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20)화 (20/220)

19화

나엘라는 앞에 서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몇 개의 기사단과 수습 기사들까지 합치니 큰 연무장이 꽉 찰 지경이었다. 나엘라는 모든 이가 보이는 단상 위에 올라가 있었고 론체와 부단장들, 마든, 어느새 불려온 지안까지 그 옆에 서 있었다.

“나는 분명 너희의 모욕은 너희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대공을 향함 모욕임을 말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이번 일에 대해 보고하지 않았는지 말할 사람이 있나?”

나엘라의 말에 여러 기사들이 다양한 얼굴을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표정의 기사도 있었고 일이 커진 것에 불만스러움을 내비친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화나게 하는 것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이가 몇 없다는 거다.

이 사실을 대부분 알고 있단 뜻이다.

“반트모어 경.”

“예.”

“할 말이 있나?”

“제가 모든 기사들을 함구시켰습니다. 이에 대해 발설하는 자는 중징계를 받는다 일렀습니다.”

나엘라는 별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믿음보단 단장에 대한 믿음이 더 클 것이다.

이들이 나엘라에게 느꼈던 것은 믿을 만한 이가 생겼다는 설렘이지 오랜 시간 쌓인 믿음이 아니었으니까.

둘은 비슷하면서도 엄연히 달랐다.

나엘라도 이런 기사들의 습성을 알기에 바로 바뀔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기사들에겐 기사들만의 방법이 있었다.

머리로 인식시키는 것보단 몸으로 인식시키는 것. 나엘라는 지금 그것을 할 참이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이 일을 알고 계시는가?”

“모르십니다.”

체드란까지 모른다는 것은 조금 이상했지만 이들도 이들의 사정이 있겠지 싶어 넘겼다. 무슨 이유로 단 한 명의 기사조차 언질이 없었는지, 왜 체드란까지 모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울타리 안에 있으면 당당히 밖에 알려라. 울타리에 늑대가 들어왔으면 당연히 양은 울어 제껴서라도 이를 주인에게 알려야 한다. 아니면 주인이 늑대조차 물어 죽이는 사람이라고 협박을 하든가. 너희의 죄는 이 사실을 감추려 했음이다. 내 울타리 한쪽이 무너졌음을 숨기는 이들은 필요 없다.”

그녀가 기사단을 훑자 알리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너희는 나를 양조차 지키지 못하는 주인으로 만들었고, 그 한 번의 실수로 이 울타리가 만만함을 늑대들이 알게 했다. 겨우 수습 기사의 일을 비약할 필요가 있나 싶겠지만 그것은 오판이다. 이런 일조차 나를 믿지 못하는 너희가 더 큰일이 일어났을 때 나를 온전히 믿을 수 있으리라 보는가.”

나엘라가 옆에 서 있던 지안에게 눈짓하자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수습 기사의 생각은 일반 기사들로부터 나오고, 일반 기사들의 생각은 선임 기사들로부터 나오며, 선임 기사들의 생각은 기사 단장으로부터 나오지. 마음 같아서는 수습 기사들부터 기사 단장까지 전부 기합을 주고 싶으나 반트모어 경의 체면이 있으니 부단장들까지 기합을 받는다.”

나엘라가 자리를 비키자 앞으로 나선 지안이 말했다.

“오늘 여러분들의 기합을 책임질 지안이라고 합니다.”

그 내용에 론체와 부단장들은 물론 기사들까지 놀란 기색이었다.

“어떻게 하녀에게 기합을 받겠습니까. 차라리 제가 책임지고 엄히 벌을 주겠습니다.”

론체가 양해를 구했지만 나엘라에겐 전혀 먹히지 않았다.

“다른 가문의 기사에게 우리 수습 기사가 일 대 다수로 맞았네. 헌데 그것은 모욕이 아니고 하녀에게 기합받는 것은 모욕이던가?”

“그건…….”

“그리고 경에게 처벌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경은 내일부터 2주간 본관 행정부로 출근하라. 한번 숫자 지옥을 맛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마든이 바쁘다고 했으니 말이야.”

얼굴이 어두워진 론체를 지안이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엘라 님의 직속 하녀이지만 대련 상대이기도 했고, 전쟁 시에는 보좌관으로 일했습니다. 또한 저도 함께 기합을 받으며 체벌을 진행할 겁니다.”

그리고는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이번 일을 겪고 나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바로 나엘라 님에게 달려와야 가장 뒤탈이 없음을 알게 될 거예요. 전투를 겪다 보면 주인을 믿지 못하는 기사단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뼈저리게 느껴지니까요. 이 작은 일이 남부의 전선을 지키는 기사단에게 주인을 믿는 방법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될 겁니다. 주인을 믿어야 목숨이 오가는 전쟁에서 한 명이라도 많은 병사들을 살릴 수 있어요.”

이것은 나엘라의 신조였다. 또한 그녀가 앞으로 이들의 목숨을 가장 많이 살릴 기초였다.

그리고 마호세르디에서 지안은 주인만 알아보는 미친개로 통했음을 기사들은 몰랐다. 그 강한 마호세르디 기사들도 그녀의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다.

그것을 이번엔 노헤스카의 기사들이 알 차례였다.

지안이 시작하려는 것 같자 나엘라는 바로 몸을 돌렸다.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던 론체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다친 수습 기사는 어쩌시겠습니까?”

“다쳤다고 봐주는 것은 없다. 예정된 기합을 모두 받으라고 전하라. 나는 분명 그에게 손가락질하는 이가 있다면 즉시 고하라고 얘기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 놓고도 함구했으니 그는 남들보다 죄가 크다.”

다친 이라도 옳은 것과 틀린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나엘라의 처사에 론체는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 기사가 그냥 넘어가 달라 간청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모욕을 받고도 화를 낼 수 없었으니 가장 반성해야 하는 건 맞았다.

그런 론체를 두고 나엘라는 근처에 있던 하녀를 불렀다.

“침실로 가서 가린에게 내 승마복과 말채찍을 가져오라 이르고 다른 이에게는 말을 준비시키라 일러라.”

갑작스러운 지시에 궁금증이 인 마든이 불쑥 끼어들었다.

“갑자기 승마를 하시려고요?”

“말을 타다 보면 길을 잃기도 하고, 길을 잃어 도착한 곳이 우연히 세크게라인 후작가일 수도 있고, 또 우연히 그곳이 내 수습 기사를 팼던 놈들의 가문이기도 한 법이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마든은 맞장구를 쳤다.

“마침 그곳이 영지에서 한 시간 반밖에 안 걸리는 거립니다. 한 시간 반이면 승마를 즐기기엔 적절한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처럼 그대와 마음이 맞은 적이 없었군.”

“이것 참, 오늘 대공 전하께서 안 계시니 어쩔 수 없이 말벗 겸 제가 대공비 전하와 승마를 함께해야겠네요.”

마침 대공령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마든에게 몇 가지 물어야 할 것도 있었으니 나엘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론체는 마든의 미소가 수상했지만 두 사람만 보낼 수 없어 자신의 말도 준비하라 일렀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고 넘어가 버렸다. 체드란에게는 보고해야 되지 않겠냐는 론체를 마든이 만류했다는 것을.

거기다 나엘라가 혹여 일이 번져 영지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회유했음을.

그래도 보고해야겠다는 기사 몇을 붙잡고 대공비 전하는 지금 너무 바쁘니 기다려 달라 부탁했음을.

체드란이 저택을 비운 지금이 적기란 생각에 이제 와 터트렸음을.

이 모든 것은 나엘라의 과격하고 시원한 방식에 푹 빠져 버린 마든의 계략이었다.

*

저택으로 돌아온 체드란은 말에서 내리기도 전에 공기 속에서 감도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본관 앞에는 그를 마중 나온 사람들 중 마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리를 체드란 대신 업무를 처리해 왔기에 보고차 대기해야 하는 론체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얼굴이 핼쑥해진 하녀장만 동동거렸다.

“무슨 일이지?”

“그게 대공비 전하께서…….”

이야기를 들은 체드란은 머리를 싸매기보다 왜 자리를 비울 때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대공비의 성격은 대체 왜 그 모양인지, 서신으로 책임을 물어도 될 일을 얼마나 크게 만들려고 직접 그곳까지 갔는지 한숨이 나왔다. 나엘라에 관해서는 매번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리고 그제야 계약 사항에 들어 있던 이혼 불가 항목이 떠올랐다. 어쩌면 감당하기 어려운 나엘라의 성격 때문에 그런 조항이 포함된 것은 아니었을까.

체드란은 말에서 내린지 몇 분 만에 다시 말에 올랐다.

“세크게라인 후작가로 간다.”

그와 함께 나갔던 기사들도 다시 말에 올라야 했다.

*

나엘라가 봤던 이들 중에 가장 우아하고 교양 있어 보이던 이는 가끔 영지에 놀러 왔던 셋째 황녀였다. 그녀는 다나한 오라버니를 좋아해 줄기차게 국경까지 온 듯했지만.

그 덕에 나엘라도 보고 배운 것이 있었다.

허리를 바르게 세우고 어깨는 반듯하게 편다. 걸음걸이는 사뿐히, 상황에 따라 우위를 점해야 할 때는 느긋하게 움직인다. 다리는 움직여도 머리와 어깨는 고정시켜야 하며 흔들려서 안 된다.

상대에게 예의는 지키되 신분고하의 문제가 아닌 교양이 있는 사람이기에 지키는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말투는 부드럽되 그 속에 있는 것까지 부드러울 필요는 없다.

나엘라는 셋째 황녀의 말투를 되새기며 후작가의 집사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걸음마다 흔들렸고, 딱 붙는 승마복 아래 신은 승마 부추가 대리석 바닥과 부딪히며 마찰음을 뱉었다.

그 와중에 틈틈이 마든이 말했던 내용 중 써먹을 수 있는 수단을 고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엘라 노헤스카 대공비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집사의 노크와 함께 모시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열리자 소파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남자가 보였다.

키는 170cm 정도에, 풍채는 있으나 운동을 안 한 지 한참 됐는지 단련한 느낌은 없었고 인상은 평범했다. 특이한 점은 눈썹 위 두껍게 지나가는 흉터 정도?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반갑습니다. 나엘라 노헤스카라고 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그 말과 함께 자리에 다시 앉은 후작을, 나엘라가 멀뚱히 쳐다보았다. 의아하다는 눈으로 후작이 쳐다보자 나엘라는 그제야 깜짝 놀란 척을 했다.

“아, 이런. 제가 대공령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헷갈렸습니다. 마호세르디에 있을 때는 다들 제게 상석을 권했거든요.”

왜 네가 상석에 앉아 있냐는 물음이었다.

대공과 대공비는 황실 바로 다음이니 엄연히 후작보다 윗사람이었다. 하물며 공녀였을 때도 모두 상석을 권했는데 후작 네가 감히 대공비 앞에서 상석에 앉아 있다니.

그런 나엘라의 뜻을 느낀 걸까. 그가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상석을 권해 왔다.

제 자식 생일 파티 초대장을 보낼 때부터 개념 없다는 생각은 했지만, 나엘라를 앞에 두고서도 그럴 줄은 몰랐다.

“아닙니다.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후작의 권유에 따라 상석으로 간 나엘라는 마치 제집 응접실인 양 길게 다리를 꼬고 편하게 앉았다. 그런 나엘라의 뒤로 마든과 론체가 호위하듯 섰다.

응접실에 있는 이들이 자리를 잡자 탁자에 찻잔이 놓이고 색이 좋은 붉은 홍차가 향을 풍기며 졸졸 소리를 내었다.

“승마를 하다 길을 잃으셨다고요?”

“제가 대공령에 온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습니까?”

그 이야기에 후작이 론체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후작은 론체의 이름은 들어 봤어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호위기사로 보이는 그가 있었음에도 길을 잃었다는 것은 좀 어폐가 있었다.

후작의 시선이 론체에게 향하자 나엘라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는 홍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 순간 그녀가 눈에 띄도록 몸을 움찔했다. 그러더니 어색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 슬쩍 밀었다.

다시 마시지는 않겠다는 의미였다.

차와 술은 보통 자신의 입맛이 얼마나 고급인지를 나타내는 권력의 상징 같은 것이다. 이것을 이리 눈에 띄게 거부한다는 건 퍽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차가 입에 맞지 않으신가 봅니다. 홍차는 안 드십니까?”

후작의 입가가 살짝 경련하는 것을 본 나엘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다른 귀족들이라면 예의를 차려 다른 차를 말하거나 오늘은 입맛이 없다는 말로 돌렸을 터. 하지만 자신은 공작가에서 사랑만 받은 막내딸이란 타이틀이 있으니 안하무인으로 나가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차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마시지만 아무래도 마호세르디에서 먹던 것이 익숙하다 보니 입에 맞지 않네요.”

“그, 그러십니까……?”

후작의 입가 경련이 조금 더 심해졌다.

마호세르디에서는 워낙 고급스러운 차만 마셔 와 웬만한 것들은 다 입맛에 안 맞는다는 이 말을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데…… 저희 저택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후작이 빠르게 화제를 돌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엘라는 그 화제 전환에 응해 주기로 했다. 어차피 질질 끌 생각도 없었다.

“길을 잃어 우연찮게 세크게라인 영지에 들어왔다가 제 호위에게 재밌는 얘기를 들었지 뭡니까.”

나엘라는 제 표정이 최대한 자연스럽길 바라면서 살며시 웃었다.

황녀를 보고 대단하다고 느꼈던 그 표정 그대로, 입꼬리는 과하지 않게 살며시 올라가나 눈은 웃지 않는다.

“그래서 영지전을 신청하러 왔습니다.”

영지전이란 소리에 후작의 입가 경련이 딱 멈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