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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9)화 (19/220)

18화

나엘라는 체드란에게 건네받은 초대장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 나엘라에게 지안이 보고서를 뒤적거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도이네 백작 부인이 주최하는 다과회.”

“노헤스카 대공령과 가까운 영지 중 가장 큰 황제 쪽 소속이에요.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나중에 가셔야겠네요.”

“귀족 측 인사들은?”

“아무래도 마호세르디인 나엘라 님이 오셨으니 그리 많은 초대장이 오진 않았네요.”

“세크게라인 후작 영애의 생일 파티?”

“귀족파 중에서도 세력이 크지 않은 곳인데…… 세크게라인 후작이 진짜 미쳤네요. 겨우 영애의 생일 파티에 대공비 전하를 불러? 친목도 없으면서?”

지안이 들고 있는 보고서는 얼마 전에 마든이 건네준 자료였다. 요청했던 것 중 군사 정보는 제외되었으나 론체가 은근슬쩍 몰래 빼돌려 줄 수 있다는 말도 전했다.

아직은 그럴 필요까진 없다 하니 ‘그럼 나중에는 필요하시겠군요’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었다.

“아가산 백작? 여기는 백작 부인의 사교 모임이네.”

“다른 왕국에서 제국 귀족이 된 경우인데 이곳은 아직 중립이라네요. 타국 출신치고는 사업 수완이 좋아 세력이 꽤 큽니다.”

“페즈몽레 백작 영애의 교양 지도 모임? 이건 또 뭐야?”

“보통 대귀족들이 가신의 가문 자제들에게 검술이나 학문, 교양에 관해 일일 가정교사가 되어 주는 거죠. 페즈몽레 백작가는 가장 큰 가신 가문 중의 하나입니다. 백작령일 때부터 동맹이었죠. 여기도 한 번쯤 들르시는 게 좋겠네요. 교양 지도 모임으로는 말고요.”

수도 없이 쌓인 초대장들을 읽던 나엘라는 그 끝없는 미사여구와 허식에 지친 기색을 내비쳤다.

마호세르디에서는 병약한 막내딸이었으니 딱히 초대에 응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곳에 오고 나선 꼭 가야만 하는 곳도 생겼으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국경선에 있는데도 이 정도이니 수도로 가면 더할 예정이란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도에서는 이것보다 몇 배는 치열할 거예요.”

“차라리 결투를 하는 게 낫겠다.”

“대공 전하께서 벌써 초대에 응하라고 하진 않으셨을 거 아니에요. 당분간은 신혼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하죠.”

“미리 확인해 두려는 거지. 누구한테 서신이 얼마큼, 어떤 내용으로 왔는지는 표시해 놔. 거절 서신은 가린에게 부탁하고.”

“네. 그런데 요 며칠은 한가하고 조용하네요.”

“훈련도 잘 진행 중이고 첩자들은 대공 전하가 알아서 했고. 뭐, 이런 날도 있어야지.”

“이 정도면 내부 단속은 어느 정도 끝났네요. 이제 외부를 단속할 때가 아닐까요?”

“우리가 수도에 올라가 있어도 문제 생기지 않도록 해 놔야지.”

“황제파들 위주로 만나실 거예요?”

“앞으로는 황제파, 뒤로는 귀족파.”

“외줄 타기네요.”

“위태로울 줄 알고 시작한 건데 뭐. 그나저나 외부라……. 여기는 수도도 아닌데 각자의 영지에 초대하는 거 말고 사교 모임을 할 곳이 있나?”

“음…… 아무래도 파티 아닌 이상 친분이 없으면 우연히 만나기는 힘들죠? 가끔 근처 지역의 기사단끼리 합동 훈련을 한다고는 들었어요.”

“그럼 정말 파티 말고는 없군.”

“한번 파티에 나가시기 시작하면 이 분량에 비할 바 없이 훨씬 많은 연락이 쌓일 거예요. 그전에 미리 푹 쉬어 두셔야 해요.”

고개를 끄덕인 나엘라는 소파에 편히 기댔다.

마호세르디에서도 안 나가던 사교계를 여기서는 시작해야 한다. 그때부터는 나엘라는 잘 모르는 영역의 싸움이었다.

그래도 그냥 수도의 전초전이라고 생각하자며 마음을 편히 먹었다.

그러나 나엘라의 바람과는 다르게 얼마 후 파티 말고도 다른 영지에 방문할 일이 생겨 버렸다. 그것도 주변 영지들도 들썩이게 만들 사건으로.

한동안 계속 이어지는 평화로 몸이 찌뿌둥해진 나엘라는 기사들의 훈련을 구경할 겸 연무장으로 나갔다.

그 전날에 저택을 둘러보며 긴급 상황 시 움직일 대피 동선을 확인하던 나엘라에게 마든이 다가왔다. 드디어 집안일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저택의 유지 보수를 위한 가구 교체, 디자인, 연회 홀 장식 등을 떠들어 대는 바람에 쫓기듯이 침실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저녁에는 체드란을 통해 은근한 압박을 해 오기도 했으나 나엘라는 단박에 거절했다. 자신의 미적 감각이 무척 난해해 혼란스럽고 괴기한 디자인을 좋아한다는 말로 마든을 막았다.

어찌나 끈질기게 따라붙는지 결국 일 잘하는 직원을 납치라도 해서 꼭 데려오겠다는 약속까지 해야 했다.

그 이후 저택을 돌아다니는 것은 그만하기로 마음먹은 나엘라는 자연히 마음이 가장 편해지는 장소, 연무장으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기사들의 우렁찬 구호와 기합 소리에 벌써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역시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자리가 있는 거다.

“아닛! 대공비 전하?”

요즘 들어 제일 듣기 싫은 목소리에 나엘라가 황급히 발을 돌렸으나 이미 마든에게 붙잡힌 뒤였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아! 혹시 기사단 편성에 관한 예산안과 군자금 실태 조사 보고서를 받으러 가시는 겁니까?”

잿빛 머리 기사라며, 왜 자꾸 집사처럼 구는 건데.

아, 집사였지 참. 아니 왜 집사를 하는 건데?

그전에 날 무서워하지 않았었나? 왜 친근하게 구는 거지?

나엘라는 혼란스러웠지만 튀어 나가려던 의문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사단 훈련을 참관하러 왔다.”

“아, 그렇죠……. 전하께서는 기사셨죠……. 그것도 천재…….”

한눈에 보기에도 실망한 티가 나, 나엘라는 얼른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였다.

“그 과격한 결단력과 리더쉽을 행정에도 써 주시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나는 이만.”

“앗!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마침 저도 기사단 훈련이 매우 궁금하지 뭡니까?”

“그대가 왜?”

“전하 대신 안주인이 해야 할 모든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집사에게도 휴식이 필요합니다만……?”

“…….”

“제가 요즘 하반기 예산 편성과 사용 인원 재배치 건으로 바빠서 휴식을 못 취했습니다.”

지금 허락하지 않으면 며칠은 더 시달릴 판이다.

거기다 사용 인원 재배치 건은 아무리 봐도 사람들을 훈련시키라던 나엘라의 명으로 전반적인 편성을 다시 하는 듯해 약간의 부채감이 들었다.

“따라오게.”

함박웃음을 지은 마든이 품에 있는 서류를 급히 뒤적거리곤 순서를 바꾸었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나엘라에게 잘 보이는 자세를 잡았다.

서류 맨 앞면에는 ‘사용인 검술 훈련에 따른 기사단 추가 인원 편성과 사용인 숙소 추가 예산 안’이란 제목이 커다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보고서 제목은 간략하게 요점만 적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나엘라에게 보여 줄 요량으로 온종일 저 문서를 들고 있었거나.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은 제2 연무장에서 이뤄지는 기사 종자들과 수습 기사들의 훈련을 살피심이 어떠십니까? 왠지 어린 기사 지망생들의 훈련과 얼굴을 주의 깊게 보시고 싶지 않습니까?”

나엘라는 잘 가던 걸음을 우뚝 멈췄다. 마든의 얼굴을 훑었으나 그저 생글생글 웃으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만 고수했다.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말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반트모어 경에게 미리 말해야겠군.”

“아닛! 대공비 전하께서 저택의 시설들을 둘러본다는데 누구의 허락을 받는단 말씀이십니까?”

나엘라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마든은 또다시 생글생글 웃었다.

원래 무언가를 유도하는 듯한 대화는 좋아하지 않는 나엘라였지만 마든의 태도를 보아하니 대충 짐작이 갔다. 그의 태도가 딱히 기분 나쁘지도 않았고 론체에게 말하고 가면 안 되는 눈치였다.

“그럼 그냥 가 보지.”

“넵.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연무장을 지나 기사단 숙소를 지나니 그곳에는 제2 연무장이 있었다.

새삼 대공가가 얼마나 큰지 느껴졌지만, 비상시에는 대피소로 사용되는 곳이니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아직 어린 종자들은 연무장 오른쪽에서 목검을 들고 있었고 왼쪽에는 갓 소년티를 벗은 이들이 진검을 쥐고 있었다.

나이가 어려서일까. 나엘라가 등장하자마자 눈들이 동그래진 채 검을 놓치는 모습도 보였다.

“대공비 전하? 이곳에는 어쩐 일로…….”

교육하던 기사 하나가 달려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나엘라는 그저 구경하러 왔을 뿐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이쪽입니다! 이쪽을 구경하시죠!”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처럼 마든은 나엘라를 한쪽으로 끌고 갔다. 나엘라는 모른 척 걸음을 옮기던 중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마든이 왜 이런 호들갑을 떨며 자신을 데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대, 대공비 전하…….”

사색이 된 수습 기사를 바라보던 나엘라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누구지?”

수습 기사의 이름을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 가득한 멍과 피딱지, 그리고 눈 바로 아래 길게 난 흉터, 훈련복을 입고 있으나 카라 사이로 보이는 붕대와 소매 아래에 감긴 붕대까지.

검을 들고 훈련 중인 게 용한 상태였다.

우습게도 그 와중에 들고 있는 것이 사브르라 나엘라는 더 짜증이 몰려왔다.

“누구냐고 물었다.”

“그저…… 그저 수습 기사들끼리 싸움이 났을 뿐입니다.”

나엘라를 바보로 보는 모양이었다. 수습 기사끼리의 싸움은 분명 아니었다. 그들의 다툼이었다면 이렇게 다치도록 아무도 말리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같은 기사단의 기사끼리는 싸우더라도 팔과 손만큼은 건들지 않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수습 기사의 상태를 전반적으로 훑은 나엘라는 마든을 향해 돌아섰다.

“지금부터 이 사태에 대해 아는 것을 모두 고하라. 그렇지 않으면 자네도 함께 책임을 질 것이다.”

이에 화들짝 놀란 수습 기사가 마든은 아무 책임도 없다고 외쳤으나 소용없었다. 도리어 명분을 얻은 마든이 날름 고했다.

“처벌이라니…… 어쩔 수 없군요. 사실 엊그제 영지 간의 합동 훈련이 있었습니다. 대공령에선 붉은 월계수 기사단 말고 다른 기사단이 참가했는데, 마침 이 수습 기사도 훈련 대상이었죠. 훈련은 세크게라인 후작 영지에서 진행됐고요.”

세크게라인 후작이라면 영애의 생일 파티에 나엘라를 초대해 지안을 분노케 한 그곳이었다.

“그래서?”

“사흘 동안 진행됐는데 마지막 날 훈련이 끝난 저녁에 세크게라인 선임 기사 몇과 시비가 붙은 모양입니다. 시비는 상대가 먼저 걸었다 합니다. 이유는 기사가 사브르나 들고 다닌다며 조롱했다 들었습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도 말리지 않았나?”

“당시 식사 시간이라 숙소 뒤쪽에 수습 기사와 상대 선임 기사 셋밖에 없었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수습 기사는 털썩 무릎을 꿇고 다급하게 외쳤다.

“단장님과 집사님께는 제가 말씀드리지 말아 달라고 거듭 부탁드렸습니다! 이건 오로지 개인 행동한 제 잘못이고 전혀 문제가 생길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정도 상처를 다른 이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같이 생활하는 수습 기사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책임지는 기사들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다 론체나 마든에게까지 들어온 걸 테고 일이 커지지 않기를 바라는 수습 기사 때문에 이 일을 함구했으리라.

가만히 바라보던 나엘라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론체가 사색이 되어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세크게라인 후작이라…….”

“전하! 정말로 이 일은 기사들 간의 가벼운 주먹다짐이었습니다!”

문제가 커지겠다 생각했는지 조금 더 절박해진 목소리였다.

“그래, 외부 단속을 하려 하긴 했지. 내가 가끔 잊어버리곤 한다. 조금이라도 잃지 않으려면 먼저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껏 복잡한 길을 고수해 놓고 또 미적거렸구나.”

물론 그녀를 열받게 한 것은 일 대 다수로 수습 기사를 두들겨 팬 그놈들만이 아니었다.

“대공비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식은땀을 흘리는 론체를 향해 나엘라의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습 기사들을 포함한 전 기사단을 연무장에 집합시켜라.”

어느새 종자들과 수습 기사들의 훈련은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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