셨습니다.”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체드란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시내에서 나체로 묶어 놔? 대공가의 기사를?”
체드란의 말에 마든이 흠흠 헛기침을 하고 나섰다.
“반트모어 경, 그렇게 말씀하시면 전하께서 오해하시지 않겠습니까?”
“아, 대공비 전하께서는 공정하게 모두의 의견을 듣고 처벌하신 겁니다.”
매우 공정했다고 덧붙이는 마든과 천천히 설명하는 론체의 말을 들으며 체드란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손은 이마를 짚었고 마지막에는 두 눈을 가렸다.
나엘라가 과격해진 이유까지 전부 들은 체드란은 두 손으로 얼굴 전체를 덮고 있었다.
“그래서…… 마든의 생각은?”
“어떻게 사람을 당당히 제 것이라고 얘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체드란 님에게만 얘기하는 거지만 사람을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 얘기하는 것이 참으로 귀족적이지 않습니까? 근데 이상하게 타고난 지배자 같습니다. 여자임에도 이 사람이라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줍니다. 그리고 사실 엄청나게 통쾌하기도 했고요. 아시잖습니까. 제가 그런 기사들을 가장 싫어한다는 걸.”
나엘라가 기사단을 접수하지 못한다는 것에 자신의 손목을 걸었다는 걸 마든은 기억이나 할까? 그는 나엘라의 처벌을 은근슬쩍 안 좋게 말하면서도 홀딱 빠진 표정이었다.
지금 총집사로 있는 이유 중 일부는 기사들 탓도 있으니 얼마나 후련했을지 상상이 갔다.
“반트모어 경은?”
“앞으로 제 의견은 참고하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무슨 일이 터져도 아마 대공비 전하의 편을 들 것 같습니다.”
이건 더 어이가 없었다.
“검이 좋아 상대의 신분을 가리지 않는다니 얼마나 기사답습니까. 저는 대공비 전하를 더 이상 그저 한 명의 여인으로만 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제는 기사도랑 안 맞는다며? 약점만 죽어라 노렸다며?
체드란은 아무래도 전쟁을 나가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대공비의 방법이 전에 없을 정도로 독특하고 과격한데 항상 결과가 좋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하녀와 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사들은 지금이라도 알고 있던 부조리들을 고발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얘기 중입니다. 나중에 걸려서 큰일 치르기 전에요.”
그 말에 문득 무언가 생각난 체드란은 생각에 꼬리를 물다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네들 혹시 나에게 불만 같은 거 있나?”
“네? 무엇을요?”
“대공비에게 가서 고할 것이 있느냐는 말일세.”
마든과 론체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만약 나엘라에게 체드란이 잘못한 것을 고하면 어떻게 될까?
덩달아 둘의 얼굴이 심각해지자 체드란은 헛웃음을 지었다.
제 사람들인 줄 알았던 대공가의 사람들이 어느새 그녀에게 홀리지 않았나. 대공비가 제 것이라 표한 지칭에 아무런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그 사람들을 제 울타리 안에 넣었다니.
어느새 대공비가 기사단을 접수한 셈이 아닌가.
체드란은 무엇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이러다 정말 기사 중 누군가가 체드란이 비리를 저질렀다며 나엘라에게 달려갈 판이다.
“하아…….”
체드란의 한숨이 깊어지는 와중에도 둘은 그들의 주군이 비리를 저지른 적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었다.
*
오늘의 메인 디쉬는 해산물이었다.
좋아하는 생선이 깊은 맛을 내는 소스와 함께 잘 구워진 것을 보던 나엘라는 묵묵히 먹다 결국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너무 강해 도저히 식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있으십니까?”
체드란은 가늘게 뜬 눈으로 마치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러다 결국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만약 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면 자네는 어떨 것 같나?”
잠시 고민하던 나엘라는 가볍게 물었다.
“유부녀를 만나셨습니까?”
“치정에 관한 부정 말고 도의적으로 옳지 못한 일을 저질렀을 때 말이네.”
“그런 일을 왜 저지르셨는데요?”
“안 저질렀네.”
“앞으로 저지를 예정입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반트모어 경에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매우 공정한 사람입니다.”
공정하다는 말을 오늘따라 자주 들은 기분이었지만 체드란은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 끄덕임에 만족한 나엘라가 말을 이었다.
“만약 저지른 일이 부정하다면 저는 그 목적이나 의도가 부정한지도 확인할 것 같습니다. 공정이라는 것은 공평하고 올바르다는 말이지만 언제나 세상이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공정해지려 노력하지만 늘 정도를 걷는 사람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 말은…… 사람을 죽였어도 그것이 대의를 위해서라면 눈감아 준다는 말인가?”
“대의의 목적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혁명도 대의를 위해 일어나고 쿠데타도 그들만의 대의가 있습니다.”
“그럼 어떤 대의를 봐주겠다는 건가?”
“대체 누굴 죽일 작정이라 그러십니까? 황제 폐하라도 된답니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온 주제에 체드란은 입을 다물었다. 단지 나엘라의 판단이 궁금했을 뿐인데 이렇게 파고들어 올 줄이야.
사람을 죽였어도 봐주냐는 물음은 그저 예시를 들었을 뿐이었다.
“아니라고 하셔야죠.”
“아닐세…….”
하녀들이 최소한의 인원으로 믿을 만한 몇 명만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여러 사람 피곤할 뻔했다.
“그런 것이 왜 궁금하신지 모르겠으나 비밀이니 대공 전하만 알고 계세요.”
“무엇을?”
“저는 대부분의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려 하지만 사실…… 엄청나게 편애하는 스타일입니다. 제 사람이 아니면 나머지 사람들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체드란은 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거야 그로우 영식을 묵사발로 만들었을 적부터 진작에 눈치챘다.
제 사람의 범위가 굉장히 넓어서 그렇지, 아닌 자에게는 가차 없을 사람임을 본인이 티 내지 않았나.
이게 비밀이라니. 비밀의 뜻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공정의 뜻은 뜻만 아는 것 같고 부정의 뜻은 엄한 쪽만 아는 것 같고.
“그대는 언제부터 그렇게 멋대로 살았나?”
론체는 언제부터 그렇게 과격하게 살았냐고 묻고 그 주군인 체드란은 언제부터 그렇게 멋대로 살았냐고 묻는다.
뭔가 자신의 이미지가 날이 갈수록 이상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체드란이 진지하게 묻는 것 같아 나엘라도 진지하게 답했다.
“음…… 아마 제가 천재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인 것 같습니다.”
한없이 진지한 그 대답에 감기 한 번 걸려 본 적 없던 체드란은 살짝 어지럼증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