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영, 영지전이라니 그 무슨……?”
옅게 경련하던 입매는 단단하게 굳고, 대신 그의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렸다.
저 정도면 마그네슘 부족 현상이 아닌가 싶다가도 나엘라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수습 기사와 후작의 기사들과 싸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아,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폭력이었죠.”
후작은 얼핏 지나가는 말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수습 기사의 패배는 대공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니 아무 말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넘어갔던 일이었다.
“그건 그저 작은 불화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그런데 제가 그때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었는데 말입니다…….”
나엘라는 조금 고민이라는 듯 이마에 손가락을 살짝 갖다 댔다. 이 모습을 하녀들이 봤다면 연기 쪽으로도 천재가 분명하다며 난리 쳤을 것이다.
“그때 후작의 기사들이 했던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라…….”
마든의 분노로 조금 부풀어진 것 같기는 했지만, 나엘라가 들었던 상세한 이야기는 확실히 과했다. 그 자리에 다른 노헤스카 기사들이 있었다면 그냥 넘어갈 일은 절대 아니었다.
상대는 수습 기사이니 더 쉽게 그런 말들이 나왔겠지.
“노헤스카 대공이 수치도 모르고 자신의 기사에게 하급 용병이나 쓸 법한 사브르를 가르쳤다느니, 계집애처럼 검을 휘두르는 꼴이 같은 기사라고 칭하기 부끄럽다느니, 세크게라인 후작가에서는 이런 놈을 받아 줄 리 없다느니…….”
나엘라는 더 말할 수 없다는 듯 입을 가렸다.
사실 이게 다지만 보아하니 후작은 제대로 된 사정을 못 들었을 것 같았다.
마든에게 들을 적에 놀란 건 론체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런 이야기를 꼬치꼬치 캐물은 마든이 대단한 거지, 누구든 쉽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후우, 제가 정말 대공 전하께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그 기사에게 사브르를 추천한 건 저였거든요. 마호세르디에서는 사브르를 쓰는 이들도 꽤 있어 제안한 것인데, 이것이 그리 수치스러운 일이라니…….”
마호세르디를 언급한 것만으로 그 기사는 노헤스카 대공은 물론 마호세르디까지 지적한 것이 되어 버렸다.
“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여봐라! 어서 그 기사들을 데려와라!”
명령을 받은 하인은 부리나케 응접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영지전이라는 단어를 들었으니 황급히 움직이는 것이 당연했다.
얼마 후 몇 명의 기사가 하인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왔다. 다들 상황 파악이 안 됐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지만 후작의 노성에 눈을 빠르게 굴렸다.
“대체 무슨 짓들을 한 것이냐! 당장 그날의 일을 소상히 말해 보아라!”
펄펄 날뛰는 후작을 나엘라가 만류하며 자리에 앉혔다.
“그런 식으로 하다간 없던 죄도 생기겠습니다. 저는 매우 공정한 사람이라 딱 필요한 죄만 물을 생각입니다.”
영지전을 신청하러 왔다던 나엘라가 오히려 침착하게 구니 후작도 슬쩍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기사들을 문책하는 것을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나엘라가 양해를 구하자 기사들의 주인인 후작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참 생각 없는 작자였다. 어떻게든 죄가 없게 만들어야 하는 판에 적이 될지도 모르는 나엘라에게 냉큼 문책권을 넘기는 꼴이라니. 이래서야 기사들이 후작을 어찌 믿겠는가.
“우선…… 우리 측 수습 기사는 아직 정식 기사가 아니니 경이란 호칭은 빼겠습니다. 노헤스카 기사단 소속 포츠사 하테못 자작 영식과 다툼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나엘라의 물음에 서로를 바라보던 기사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무엇 때문에 불려 왔는지 대충은 눈치챈 모양이지만 앞에 있는 이가 여자라서인지 불만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밑에 있는 자들을 보면 그 위에 있는 자들도 뻔하다고, 후작이나 기사들이나 유유상종인 것은 당연했다.
“그럼 해당 발언의 사실 확인을 부탁드리죠. 노헤스카 대공이 수치도 모르고 자신의 기사에게 하급 용병이나 쓸 법한 사브르를 가르쳤다, 계집애처럼 검을 휘두르는 꼴이 같은 기사라고 칭하기 부끄럽다, 세크게라인 후작가에서는 이런 놈을 받아 줄 리 없다. 해당 발언을 한 것이 맞습니까?”
기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차마 그런 말까지 전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겠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말들을 모두 세세하게 듣고 온 마든이 대단한 거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놈들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상대는 수습 기사 하나였고 목격자는 없으며 그의 증언엔 힘이 없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가 과하게 폭행을 당했다는 것뿐.
기사 하나가 눈치 빠르게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절대 오해 십니다! 저희가 손속이 과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수습 기사가 먼저 세크게라인을 모욕했고 그에 분노해서 과해진 것뿐입니다. 그 일에 대한 처벌은 받겠습니다만 저희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기사가 먼저 세크게라인 후작가를 모욕했다고요? 이런…….”
나엘라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후작은 그럴 줄 알았단 표정을 지으며 콧구멍을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공정한 판단을 위해 세 기사를 각각 다른 방에 가두고 경위서를 받겠습니다. 어떤 모욕을 어떤 표정으로, 어떤 자세로 했는지 상세히 써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경들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당연히 노헤스카에서는 그에 맞는 보상을 할 것이고, 아니라면 세크게라인은 영지전을 준비해야 할 겁니다.”
나엘라의 말에 세 기사는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려 벌벌 떨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서로 말을 맞추고 온 것은 아닌 듯했다.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벌인 기사들이니 그에 따른 대책을 짰을 리 없다. 혹은, 짰더라도 허술하리라 생각한 나엘라의 예감이 적중한 모양이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깨달았는지 후작이 벌떡 일어나 끼어들었다.
“겨, 겨우 수습 기사의 일입니다! 그런 일로 영지전이 일어나면 필시 노헤스카 대공의 명예가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바로 그 명예가 문제입니다.”
나엘라는 피곤하다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대며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비록 기사답지 못하게 수습 기사 하나에 정식 기사 셋이 달려들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저희 기사가 졌으니 이게 문제입니다. 혹여나 대공의 기사들이 약하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어쩌냐는 말입니까.”
“제, 제가 기사들을 호되게 처벌하여…….”
“그렇게 해서는 명예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기사들은 상대가 각자의 가문을 모욕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것은 노헤스카와 세크게라인의 명예도 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해결을 하러 온 저도 당연히 대공가의 명예를 걸고 움직일 수밖에요.”
비약도 이런 비약이 없었고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그러나 후작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원래 귀족 집안의 일이 작은 말 한마디로 영지전이 일어나기도 하고 세기의 다시없을 추문이 되기도 한다. 상대가 명예를 훼손시켰다고 말한다면 그런 법이었다.
후작은 이제야 깨달은 듯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나엘라의 등 뒤에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가 동시에 있다는 것을.
나엘라가 권력으로 찍어 누르면 자신은 그대로 찍혀 내려가야 했다.
“뭐, 뭘 원하십니까…….”
나엘라는 기대하던 대답이 들려온 것에 아주 만족했다.
“이런……. 후작께서는 제가 뭔가를 바라고 온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대공가의 명예와 포츠사 하테못 자작 영식의 명예입니다.”
사실 나엘라는 명예 같은 것들을 코딱지만큼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쓸모없는 것의 효용성을 잊은 것은 아니다. 명예는 때때로 굉장히 좋은 명분이 되었다.
“제 수습 기사의 명예를 어떻게 갚아 주실 겁니까? 재물? 권력? 대공가에서도, 제 친가인 마호세르디에서도 그런 것은 차고 넘칩니다. 대체 어떻게 갚을 생각이신지……?”
“영지전 말고 다른 방향을 좀 생각해 주시면 어떠신지…….”
“후우…… 후작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이것 참…….”
나엘라의 손가락이 소파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일단 세 기사의 경위서는 받도록 하죠. 이건 그저 사실 확인을 위한 일입니다. 제 기사가 잘못했다면 그 기사를 처벌해야 하니까요.”
“대, 대공비 전하!”
“걱정하지 마세요. 경위서는 경위서일 뿐입니다.”
나엘라의 눈짓에 마든이 움직였다. 론체는 나엘라를 호위해야 하니 곁에서 대기해야 했다. 결국 무력 충돌도 가능한 마든이 한 명씩 데려가기 시작했다.
하인들이 안내해 주는 방으로 기사들을 인도하되, 그들의 감시는 마든의 눈길 속에서 이뤄질 것이다.
“이렇게 하죠. 비록 제 기사는 수습 기사이고 상대는 정식 기사지만 명예를 걸고 일 대 일로 싸우는 겁니다. 세 명 중 가장 강한 이도 상관없이 대표로 뽑아 주세요. 물론 그 결투에는 양 가문의 명예도 걸려 있을 겁니다. 만약 저희가 진다면 이 일에 대해 아무 말 없이 넘어가는 것은 물론, 후작가의 명예를 흠집 낸 것에 대한 보상료를 드리고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가 가능한 범위에서 후작이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다만 해당 기사가 진다면, 일개 수습 기사에게 졌으니 후작의 기사단이 실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 경험과 실력을 쌓기 위해 이번에 예정되어 있던 토벌전은 후작가의 기사단이 나서는 것으로 하지요.”
후작은 입을 떠억 벌렸다. 후작의 머릿속에는 토벌전이라는 단어가 팽팽 돌아갔다.
이때까지의 토벌전은 대공이 전쟁에 미쳐 있다는 평이 나올 정도로 모두 체드란의 몫이었다. 덕분에 근 10년 동안 국경 근처의 영지들은 전쟁을 겪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야만인들의 토벌전이라니.
더군다나 소문으로는 황제가 체드란을 압박하려 꽤 위험한 토벌전을 지시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은 후작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 한줄기 빛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나엘라와 론체를 긴장시키고 분위기를 한 번에 바꿀 수 있는 이의 등장이었다.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하인이 긴장된 표정으로 말을 전하자 나엘라와 론체의 눈이 마주쳤다. 마무리가 안 된 상태에서 체드란에게 알려진 건 처음이었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 없었다.
나엘라는 전쟁광이라던 그의 소문을 떠올렸다.
만약 그가 정말로 전쟁을 좋아하는데 자신이 후작에게 준 것이라면? 좋아하던 걸 뺏겼을 때 체드란은 어떻게 행동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응접실 문이 열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큰 키, 떡 벌어진 어깨, 어디서 바로 왔는지 모를 가벼운 흉갑, 망토를 고정시킨 한쪽 어깨의 보호대, 발목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망토까지.
완전 무장이 아닌데도 지금 당장 영지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의 남자였다.
백금발까지 가지런히 뒤로 넘긴 체드란이 무감정한 푸른 눈으로 바라보자 후작은 마치 자신의 구세주라도 되는 듯 매달리기 시작했다.
“대공 전하!”
그 뒤를 따라오던 노헤스카의 다른 기사들이 단호하게 제지했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후작을 제치고 나엘라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체드란 전하,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나요?”
그렇게 다정한 어조일 수가 없었다.
입꼬리까지 사르륵 올라가 우아하게 체드란을 맞이하는 나엘라를 보니 후작은 문득 호사가들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정략결혼이 아니란 말인가?
“일단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나엘라가 상석에서 비켜서자 체드란은 움찔 물러날 뻔한 몸을 자제하며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대공저가 아닌 이곳에서 뵙는 것도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대공이 앉자 바로 오른쪽 소파에 따라 앉은 나엘라는 둘째 오라버니를 바라보던 3황녀의 눈빛을 되새겼다.
“무, 크흠,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다.”
나엘라가 체드란의 팔 위로 슬쩍 자신의 손을 올렸다. 체드란이 말을 더듬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후작과 대화를 나누며 마무리하던 중이었습니다.”
체드란의 등장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지만, 후작은 애가 타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나엘라가 자애로운 태도로 후작에게 발언을 넘겼다.
“그에 대해선 세크게라인 후작이 설명해 줄 겁니다. 제게 들으면 아무래도 공정해지지 않을 것 같아서요.”
제 유리한 쪽으로 나엘라가 말하리라 생각했던 후작은 옳다구나 하고 이때까지의 일을 술술 꺼냈다. 물론 중간중간 변명 가득한 사설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체드란은 한쪽 눈썹을 올리고 덤덤히 뱉었다.
“일 대 다수라니 요즘은 명예도 모르는 이들이 개나 소나 기사를 하는 모양이군.”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가는 후작을 보며 나엘라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