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이것은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만족한 미소였다.
체드란이 들어온 이후 나엘라가 긴장한 이유는 오로지 한가지였다.
일을 크게 만든 것.
사고 친 다음에는 대공가의 명예를 위해 한소리를 들어도 일을 물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지금은 다르다.
체드란의 반응을 알 수 없었다. 혹 그가 이 결투를 반대한다면 오롯이 그 문제는 나엘라의 것이 되어야 했다. 두 사람의 사이에 문제가 있다고 후작이 느낀다면 앞으로의 일들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둘째 오라버니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나엘라는 체드란에게 한껏 살랑거리고 있었다.
“일 대 일 결투라…….”
체드란이 잠시 고민하듯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후작에게는 절망을, 나엘라에게는 만족을 선사하는 대답이 나왔다.
“영지전은 과하지만 일 대 일 결투는 나쁘지 않군. 이 결투를 승인한다.”
“대공 전하!”
후작의 외침이 울려 퍼졌지만, 나엘라는 그저 함박웃음을 지었다. 요즘 들어 이렇게 기쁘게 웃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 낯선 웃음에 체드란은 또다시 움찔거렸지만, 나엘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제 산책이 길어져 절 찾으러 오셨나 봅니다. 일을 보고 오셔서 피곤하실 테니 저택으로 돌아가시지요.”
자연스럽게 체드란을 일으킨 나엘라는 오붓한 부부처럼 팔짱을 꼈다.
보는 이가 많으니 그것을 내칠 수도 없어 체드란은 묘하게 삐걱거리는 신체를 무시하며 응접실을 가로질렀다.
“이른 시일 내로 일정을 담은 서신을 보내지. 다음에 볼 때는 결투 날이겠군. 준비 잘하도록.”
마지막 확인 사살까지 마무리한 체드란은 저택을 나섰다. 그 뒤를 따라 어느새 경위서를 모두 챙긴 마든과 론체, 다른 기사들도 이어졌다.
“돌아가지.”
체드란이 내미는 손을 잡으며 나엘라는 말에 올랐다. 한껏 배부르게 먹이를 먹은 고양이 같은 미소가 내내 그녀의 표정에 머물렀다.
그런 그녀가 어색해 체드란은 앞만 보았다.
*
“우리 수습 기사가 지면 어쩌려고 그러나.”
천천히 말을 몰던 나엘라에게 체드란이 물었다.
“대공가의 기사가 맞고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주군이신데 그 정도는 감수하시지요.”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서일까? 나엘라는 다시 뻔뻔하게 굴었다. 아까의 부드럽던 태도는 후작저의 정문을 나서자마자 모두 사라졌다.
“만약 정말로 진다면 지는 것과 동시에 대공가의 기사가 후작가의 기사 여러 명에게 일 대 다수로 폭행당한 것, 해당 기사는 수습 기사였다는 점이 바로 소문날 겁니다. 명예가 그리 크게 상하진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사실 나엘라는 이기나 지나 소문을 퍼트릴 생각이지만, 밝히기보다 꿀꺽 말을 삼켰다.
“하지만 영지전을 입에 올렸으니 귀족들은 예민한 반응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대공 전하.”
나엘라가 말의 속도를 살짝 높여 체드란의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덕분에 체드란부터 뒤이어 따르던 자들도 모두 멈추어 섰다.
나엘라는 당황한 듯한 체드란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소문을 신경 쓰셨습니까?”
“앞으로는 신경을 써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 소문이 문제입니까?”
“그럼 무엇이 문제지?”
“대공께서는 왜 그렇게 집안일에 관심이 없으십니까? 대공께서 신경 쓰지 않으시니 그로우 영식 때도, 하녀와 기사들 사이의 문제도, 이번 일도 제가 해결하고 다닌 것 아닙니까?”
체드란은 이토록 어이없던 적이 없었다.
그간 나엘라가 한 일을 되짚어 보았다. 가신 가문의 영식을 두들겨 팬 것, 기사 하나를 나체로 묶어 둔 것, 기사단을 관리 단속한 것.
대체 언제부터 안주인의 의무에 그런 일이 포함되었나.
더군다나 체드란이 알고도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모두 그가 없을 때 일이 벌어졌던 것뿐이지 않나?
“그대는…….”
무표정하긴 해도 나엘라가 얼굴에 ‘뭐? 어쩌라고?’란 의미를 담았다는 것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래서 하려던 말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내가 없어도 저택은 잘 지키겠군.”
그녀의 얼굴에 뭔 소리를 하느냐는 의문이 떠올랐다. 체드란은 그저 이번 일을 떠나 이때까지의 나엘라를 본 감상을 말했을 뿐이었다.
만약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 기습이라도 당한다면 최초로 안주인이 검을 들고 싸우는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뭘 했냐며 전쟁에서 돌아온 자신을 타박할지도 몰랐다. 억울하기는 하겠으나 저택은 잘 지킬 테니 의외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를 좀 적절한 타협 정도로 넘길 순 없나?”
이런 나엘라도 나쁘지 않았지만, 매번 이런 식이라면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대공가에도 타격이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대공가에 대한 타격 외 모든 것을 나엘라가 감당해야 할 터다.
“제가 일을 키운다는 말씀이십니까?”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엘라는 모르쇠를 펼쳤다.
“사고를 안 칠 수는 없냐는 말이다.”
그 말에 나엘라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답은 뻔한 것 같은데 나름 고민하는 듯해 체드란은 웃음이 새었다.
“그렇다면 방금 해결한 방식처럼 결투는 어떻습니까?”
뻔할 것 같다는 말은 취소였다.
“결투?”
“결투는 좀 그렇군요. 대련은 어떻습니까? 전하께서 이기시면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대련이라는 말에 체드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자신의 부인과 대련을 하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당황스러워하는 체드란 뒤로, 대기하고 있던 론체는 식은땀만 흘렸다.
노헤스카 대공저에 도착해 선임 기사부터 부단장, 론체마저 꺾은 그녀다. 아직 꺾지 못한 이는 체드란뿐이었다.
노헤스카에 아직 이기지 못한 이가 있다는 것은 나엘라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사고를 안 치는 건 장담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사고 치기 전에 대공 전하께 말은 하겠습니다.”
거기에 대련에서 이긴 보상이 사고를 안 치겠다는 말도 아닌 사고 치기 전에 말은 하겠다는 거라니.
뻔뻔한 것과 말도 안 되는 보상, 더 말이 안 되는 부인과의 대련. 대체 어떤 점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체드란은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는 참…… 명예가 드높은 마호세르디답지 않군.”
“죽으면 명예조차 소용없습니다. 저는 명예롭게 죽는다는 말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러니 제게 그런 타박은 하지 마시지요.”
체드란은 문득 자신이 나엘라에게 너무 휘둘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나엘라가 기사단을 활개 치는 것도 내버려 두었고,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선을 넘는 것도 묵인했다. 오히려 그녀의 뒤처리를 하느라 바쁘지 않았던가.
그 이유가 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악몽을 꾸는 습관을 눈치챈 뒤로 그녀의 하얀 손에 자꾸 시선이 가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녀들이 작은 일에도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 것처럼 굴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엘라가 기사들에게, 하녀들에게 했던 그 말들이 체드란 자신에게도 작은 설렘을 가져다줘서일지도 몰랐다.
그 어떤 일에도 자신을 지켜 줄 사람, 자신의 명예가 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는 사람, 힘도 있고 권력도 있으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능력이 되는 사람.
어렸던 체드란이 형제들의 죽음 속에서, 수많은 낭떠러지 앞에서 간절히 원하던 그런 사람이지 않았던가.
“하…… 마음대로 하도록.”
나엘라는 아까와 같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에 체드란은 깨달았다. 그녀가 막무가내로 저지르는 행동들이 상처 많고 어렸던 자신에게 위안처럼 다가온다는 것을 말이다.
나엘라를 조금 빨리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문득 그런 실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
“검을 들어라.”
포츠사의 눈동자가 잔뜩 요동을 쳤다. 지옥 같던 기합을 받고 겨우 하루 푹 쉬고 일어난 참이었다.
사람은 유유상종인 법이다. 그런 이유로 대공비의 놀이 하녀였다던 지안은 성격 또한 아주 똑같았다. 함께 기합을 받으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지안에게 얼마나 벌벌 떨었나.
비록 부상으로 제대로 된 몸 상태가 아니었지만 포츠사는 끝까지 함께 버텼다.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생각에 죄책감이 들어 입술이 다 터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기합이 끝난 후 주변 기사들에게 부축받으며 숙소로 돌아간 그는 만 12시간을 기절해 있다가 깨어난 참이었다.
그런 그의 앞에 얇고 긴 사브르와 가벼운 셔츠에 바지를 갖춰 입고 머리를 올려 묶은 나엘라가 나타났다.
“아직 소식을 전달받지 못했나? 그대는 그대를 폭행한 기사 세 명 중 한 명과 결투를 할 예정이다. 그래도 상대는 정식 기사인지라 그대가 이길 가능성이 적겠지.”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포츠사에게 나엘라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대가 이기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마침 일반적인 기사보다 근력이 적고 스피드가 빠른 검술을 구사하는 내가 이곳에 있으니 다행이지 않나? 그대와 내 검술은 아주 잘 맞을 것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론체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고 다른 기사들은 안쓰럽다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 또한 어제 지옥 같은 기합에 오늘 정해진 훈련까지 그대로 받은 참이라 온몸이 삐걱대었다.
스르릉─ 그런 그에게 앞날을 외면하지 말라는 듯 나엘라가 들고 있던 검을 뽑았다.
평범한 롱소드 같았으나 낡아 보이는 검집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이 검이 바로 나엘라가 대공가에 도착한 날 짐을 뒤지지 못하게 했던 원인으로, 그녀가 아끼고 아끼는 애검이었다.
오로지 나엘라만을 위해 제작된 검이었다. 다른 검에 비해 가벼운 것은 물론, 나엘라의 검술을 위해 무게 축이 가속도를 더욱 잘 받도록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순간, 포츠사는 검의 한 면에 빼곡하게 새겨진 작은 글자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더 잘 보이도록 방향을 조정해 준 나엘라는 조용히 읊었다.
“고통이 남기고 간 뒤를 보라.”1)
의아한 문장이었다. 포츠사가 고개를 기울이자 나엘라는 처음 이 문장을 받았을 때를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첫째 오라버니가 새겨준 문장이다. 내가 처음 악몽을 꾼 날이었지. 어느 거장이 남긴 구절로, 고통이 지나고 나면 먼 훗날 나의 향기가 된다는 뜻이다.”
대중적인 해석과 단제가 나엘라에게 해 준 해석은 달랐다.
그러나 나엘라는 오라버니의 해석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내가 지금 고통스러워도 훗날 나의 힘이 되고 나의 향기가 되어 있기를 바랐다.
처음 그 구절을 들었을 때의 나엘라와 같은 얼굴을 한 포츠사가 멍하니 물었다.
“그 구절은 단 한 문장입니까?”
“아니. ‘고통이 남기고 간 뒤를 보라. 고난이 지나면 반드시 기쁨이 스며든다. 고난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가 전체 문장이다. 그대에게도 이 구절이 어떠한 울림을 주는가?”
“네…….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그렇다면 그대도 고난과 고통을 겪은 사람이군. 행복했던 이에게는 별 울림을 주지 못할 테니 말이야.”
포츠사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리고는 검을 잡았다.
그의 눈빛이 아까보다 훨씬 마음에 들어 나엘라는 웃음이 나왔다.
“내 훈련은 따라오기 힘들 걸세.”
“각오하겠습니다.”
나엘라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그에게 검을 내리쳤다.
1)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독일의 시인, 극작가, 정치가, 과학자)